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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l 14. 2015

만추(Late Autumn)

다시 세상으로 향하는 애나의 여정

왜 새들은

안 보이는 나라로까지 날아가서 죽을까

그 마음을 아는 나뭇잎들이

땅에 떨어져…… 갈 곳을 몰라 하는

벌레들의 뒷등을 덮어 준다.

-김준태 


김준태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수필에 실린 시입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가을 산의 나뭇잎은 떨어져서도 그냥 썩지를 않고 마지막에 가서도 벌레들의 뒷등을 덮어 주며 따뜻함을 행하고 있다고. 잎새들은 머잖아 다가오는 겨울 눈보라 속에서 벌레 가족들이 얼어 죽지 않도록 자신의 살인 나뭇잎을 떨어뜨려 고운 빛깔로 따뜻하게 덮어 줄 줄 안다고. 작가가 전하는 가을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모든 것이 소멸하는 가운데, 그러한 상황 속이라 더욱 빛나는 따뜻함이 존재하는 시간. 이처럼 가을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충만한 시간입니다.

영화 '만추'에서도 이러한 가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던 이로 인해 남편을 살해하고 그 멍에를 혼자 짊어져야 했던 애나(탕웨이 분)와 사랑을 팔아 돈을 벌면서 누군가에게 쫓기는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훈(현빈 분)이 만나면서 가을 속의 사랑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애나는 오빠의 친구를 어릴 적부터 좋아했습니다. 그 오빠는 이미 남의 사람이 된 애나에게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애나는 그를 택하려 하였습니다. 약속한 날, 그는 나타나지 않고 모든 것을 알아버린 남편에게 매질을 당하던 애나는 그만 남편을 살해하고 맙니다. 그 일로 감옥에 갇히는 애나는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가둡니다. 사랑을 잃은 애나는 세상으로 향한 모든 문을 잠그고 맙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그녀는 장례를 위해 3일간의 특별 휴가를 받게 됩니다. 너무도 오랜만에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유산 문제로 그녀의 서명을 받기 위해 안절부절 못하는 오빠와 너무도 뻔뻔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를 대하는 옛 사랑입니다. 온통 이기적인 사람들뿐입니다. 누구도 진심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습니다. 그녀에겐 너무도 낯설고 쓸쓸한 바깥세상인데 말입니다.

오랜만에 외출을 한 그녀는, 쇼윈도에 진열된 옷을 사 입어 봅니다. 유행하는 옷을 입고 기분을 내고 싶나 봅니다. 하지만 이런 호사도 잠시뿐. 감시관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고 그녀는 자신이 갇혀 있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새로 산 옷들을 화장실에 버려두고 나옵니다.

이처럼 그녀는 갇혀 있는 사람으로서 세상에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버스에서 치근덕대던 훈에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습니다.

  

언젠가 마주칠 거란 생각은 했어

한눈에 그냥 알아보았어

변한 것 같아도 변한 게 없는 너

가끔 서운하니

예전 그 마음 사라졌단 게

예전 뜨겁던 약속 버린 게

무색해진데도 자연스런 일이야

그만 미안해하자

 

다 지난 일인데

누가 누굴 아프게 했건

가끔 속절없이 날 울린

그 노래로 남은 너

잠신 걸 믿었어

잠 못 이뤄 뒤척일 때도

어느덧 내 손을 잡아 준

좋은 사람 생기더라 음 오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이대로 우리는 좋아 보여

후회는 없는 걸

그 웃음을 믿어 봐

믿으며 흘러가

먼 훗날 또다시

이렇게 마주칠 수 있을까

그때도 알아볼 수 있을까

라라라라라라

이대로 좋아 보여

이대로 흘러가

니가 알던 나는

이젠 나도 몰라


-하림,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나에게 가을은 그나마 유일한 사랑이었을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계절입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감옥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녀처럼, 이 가을의 생명들은 이제 곧 다가오는 겨울이 되면 이 세상에서 지워지겠지요. 비겁하고 나약한 옛 사랑을 만난 애나는 그래서 춥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만 생각하며 애나를 혼자 있게 합니다. 그래서 애나는 따뜻함이 그립습니다.

훈은 사랑을 소비합니다. 그에게 진심어린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이란 것은 그에게 밥벌이 수단일 뿐입니다.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는 대신 대가를 받을 뿐입니다. 그런 그에게 애나가 걸려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쫓겨 급하게 버스에 올라탄 훈. 버스비가 모자랍니다. 주위를 둘러봅니다. 애나에게 시선이 꽂힙니다. 아마도 자기 또래의 여성, 동양인, 작업 대상이라는 생각들이 순간 지나쳐 갔겠지요. 쉽게 돈을 빌리게 됩니다. 자신의 시계를 풀어 주며 돈을 꼭 갚겠노라고 약속하며 작업을 겁니다.

웬만하면 넘어올 법도 한데, 이 여자는 차갑기만 합니다. 아니, 추워 보입니다. 점점 그는 애나를 따뜻하게 해주고 싶어집니다. 벌레의 뒷등을 덮어 주는 낙엽처럼 말이지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자신의 운명은 생각지도 못한 채……. 그런데 훈은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진실한 사랑을 깨달아 갑니다. 그녀가 춥지 않게 그녀를 덮어 주는 것인데, 자신이 따뜻해져 가는 것을.

그런 훈이 있어서 애나는 끝까지 뻔뻔하게 자신을 대하는 옛 사랑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늘 소리치고 싶었던 한 마디를 통곡하며 쏟아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손을 댄 것을 사과하라고 그녀는 외쳤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녀의 빈 집은 훈과의 새로운 사랑으로 채워져 갑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

 

가을은 짧은 시간이지만, 세상을 참 다른 모습으로 바꿔 놓습니다. 애나와 훈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사랑을 싹 틔우게 됩니다. 안개가 시야를 가려 운행을 멈춘 버스에서 내려 머물게 된 어느 곳. 훈은 말합니다. 나중에 그녀가 자유의 몸이 되면, 그곳에서 만나자고. 기다리겠다고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결국 그는 자신을 쫓던 이들에게 잡히게 되고, 그는 안개와 같은 운명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녀에게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를 모두 쏟아내듯이 격정적인 키스만을 남겨 둔 채로.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애나는 풀려납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바로 그곳. 훈과 약속했던 그곳의 한 레스토랑에서 그녀는 훈을 기다립니다. 모든 신경을 문 쪽으로 곤두세운 채, 그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세상을 향한 문을 걸어 잠갔던 그녀가 이제는 그를 마중하기 위해 세상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화 <만추>는 세상과 단절된 애나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훈의 사랑이 있었기에 그녀는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지요. 애나와 훈은 자신들이 세상으로부터 소멸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진실하고 절실한 사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라지기 직전에 붉은 울음을 진하게 토해내는 가을 산의 단풍처럼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영화의 결말이 남긴 여운은 가을의 또 다른 의미인 성숙과 새로운 생명을 가리키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엔딩 크레딧이 흐르는 한참 동안 슬픔보다는 희망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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