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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물병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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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n 20. 2017

분노의 끝

그날, 저녁을 먹고 온 가족이 산책을 나섰습니다. 소화도 시키고 바람도 쐬려고요. 아이들은 신 나서 앞서 가고, 걱정이 된 엄마는 종종걸음으로 뒤쫓고 있네요. 저는 갑자기 걸려 온 전화를 받느라 좀 뒤처져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맞은편에서 자전거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습니다. 순간 놀라서 ‘어, 어’ 하고 자리에 얼어붙을 정도로. 자전거는 아이들 코앞에서 가까스로 급정거했습니다. 놀란 아이들 생각에 전화를 끊고 달려가는데, 자전거를 탄 아주머니가 침을 뱉고 욕을 하더군요.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에게 가서 따졌습니다.

     

“아주머니,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뭐가요?”

“골목에서 그렇게 빨리 달리시면 위험하잖아요.”

“애들 안 다쳤잖아요.”

“안 다쳤지만, 애들이 놀랐잖아요. 그리고 지금 아이들 앞에다 침 뱉고 욕하신 거예요?”

“물 뱉은 건데요? 혼잣말한 거고.”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아내가 팔을 잡아끕니다. 그만 하라고. 하지만 전 멈추지 않았어요. 아주머니의 뻔뻔함에 더 화가 났고, 놀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싸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속의 분노를 억누르지 않았죠. 나오는 대로 소리치고,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고 시비를 걸었어요. 브레이크가 없는 저의 분노는 폭주했습니다.

      

약이 바짝 오른 아주머니는 자전거를 번쩍 들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이성을 완전히 잃고 몸싸움으로 접어들 기세였지요.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듭니다. 판이 커져 버렸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인 데다 아주머니와 몸싸움을 벌일 수도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보다 못 한 아내가 나섭니다. 결국 싸움은 아내가 마무리했습니다. 싸움판에 놀라 버린 아이들은 엉엉 울고요. 이제는 저보다 더 화가 나 버린 아내와 잔뜩 겁을 먹은 아이들을 보니 참담했습니다.

     

저는 뭘 바라고 싸움을 시작한 걸까요? 상대방의 진심 어린 사과? 무례한 자에 대한 응징? 놀란 아이들에 대한 보상? 경범죄에 대한 처벌? 애초에 쉽게 사과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사과를 받았어도 마음이 썩 개운하지는 않았을 거 같네요. 그러므로 패스. 저에게 무례한 자를 응징할 자격이 없고 그럴 능력도 없으므로 역시 패스. 보상이나 처벌은 결국 법적으로 따져 볼 문제인데, 사안 자체가 그 정도로 심각하지 않으므로 패스. 아, 도대체 저는 뭘 바라고 싸움을 한 걸까요?

     

제가 내린 결론은 ‘분노’였습니다. 상대방이 저와 저희 가족을 무시했다는 기분이 든 거죠. 그래서 화풀이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건 구실에 불과했죠. 결국 아이들은 저의 치기 덕에 울음보를 터뜨렸으니까요. 싸움을 통해 제가 얻을 것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싸움의 결과로 얻은 것은 있었죠. 오랜만의 산책을 망쳐 버린 온 가족의 스트레스.

     

그날의 사건 이후, 저는 달라졌습니다. 갈등의 상황에 부딪힐 때, 화를 내고 싸움을 해서 얻을 것이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싸움을 통해 얻으려는 것이 뚜렷하고 그것이 정당한지를 따져 봅니다. 부조리에 항의하거나 부당함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한 기분을 풀기 위해 싸우려 했다면, ‘됐다, 그냥 넘기자.’ 하며 스스로 분을 삭이고 말죠. 명분 없는 싸움을 했다가 더 크게 마음을 상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몇 번 해 보니 확실히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화났던 일, 짜증 났던 일을 빨리 잊게 되더군요. 그 순간만 꾹 참고 지나가면, 거짓말처럼 생각도 안 나더라고요. 만약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였더라면 아마 한동안 그 여파에 시달렸을 겁니다. ‘참는 게 이기는 거다.’라는 어른들 말씀. 틀림이 없습니다. 당신은 어떠신가요? 혹시라도 화나는 일이 생기신다면, 저의 이야기를 떠올려 주세요. 그래서 부디 저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분노의 끝. 무척 고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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