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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an 27. 2017

아홉살 인생

추억으로 우려 낸 인생의 맛

이젠 지나간 것을 그리워할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인사동에서 누군가와의 술자리 끝이면 어김없이 그 어릴 적의 “불량식품”을 파는 리어카 앞에 서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중년에게 추억이란, 대안 없는 그리움인 동시에 현실의 비참함을 극복할 마지막 담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어렵고도 복잡한 정의로 지난 어린 시절은 제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저는 그 추억과 진실하게 만났고, 그로 인해 눈물 몇 방울도 찍었습니다. 윤인호 감독의 '아홉살 인생'을 보고서야 말이죠. 어떻게 보면 80년대를 풍미했던 '베스트극장'스러운 동화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자극적인 소재로 관객들의 말초 신경과 지갑을 쥐어짜는 영화들이 난무하는 요즘에는 참으로 고맙고 사랑스러운 영화였습니다. 


프로듀서 중심의 기획영화 1세대로 불리는 황기성 씨가 기획한 영화인 만큼 아마도 저는 그의 기획 하에 철저하게 “놀아난” 것 같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두 가지 소재 때문이겠죠. '유년기'와 '첫사랑'. 아직까지도 소설 '소나기'의 감동을 아련하게 시린 '무맛'으로 간직하고 있는 저에게 그보다 더 매력적인 소재는 없었습니다. 


이런 제 사정을 아는지, 영화에서는 순수한 아이의 사랑과 집착으로 치닫는 어른의 사랑을 교차시키며 현실계에 속해 있는 저의 양심을 눈물짓게 하더군요. 참 짓궂습니다. 그것뿐인가요? 이 영화는 그 어려운 시절, 경제적인 이유로 한쪽 눈을 실명한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순수한 사랑의 이별이 낳는 아쉬움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감동으로 승화시키는 영민함까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유년기를 지나 현실계로 접어든 이들 중에 첫사랑과 부모의 은혜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도 안타깝고, 아쉽고, 슬펐고, 눈물 흘렸던 겁니다. 



이 영화에는 지나고 나서야 타인의 의도를 알게 되는 아이 적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섬세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라도 공감하지 못하는 어른이 있다면, 저는 그 말을 못 믿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그래서 유년기가 그리울지 모르겠네요. 진실하지만, 그 진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해 우스꽝스럽고 안타까운 어린 시절. 이제는 말 한마디로 상대방을 쉽게 속여 넘기는 '기술자'가 되어 버린 우리에게 더더욱 손에 닿지 않는 시절이기에 그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가수 조영남 씨가 황기성 씨에게 이 영화를 보고, "관객이 2000만 들지 않으면 이민 간다"라고 전화로 농담을 했답니다. 2000만도 너무했지만, 이 영화가 극장에서 걸려 있던 기간도 너무했습니다. 그 아름답던 유년기를 오래도록 지키지 못한 우리가, 그 죄책감과 아쉬움으로 더 길게 지켜야 했을 영화였는데 말이죠. 뭐, 그래도 어떻습니까? 우리에겐 최대의 면죄부가 있지 않습니까? 


“먹고살기 바쁜데……” 


하지만 말이죠, 이 한 마디가 우리를 얼마나 바꾸어 놓았는지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홉살 인생'의 주인공 여민이가 사는 모습에 비추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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