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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물병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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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l 01. 2017

내겐 너무 부담스러운 흰옷

“아이, 안 지워졌네...”

아내가 한숨을 쉽니다. 세탁기에서 꺼낸 반바지를 들고서. 아들이 새로 산 흰색 반바지를 입고 학교 흙바닥에서 돼지씨름을 했다는군요. 세 번이나 빨았다는데 얼룩이 남아 있습니다. 속상할 만하네요.

      

아내를 위로하려는 말이 불쑥 나왔습니다.

“애들이 뭐 그렇지. 아이답고 좋네.”

새 바지여서 더 마음이 쓰린 아내가 한 마디 쏘아붙입니다.

“이런 건 아빠를 닮았으면 얼마나 좋아.”

분명 뼈 있는 말입니다. 제 옷장 속에는 사놓고 입지 않은 흰 바지들이 많거든요. 흰 바지에 때가 묻을까 봐 선뜻 입고 나서지 못하는 저입니다.

     

옷 가게의 환한 조명을 받은 흰옷은 어찌 그리 예쁜지요. 다른 옷들에 맞춰 입기도 편하잖아요. 그래서일까요? 집에 와서 쇼핑백을 풀어 보면 흰옷이 꼭 들어 있습니다. 흰옷을 살 때까지는 참 기쁘고 만족스럽습니다. 문제는 마음껏 입지 못한다는 데 있죠. 그래도 흰 티는 잘 입고 나섭니다. 밥을 먹을 때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제약이 있긴 하죠. 앞치마는 필수예요. 좀 비싼 옷을 입기라도 한 날에는 그 좋아하는 짬뽕 대신 우동을 먹기도 한답니다. 옷은 새하얀데, 제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가네요.

     

흰 바지의 경우에는 더 신경이 쓰입니다. 하루는 ‘오늘은 무조건 흰 바지다.’ 하고 잘 차려입었다가 비 소식에 옷을 갈아입기도 했어요. 그 바쁜 출근시간에. 큰마음먹고 흰 바지를 입은 날에는 앉을자리를 노려보느라 피곤합니다. 혹시라도 의자에서 뭐가 묻을까 봐. 종일 서 있을 수는 없으니 참 많이 신경을 써야 하죠. 고생스러운 일입니다. 바지의 경우에는 제가 주의하더라도 상할 수 있는 상황이 너무 많더라고요. -제일 황당했던 기억은 옆 사람이 찌개를 떠먹다가 제 바지에 국물을 튀긴 일이었죠. 정말 불가항력의 사고였습니다.- 그래서 제 옷장 속에는 사놓고 입지 않은 흰 바지들이 늘어 갑니다.

     

어릴 때의 저도 아들처럼 새 옷이건 흰옷이건 아랑곳하지 않았었죠. 나이를 먹으면서 세탁에 대한 부담과 얼룩으로 옷을 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를 갖게 됐나 봅니다. 그러면서 때 묻고 상할까 봐 입어 보지 못하는 옷만큼이나 시도하지 못하는 일과 다가서지 못하는 관계도 늘어나 버렸고요. 새로운 일을 벌이기 전에 일이 잘못되는 경우를 걱정했습니다. 한 사람에게 마음을 주기 전에 그 사람에게 상처를 받게 될 경우를 두려워했습니다. 옷장에 가둬진 채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흰옷처럼 저도 저의 불안의 울타리 속에 갇혀 버린 듯하네요.

     

아내에겐 비밀입니다. 저는 아들을 닮고 싶네요. 흰 바지를 입고 흙바닥에서 뒹구는 아들. 놀이터에서 처음 본 아이에게 불쑥 악수를 청하는 아들. 자기 전에 다 뜯어서 정리함에 넣어야 하는 레고를 몇 시간씩 쌓아 올리는 아들.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행동하고 현재를 즐기는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마음이 과거에 있으면 후회하고, 미래에 있으면 불안해한다죠? 마음을 현재에 두고 행복을 찾아야겠습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고요. 내일은 흰 바지를 꺼내 입어야겠습니다. 흰색 스니커즈도 함께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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