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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n 17. 2017

악녀

새로움과 진부함 사이의 유격

1인칭 시점의 액션 장면이 궁금했다. 액션 영화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정병길 감독의 작품이라 더 그랬다. 이런 기대에 화답하듯 1인칭 시점의 액션 장면은 <악녀>의 오프닝 시퀀스에 포진되었다. 캐릭터의 시점을 빌려서 화면을 들여다보니 불안감과 긴장감이 증폭됐다. 시점에 따라 시야각이 축소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주변의 정보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칼과 총알이 날아들지 몰라서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적들이 뿜어내는 피가 내 몸에 튀기라도 하는 듯 실감이 났다. 1인칭 시점의 액션 장면은 기대한 만큼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그런데 시퀀스가 지속되면서 점점 갑갑해졌다. 주인공이 어느 정도 데미지를 입었을지 궁금했다. 또 액션의 선이 보이지 않아서 동적이고 입체적인 액션의 묘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복도를 배경으로 한 <올드보이>의 장도리 신은 그 선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주인공과 주변 인물이 주고받는 액션의 합을 좀 더 보여 줬다면, 김옥빈의 열연이 더 빛이 나지 않았을까 싶다.

      

게임의 경우, 1인칭 시점은 플레이어가 캐릭터의 시점을 빌려 플레이하기 때문에 제한된 시야가 게임의 재미를 극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경우에는 액션이 이루어지는 전체적인 장면이 주는 재미가 크기 때문에 1인칭 시점의 한계가 느껴졌다. 1인칭 시점의 화면으로 90분의 러닝 타임을 채운 <하드코어 헨리>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악녀>는 <하드코어 헨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한 것 같다. 1인칭 시점의 화면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쯤 시점의 변화를 준다. 적의 일격에 주인공이 거울에 부딪히는 장면에서 3인칭 시점으로 전환한다. 시야가 넓어지면서 시쳇말로 ‘날아다니는’ 숙희(김옥빈 분)의 액션이 물 흐르듯 펼쳐진다. 유려한 액션의 선이 절정의 순간에 다다르는 순간, 박살 나는 유리창에서 확장과 폭발의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경주마가 눈가리개를 풀고 달릴 때 이런 쾌감을 느끼지 않을까?

     

<악녀>가 <하드코어 헨리>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 노력은 스토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름 반전도 있고, 감정선도 자극하고 있다. 문제는 그 스토리 라인이 너무 진부하다는 데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90년대 하이텔의 ‘영퀴방’에서 퀴즈를 푸는 것처럼 온갖 영화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설정은 어디서 본 건데, 무슨 영화였더라.’, ‘저 장면은 ○○의 영향을 받은 거 같은데.’ 차라리 스토리를 더 단순화해서 완성도를 높이고 복수에 대한 에너지를 액션으로 폭발시키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아버지-연인-자식’에 대한 사랑과 상실이 한 여자를 악녀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심도 있게 다루는 것은 두 번째 토끼인 듯싶다. <악녀>의 관객들 중에는 액션이라는 첫 번째 토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사람들이 많았을 테니까.

     

오토바이를 탄 채 단도와 장도를 활용하는 액션 시퀀스만 봐도 <악녀>는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속도감 위에 펼쳐지는 스턴트는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오토바이의 질주와 쓰러져 튕겨지는 추격자의 충격, 칼날을 주고받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담아낸 촬영 기술이 놀라웠다. 엔딩부의 마을버스 추격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자동차 보닛에 앉아 핸들을 조정하며 마을버스를 뒤쫓는 숙희의 모습. 숙희의 집요함과 복수심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쫓아가서 마을버스 후미에 도끼로 매달리는 장면은 흐름도 좋았고 아이디어도 빛났다.

 

 

액션을 기대했던 나에게 <악녀>는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액션 장면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빼어난 만듦새가 좋았다. 정병길 감독의 다음 작품에서는 액션의 새로움과 스토리의 진부함 사이 유격이 좀 더 줄어들길 기대해 본다. 부디 장기인 액션의 비중이 좀 더 늘어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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