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물병편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재우 Jul 23. 2017

낮술 한잔을 권하다

낮술은 못 마시겠더라고요. 술을 참 즐기는 저인데도. 얼굴이 빨개지는 게 문제예요. 누가 봐도 ‘저 술 마셨어요.’ 하는 표가 날 정도이죠. 그래서 삼계탕에 딸려 나오는 인삼주 한잔도 손사래로 거절합니다. 사무실로 복귀해서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느니 아예 잔을 받지 않는 것이 나아서지요. 술의 유혹, 공짜의 호의에도 아주 단호합니다. 나이를 먹고 조직의 리더가 되면서부터였을 거예요. 낮술 한잔을 못 마시게 된 것은.

     

대학 신입생 시절의 어느 아침. 아주 이른 시간부터 낮술을 마셨습니다. 1교시 영어 시간을 앞둔 강의실 창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땅에 고인 빗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자니 술 생각이 나더군요. 쓸데없이 아침부터. 동기 몇몇과 눈을 마주치고, 강의실 밖으로 나섰습니다. 눈빛에 호응한 몇몇과 함께.

     

강의를 들어야 할 시간에 술잔을 들고 있는 죄를 함께 지어서일까요? 몇 잔 마시지 않았어도 그날따라 우리의 마음은 잘 통했습니다. 그리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속에 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했던 대학생활과 현실이 달라 고민이라는 이야기, 집안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 마련하는 일이 걱정이라는 이야기, 취업을 생각하니 전공에 비전이 없어 다시 입시를 준비해야겠다는 이야기, 사귀던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 같다는 이야기. 평소 같았으면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비교적 맑은 정신으로 진지하게 나누고 있었습니다. 뭐에 홀린 것처럼. 우리는.

     

밤에 술을 마셨다면 얼큰히 취한 상태에서 나올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의 고민들은 온갖 충고의 매질을 당한 후에 “위하여”라는 힘찬 구호 앞에 맥없이 퇴장하는 것이 보통이었죠. 날이 환해서였을까요? 그날은 달랐습니다. 친구의 얘기를 귀담아듣고 진심으로 제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뿌듯하고 시원했습니다. 수업은 모두 자체 휴강해 버렸지만,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기분이었습니다. 교재 안의 지식이 아니라 세상 속의 인생을 배웠으니까요. 낮술 한잔에 훌쩍 어른이 된 것 같았습니다.

          

  낮술에는 밤술에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거나, 뭐 그런 것. 그 금기를 깨트리고 낮술 몇 잔 마시고 나면 눈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햇살이 황홀해진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아담과 이브의 눈이 밝아졌듯 낮술 몇 잔에 세상은 환해진다.

  우리의 삶은 항상 금지선 앞에서 멈칫거리고 때로는 그 선을 넘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것.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라. 그 선이 오늘 나의 후회와 바꿀 만큼 그리 대단한 것이었는지.

  낮술에는 바로 그 선을 넘는 짜릿함이 있어 첫 잔을 입에 대는 순간, 입술에서부터 ‘싸아’ 하니 온몸으로 흩어져 간다. 안전선이라는 허명에 속아 의미 없는 금지선 앞에 서서 망설이고 주춤거리는 그대에게 오늘 낮술 한잔을 권하노니, 그대여 두려워 마라. 낮술 한잔에 세상은 환해지고 우리의 허물어진 기억들, 그 머언 옛날의 황홀한 사랑까지 다시 찾아오나니.

-박상천, <낮술 한잔을 권하다>

          

요즘은 낮술은커녕 밤술 마시기도 쉽지 않습니다. 일상의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규범의 옷소매를 걷어 올린 채 만날 상대가 많지 않거든요. 마음속 이야기를 잘못 털어놨다가는 사람들의 뒷말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남의 얘기에 함부로 조언했다가는 꼰대 소리 듣기 십상이죠.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웃으면서, ‘적당히’ 이야기하는 자리가 많습니다. 안전선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그래서 저는 낮술은 못 마시겠더라고요. 술을 참 즐기는 저인데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게 문제예요. 그렇게 발동이 걸리면 아마 안전선 밖으로 질주하는 욕망의 열차에 올라탈 겁니다. 추억의 다리를 건너 노을 같은 친구들의 웃음이 번지는 그날, 낮술 한잔을 기울이던 캠퍼스 잔디밭으로 향하는.


매거진의 이전글 내겐 너무 부담스러운 흰옷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