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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n 26. 2017

시간은 기억을 지울 수 없다

이별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고. 이 말에 공감하시나요? 전 그 말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불쑥 기억이란 녀석이 고개를 드니까요. 심지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새롭게 떠오르는 기억들도 생기네요. 기억 속 장면들의 해상도가 더 높아지기도 하고요. 안 보면 멀어진다는 말도 있는데, 제 곁에 없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왜 지우지 못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자신에게 있는 듯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나’를 사랑한 나에게.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피곤한 줄 모르고 밤거리를 쏘다니고, 사소한 일들에 배가 아프도록 웃음을 터뜨리고, 세상 모든 일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수다를 떨던 나. 우리는 그런 나를 사랑합니다. 그 사람은 없지만, 나를 버릴 수 없으니 그때의 기억이 계속 날 수밖에요. 그래서 저는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습니다.

     

필름 사진 뽑아 보셨죠? 사진을 찍으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음화(陰畫)가 필름에 남습니다. 이 음화에 빛을 통과시켜 인화지에 상을 맺히게 한 뒤 인화액에 넣으면 양화(陽畵)라고 하는 사진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이런 과정과 비슷합니다. 마음속에 음화로 남아 있던 기억들이 선명한 양화로 인화(印畫)되는 것이죠. 한 통의 필름을 형광등에 비춰 보고 그중에서 특별히 잘 나온 것만 색연필로 표시해 가며 사진을 뽑듯이 우리는 특별히 인상적인 장면들을 선별하여 머릿속에 떠올려 봅니다. 그 순간 행복했던 감정의 빛에 음화를 노출시키고, 그 순간을 상실한 아픔의 눈물을 인화액으로 적시면서.

 

    

결국 이전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은 나입니다. 이별한 우리는 스스로를 암실(暗室)에 가두어 두고,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나’의 장면들을 한 장씩 뽑아냅니다. 그 사람은 이미 나를 떠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어도 멈추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는 상관없이 나는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나’로 돌아가고 싶으니까요. 그 욕망이 클수록 기억의 힘은 강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이별한 사람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고. 그러니 기억과 싸우지 말고 당신을 바꿔 보라고.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건 기억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여서 행복했던 당신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싶은 당신의 철 지난 욕심이라고. 기념사진을 들여다보듯 추억을 지나간 한때로 받아들이라고.

     

아무리 끔찍하고 기분이 나쁘더라도
볼 것은 기어코 보아야 한다는 생각,
거기서 외면을 하고 자리를 비켜선다고
어떤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될 수는 없다는 생각,
마지막을 보아야 한다는 생각,

- 이청준,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중에서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는 근거로 기억을 회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기억이 떠오르면 마주하고 ‘그땐 행복했었지.’ 하고 넘겨야겠습니다. 앞으로 만나게 될 새로운 행복을 기대하면서. 그럴 자신이 없다면 기억을 눈물 속에 담가 두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감정의 빛은 지금 제 곁에 있는 것들에 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별한 사람과 함께였던 때로 되돌아가고 싶은 미련에 울지 않으면, 이별한 사람과 함께였던 나보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인 내가 더 행복하다면 기억은 쉽게 떠오르지 않을 테니까요. 노출과 인화액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인화되지 않는 사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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