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재우 Jul 04. 2017

옥자(okja)

소녀, 세상을 만나다

스포일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산골마을의 어린 소녀. 그리고 동물. 영화 속에 이런 캐릭터가 등장할 때, 우리는 인간과 동물의 순수한 우정과 그 관계를 통한 소녀의 성장을 예상한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도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 내용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현실 세계의 세세한 일면들을 보여 주고, 그 현실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욕망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점에서 탁월한 감독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인들은 오르기도 힘든 강원도 산골마을. 현실 세계와는 단절된 그곳에 미자(안서현 분)가 산다. 옥자, 할아버지와 함께. 옥자와의 관계가 세계의 전부인 미자는 그 상태만으로 완벽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상상계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그녀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환상의 이미지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10년 전 글로벌 기업 ‘미란도’가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슈퍼 돼지 옥자를 전 세계 26개 농가에 보내진 진짜 생명체로 믿고 있는 것이다. 10년이라는 프로젝트 기간이 끝나고 옥자를 자신들의 소유로 곁에 둘 수 있다는 충족감에 행복해질 무렵 미란도는 옥자를 데려간다.


     

처음부터 돈으로 살 수 없었던 것이라는 할아버지(변희봉 분)의 말처럼 미자의 욕망 실현은 지연되고 만다. 이처럼 미자의 욕망이 억압받으리라는 암시는 미자가 지름길로 가려다가 비탈에서 미끄러지는 장면에서 제시된다. 좀 더 집에 빨리 가려는 욕망을 드러낸 미자는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위험에 처하게 된다. 결국 미자와 연결된 줄을 물고 추락한 옥자 덕에 다시 세상 위로 올라서는 미자. 이 장면에서 추락하는 옥자는 상징계로 들어서면서 억압될 수밖에 없는 미자의 욕망을 상징한다. 그리고 미자가 땅 위로 오르는 행위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서면서 미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단편적으로 드러낸다.

     

산골 소녀 미자가 욕망하는 대상이었던 옥자. 옥자를 가족으로 두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오인(誤認)에서 기인한 ‘찾아 헤맴’의 모티프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서사 구조이다. 욕망을 충족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 다시 환상을 욕망하게 되고, 그러한 행위를 반복하면서 삶을 유지하는 우리들. 봉준호 감독은 ‘찾기’와 ‘오인’의 모티프를 통해 욕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산골마을이 순진무구한 소녀의 상상계를 상징하는 공간이라면, 서울은 언어의 질서가 욕망을 통제하는 상징계를 의미한다. 미자가 미란도 서울 지사로 들어가 유리문을 깨부수는 장면은 미자가 거울 단계를 통과하고 있음을 선명한 이미지로 제시한다. 미자는 거울면에 비친 이미지들을 진실로 받아들이던 단계를 거쳐서 언어를 통한 금지와 통제를 만나기 시작한다. 옥자를 구하기 위한 여정에서 만나는 인물들이 영어를 사용하여 미자와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상징계의 언어 질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미자의 상황을 보여 준다.


    

동물해방전선(ALF) 일원인 케이(스티븐 연 분)의 잘못된 통역 탓에 미자의 욕망은 또다시 유보된다. 옥자와 함께 산골마을로 돌아가고 싶다는 미자의 욕망은,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실상을 폭로하려는 동물해방전선의 또 다른 욕망 앞에 좌절되고 만다. 미자의 좌절을 통해 상징계에서 언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 타인의 욕망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 사건으로 인한 학습효과였을까? 미자는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 분)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영어 공부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언어의 질서 속에 녹아들어 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듯이.

     

미자가 도착한 미국은 본격적으로 상징계의 실상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언어가 충돌하고 욕망이 생멸(生滅)한다. 루시 미란도는 환상의 언어로 추악한 현실을 포장한다. 그녀는 칠레의 한 농장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된 슈퍼 아기 돼지를 애리조나의 미란도 목장으로 데려가 자연 교미 방식으로 새끼 26마리를 번식시키고, 26개국의 우수한 축산 농민에게 한 마리씩 분양하여 슈퍼 돼지를 길러냈다는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그러한 스토리의 이면에는 비윤리적인 환경에서 오직 이윤 창출만을 목적으로 만들어 낸 유전자 조작 슈퍼 돼지가 있을 뿐이다. 대중들은 현혹되었고, 루시는 욕망을 손에 잡는 듯했다. 하지만 동물해방전선은 더 강력한 언어로 그녀의 욕망을 저지했다. 옥자의 희생을 제물로 얻어낸 ‘몰래카메라’ 영상으로 미란도의 허위와 폭력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낸시(틸다 스윈튼 분). 그녀는 자본의 언어를 구사한다. 동생인 루시의 마케팅 전략을 버리고 정공법을 선택한다. 대중들이 미란도의 실체를 알아 버린 상황에서 슈퍼 돼지를 ‘목살, 등심, 삼겹살’로 양산하는 계획을 실행한다. “가격이 싸면 모두들 먹어.”라는 자본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이처럼 막강한 상대로부터 옥자를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 미자가 선택한 방법은 동질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황금돼지로 옥자의 값을 치른 것이다. 환상의 언어를 사용하던 루시와는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지만, 자본의 언어에 충실한 낸시와는 아주 쉽게 얘기가 통했다.

     

결국 미자는 상징계의 언어 질서에 완벽하게 적응함으로써 옥자를 구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자의 욕망이 모두 충족된 것은 아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수많은 슈퍼 돼지들 중에서 그녀가 구해낸 것은 고작 자신의 옥자와 또 다른 새끼 옥자뿐이었으니까. 또다시 유보되는 미자의 욕망. 미자의 욕망은 완벽하게 실현된 것이 아니라, 상징계 질서와의 타협을 통해 잠정적으로 유보하는 것으로 대체된 것뿐이었다.

     

종결부의 배경은 다시 산골마을이다. 여전히 미자와 옥자는 물장난이 한창이고, 할아버지와 미자의 밥상은 평화롭다. 처음과 달라진 것은 옥자가 입속에 감추어 구해낸 새끼돼지뿐이다. 툇마루 위에 감을 가져다 놓는 새끼돼지의 천진한 모습. 미자와 옥자가 겪은 슈퍼 돼지 살상의 장면과 대비해 보면 어린 돼지의 앞날이 걱정된다. 닭소리에 고개를 돌려 먼 산을 응시하는 미자의 엔딩 장면에서 불안과 공포의 감정은 여운으로 남는다. 이러한 감정은 그 원인이 제거되지 않은 채 맞게 된 종결에서 발생한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해소되지 않는 불안과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 그 대열에 이제 미자도 합류한 듯하다. 산골 소녀 미자가 옥자를 구하는 여정이 유쾌하고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욕망 충족을 위한 싸움을 계속할 테니까. 엔딩 크레디트 이후의 쿠키 영상에서 출소한 제이(폴 다노 분)와 함께 동물해방전선 대원들은 다시 똘똘 뭉쳐서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주주 회의장에 시위를 하러 나선다. 복면을 뒤집어쓰는 대원들의 등을 두드리듯 경쾌하게 흐르는 배경음악은 희망의 박동처럼 들린다. 이처럼 <옥자>에서 봉준호 감독은 비관적인 현실과 아름다운 희망을 동시에 맛보게 한다. 결핍과 충족으로 인한 끊임없는 순환. 그 순환 에너지로 우리의 삶은 지속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박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