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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n 05. 2017

원더 우먼(Wonder Woman)

관계 지향적인 히어로의 탄생

히어로 물을 보고 나면, 드는 생각. ‘인간은 그저 구원의 대상일 뿐인가?’ 히어로의 활약이 대단할수록 인간의 존재감은 미약하기만 하다. 인류의 위기 앞에서 고뇌하는 것도, 탁월한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모두 히어로의 몫이다. 성경을 읽듯, 신화를 대하듯 우리는 히어로의 활약에 감탄하는 방청객 수준에 머물게 된다.

     

<원더 우먼>은 이 지점에서 색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신에게 초월적인 능력을 부여받은 원더 우먼(갤 가돗 분)은 이전의 히어로들처럼 문제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는다. 그녀는 보통의 인간들과 어울려 적과 싸우고 문제를 해결한다. 그녀의 미션은 인류의 적을 대신 싸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사랑을 심어 줘서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던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사랑과 희생이라는 고귀한 정신으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다.

     

이와 같은 <원더 우먼>의 차이점은 목적 지향적인 남성과 관계 지향적인 여성의 대비를 드러내는 것 같아 흥미롭다. 목적을 지향하는 남성에게는 목적의 달성 여부가 가장 큰 관심사이다. 이전의 남성 히어로들을 보라. 온 집안의 짐들을 혼자 짊어진 아버지처럼 외로운 싸움을 펼친다.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적들에게 노출된 약점 때문에 고생하며, 보호해야 할 주변 사람들을 챙기느라 위기에 빠진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승리를 쟁취할 때, 히어로는 저 높은 곳의 존경할 만한 대상이 된다.

     

이에 비해 여성은 목적의 달성 여부보다는 목적 지점까지 가는 동안의 심리적 유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원더 우먼은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 분) 일행과 상호작용하면서 인간들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다. 어머니가 자식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자식들에게 사랑과 헌신의 의미를 가르치는 것처럼. 목적 달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총을 쏘지 못하는 찰리(이완 브렘너 분)는 소용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원더 우먼은 그런 찰리를 ‘노래’라는 매개를 통해 관계 속에 포용한다. 포용의 관계 속에서 심리적 유대가 형성되고, 유대감은 사랑으로 확장되어 희생의 기적을 낳는다.

    


<원더 우먼>은 주인공의 전지전능한 능력 탓에 영화화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적들과의 싸움이 너무 싱거워져서 긴장감을 조성하고 볼거리를 만드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그러한 제약을 인류와의 앙상블로 극복하고 있다. “나는 오늘을 지킬게요. 당신은 세상을 지켜요.”라는 트레버의 한 마디는 앙상블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만큼 주체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리고 원더 우먼은 전쟁의 신이 벌이는 횡포를 막으며 인간들의 본성을 회복시키는 새로운 히어로의 역할을 제시한다. 히어로와 인간의 상호작용이 빚어내는 결과는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며 드라마의 재미를 선사한다. 이와 같은 포지션을 유지한다면 <원더 우먼>은 독특한 성격의 히어로 물로서 시리즈를 이어갈 것이다.

     

원더 우먼이 인간 세상과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 관계 속에서 그녀가 자신의 역할을 깨닫는 과정, 그녀의 영향력이 인간들에게 미치는 과정 등은 지루할 수도 있지만, 관계 중심의 관점에서 볼 때는 필요한 요소이다. 화려한 액션과 속도감 있는 전개를 기대한 관객들은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원더 우먼의 정체성을 시리즈의 서두에서 밝혀 둔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부분이다. 여성 전사들의 우아한 액션을 현란한 테크닉으로 그려 낸 영상미가 그 정도의 아쉬움은 상쇄해 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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