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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an 09. 2017

졸업반

미로 속에서 길을 찾다

제주도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중문지구에서 저녁을 먹고 제주시의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다. 렌터카에 타서 내비게이션을 맞췄다. 그리고 버릇처럼 티맵을 켜서 경로 설정을 했다. 역시나 렌터카에 장착된 내비게이션보다 티맵은 더 빠른 길을 안내해 주었다. 효율적인 안내를 받았다 생각하고 티맵의 경로를 따라 운전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는 점점 산악 지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길은 구불구불했고, 칠흑 같은 어둠과 자욱한 안개 때문에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앞차의 불빛에 의지하여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앞차들이 속도를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면 낭패였다. 오른쪽에는 절벽이 있고, 왼쪽에는 마주 오는 차량들이 있었다. 한 번의 실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5분 빨리 가려다 오는 동안 내내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온몸에 경련이 일 정도의 긴장이 조금 풀린 후에 찾아보니, 우리가 지나온 길은 그 유명한 1100번 국도였다. 날씨 좋은 대낮에는 천국과 같은 경치의 드라이브 코스라고 했다. 하지만 안개가 낀 깜깜한 밤에는 지옥과 같은 난코스였다. 최단 경로로 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믿음은 그날 밤 이후로 깨졌다.


홍덕표 감독의 ‘졸업반’은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광흥대학교 미술대학 졸업반 신주희는 졸업 작품으로 미로를 그린다. 사회로 진입하는 졸업반 학생들의 상황을, 탈출구를 찾는 미로에 투영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극 중에서 신주희가 직접 설명한 작품 구상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누구나 미로 찾기를 하다 보면 자신 앞에 놓인 길이 막힌 골목인지 아니면 출구를 향한 길인지 확신이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미로가 매번 선택의 길에 놓이게 되는 인간의 운명과 흡사하다고 생각해서 이번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영화 ‘졸업반’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 인물들의 행태를 조명함으로써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먼저 신주희를 살펴보자. 학교에서 그녀는 그림 잘 그리는 모범생이다. 게다가 얼굴도 예쁘고 명품백도 들고 다녀서 후배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학교 밖에서 그녀는 유학비 마련을 위해 텐프로 술집에서 일한다. 유학이라는 탈출구를 찾은 그녀는 목표를 위해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으로 텐프로 일을 선택한 것이다. 극 중에서 그녀는 미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냥 무턱대고 가려고 하지 말고 출발점의 막힌 곳부터 검은색으로 칠해 나가는 거야. 결국 남는 건 입구에서 출구로 향하는 길만 하얗게 남아. 이게 목표를 위해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이야.”



그녀는 최단 경로를 선택한다. 그 길을 가는 것이 비윤리적이고 위험하더라도. 텐프로에서 일하는 것을 들켰을 때, 그 벽 앞에서 그녀는 역시 최단 경로를 선택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정우에게는 연인처럼 행동하고, 동화나 교수에겐 몸을 내준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 등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졸업하면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이니까. 미로에서 검게 칠한 부분은 탈출 이후에는 어차피 필요 없어지는 것이니까.


정우는 이런 주희와 달리 미로 속을 힘들게 헤매는 인물이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서 주변 사람에게 끌려 다닌다. 절친인 동화를 위해 돈을 꿔 주고, 아르바이트도 대신해 주며, 자신의 자취방까지 내준다. 자신이 가고 싶은 길도 있는데, 그 행적은 남들 모르게 웹툰으로나 그리고 있다. 그렇게 자아와 현실 세계 사이를 방황하면서 그는 미로 속에 갇혀 있다. 그 방황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그는 졸업 작품인 자화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 정우 앞에 주희의 비밀이라는 벽이 우뚝 선다. 벽 앞에서 정우는 주희의 비밀을 지키기 위한 길을 선택한다. 아주 조심스럽게 느린 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미로 속을 걸으면서도 그는 기뻤다. 주희와 함께 걷고 있으니까.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면서부터 정우의 방황은 더욱 깊어진다. 자신은 주희가 선택한 경로를 가는 도중에 지나치는 경유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우. 정우는 자신의 미로 속에서 다른 사람의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던 것이다. 그런 현실을 정우는 자신이 주희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한다. 비록 그로 인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지만, 주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그 또한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진심이 모두 담긴 웹툰을 주희가 보았다는 사실, 즉 주희가 자신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우는 마지막에 알게 된다. 자신의 진심을 알면서도 주희가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내주고, 자신을 이용했다는 진실의 벽에 정우는 마주친다. 그때 정우는 미로 앞에 서서 주희처럼 막힌 부분을 까맣게 칠한다. 그렇게 한 부분으로 시작해서 점점 더 검은 부분이 많아지는 것이 인생이겠지? 화면 속의 검은색은 미로 속 방황을 통해 얻은 성숙의 결과처럼 무거웠다. 또 순수한 청년이 효율적인 사회인으로 변해 가는 첫걸음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마지막으로 동화의 선택을 보자. 동화는 미로 속 갈림길에서 편한 쪽을 선택한다. 이기심을 기준으로 갈 길을 선택하고, 길을 가면서는 온갖 꼼수와 편법을 행한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으며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뚜렷한 목표도 설정되어 있지 않은 혼돈의 상태에서 지금 당장의 길을 편하게 걸으려고 한다. 가다 보면 길이 나올 것이고, 길을 걷다 보면 어딘가에 다다르겠지 하는 막연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동화의 모습은 요즘의 사회 문제를 부각한다. 불투명한 미래와 불공정한 현실 탓에 출구가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 마치 어둠과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1100번 국도에서 살아남기만을 바라던 것처럼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하루하루 버티는 데 온 힘을 쏟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극 중에서 쓰레기 같은 행동을 하는 동화는 그래서 애처롭게 보인다.



‘졸업반’ 속에는 이처럼 다양한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미로 속에서 다양한 선택과 방황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들을 위해 점백이 교수는 무엇을 했나? 지도 교수인 그는 동화가 꼼수로 그려 온 ‘혼돈’이라는 졸업 작품을 보고, ‘카오스 Part. 1’이라는 이름을 붙이라고 조언한다. 미로 속에서 담을 넘거나 개구멍을 통해 다음 경로로 진입하려는 제자의 꼼수를 교수의 권위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텐프로에 다니는 주희의 비밀을 알고서 그는 제적을 운운하며 주희의 몸을 취한다. 미로 속에서 최단 경로를 선택하느라 잘못된 길로 들어선 제자의 약점을 권위로 짓누르며 자신의 욕망을 채운 것이다.


주희와 정우가 미로에 칠하는 검은 부분에는 점백이 교수의 허위와 부도덕함도 포함될 것이다. 제자들이 미로 속에서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할 지도 교수가 오히려 거대한 장벽이 되어 버리는 설정이 ‘졸업반’의 문제의식을 더욱 날카롭게 드러낸다.


영화를 보고 나니 최단 경로로 가는 것이 최선일까 하는 의심은 더욱 커졌다. 조금 느려도 안전하고, 내 마음이 편한 길을 찾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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