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슬로운

통찰력의 힘

나는 고스톱을 못 친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승률이 괜찮았다. 그때는 모두가 그림 맞추기를 하던 상황이라 체력과 집중력이 있으면 10원이라도 더 딸 수 있었다. 사회에 나와서 확실히 알았다. 고스톱에는 소질이 없다는 것을. 직장 선배의 집들이에서 한판 어울렸다가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 모두가 내 패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깔려 있는 패까지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내가 먹을 것을 앞에서 다 잘라 가고, 남들이 던진 것을 먹으면 번번이 설사를 했다. 고스톱을 잘 치려면 전체 판을 읽고 점수에 대한 전략을 잘 세워야 했다. 섣불리 덤벼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푼돈이 오가는 고스톱 판에도 통찰력이 필요하다. 통찰력은 사물이나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고 ‘꿰뚫어 보는 능력’이다. 존 매든 감독의 ‘미스 슬로운(Miss Slone)’은 통찰력의 힘과 방향성을 이야기한다. 여주인공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 분)’은 로비스트다. 그녀는 특수한 이익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직·간접적으로 일정한 대상의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한다. 슬로운의 클로즈 숏으로 시작되는 오프닝에서 그녀는 힘주어 말한다. ‘로비스트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몇 수 앞을 예상해 적을 놀라게 하고 나는 적의 공격에 놀라지 않아야 한다.’라고. 

    

본편의 이야기는 로비스트 슬로운의 철학을 확인시켜 준다. 확신에 찬 목소리만큼 그녀는 확실한 승리자였다. 그녀는 큰 맥락의 흐름 속에서 주변의 지형지물을 적재적소에 이용할 줄 알았다. 탁월한 통찰력과 과감한 실행으로 이기는 싸움을 했다. 그렇게 얻은 명성 덕에 아주 큰 건의 의뢰를 받는다. 거물급 의원이 총기 규제 법안 관련 반대 로비를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승리에 중독된 속물로만 보이던 그녀는 예상 밖의 선택을 한다. 신념을 내세우며 법안 찬성의 편에 선다. 모든 것이 열세인 편의 선두에 서서 그녀는 통찰력의 힘을 보여 준다. 늘 상대보다 앞서 수 계산을 하면서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일격을 가한다. 

    

슬로운의 공격에 상대편이 응수하면서 상승과 하강의 플롯은 긴장감을 유발한다. 여기에 슬로운이 승리할수록 도덕적인 가치는 떨어지는 상승과 하강의 플롯이 겹쳐지면서 이야기의 흐름은 롤러코스터처럼 박진감 넘치게 진행된다. 그래서 13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관객들은 슬로운이 쥐고 있는 패가 하나씩 펼쳐질 때마다 통찰력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슬로운의 통찰력은 신념에 의해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움직인다.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는 통찰력을 좇는 재미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 통찰력의 힘은 엄청나다. 눈여겨볼 것은 이러한 통찰력이 무엇에 기여하는가이다. 자신의 승리만을 목표로 한다면, 통찰력은 주변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악마의 힘이 된다. 하지만 건전한 신념을 목표로 한다면, 통찰력은 자신까지 희생시킬 수 있는 숭고한 힘이 된다. 제시카 차스테인은 통찰력이 지닌 양날의 검이 얼마나 예리한 것인지를 연기로 보여 준다. 그녀는 동료에 대한 배려심이 없는 냉혈한이었다가 스스로를 제물로 던지는 의인의 모습을 보인다. 독선적이면서도 고독한 여인. 급변하는 상황에 따라 복잡하게 펼쳐지는 인물의 성격을 차스테인은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극단적 양상을 보이는 심리의 진폭 차이가 굉장히 큰 데도 부자연스러운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치의 속살과 현실의 부조리를 들여다보는 우리 영화들은 주로 캐릭터 강한 남성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약육강식의 논리와 조폭의 폭력성을 바탕으로 세태의 문제를 다뤘다. 이러한 전형적인 공식에 익숙한 눈으로 볼 때, ‘미스 슬로운’은 참신하다. 여성 주인공이 전면에 나서서 치열한 논리 공방으로 극을 이끌어 간다. 몸싸움과 칼부림이 없어도 긴장감이 넘친다.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따른 승리에서는 쾌감도 느낄 수 있다. 또한,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는 입체적인 안목도 기를 수 있다. 총기 규제 법안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부각함으로써 한 가지 이슈에 대한 프레임 전쟁이 진행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념에 따라 진실이 가공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