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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Oct 07. 2017

남한산성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언젠가 직접 토론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토론 수업 교육의 과정 중 하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본격적인 토론을 처음 해 보는 경우가 많았다. 논제에 대한 찬반의 입장을 결정하고 핵심 주장과 그에 대한 근거들을 마련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논박이 시작됐다. 토론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님의 요청에 따라 논박의 강도는 더 높아져갔다. 그렇게 분위기가 뜨거워질 때쯤 상대편의 한 참여자가 화를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그의 주장에 대해 공격하는 것을 자신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듯싶었다. 그의 입에서 가시 돋친 말들이 쏟아졌다. 그러면서 토론장에는 말꼬리 잡기와 인신공격성 발언들이 오고 갔다. 우리의 토론은 그렇게 어설펐다.


토론을 많이 하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TV 시사 토론을 볼 때면,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토론이 맞는지 반문할 정도로 수준 낮은 설전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근거 없는 주장으로 상대방을 비방하고, 상황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바꾸고, 일부를 비약하여 진실을 왜곡하는 말들의 전쟁터. 올바르고 합리적인 결론을 찾고자 하는 취지는 사라지고, 각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언쟁만이 난무한다.


우리 주변의 상황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다. 직장 내에서 나와 뜻이 다르거나 나에게 불리한 주장을 펴는 상대를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 사람의 주장이 회사에 이익을 끼칠 것인가? 미래 비전이 있는 것인가? 등을 고려하기보다는 나의 입지와 이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나? 그 결과 상대방의 위협 수준이 강하다고 판단하면, 주장으로 맞서 논쟁하기보다는 소위 ‘정치’라는 활동으로 상대방을 축출하려 하지 않았나?


영화 <남한산성>의 울림은 이러한 현실의 아쉬움에서 시작된다. 김상헌(김윤석 분)과 최명길(이병헌 분). 두 사람은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는 정치적 라이벌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철천지원수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는 관계로 그려진다. 너무도 당연한 관계인데,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 그래서 김상헌과 최명길이 나라의 운명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투샷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1627년의 정묘호란이 화의로 끝난 후부터 최명길은 명분과 의리보다는 국가적인 안위를 위하여 청나라와 충돌을 피하고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화론(主和論)을 펼치는 데 반해, 김상헌은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시설의 확충을 주장한다.


1636년 청나라가 다시 10만 대군을 몰고 쳐들어온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 김상헌은 끝까지 싸울 것을 고집하는 주전론(主戰論)을 펼치는 데 반해, 이조판서 최명길은 대신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강화론을 펼쳐 격렬한 비난을 받는다.


이처럼 두 사람의 갈등은 나라의 명운과 백성의 목숨이 달린 만큼 그 격차도 크고 팽팽했다. 그 갈등의 양쪽 봉우리였던 인물들의 이야기라면 서로 음해하고, 모략하고, 배후에서 음모를 펼치는 것이 일반적인 수준의 플롯일 것이다. 하지만 <남한산성>이 채택한 방식은 달랐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당시의 정세에 대한 서로의 주장을 존중하면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사건의 전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지고, 의도적인 변주 장치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도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한산성>은 관객들을 당시의 문제 상황 속에 동참하게 한다. 선명하게 그려진 김상헌과 최명길의 주장 중 하나에 공감하는 관객들이 영화의 문맥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인조가 김상헌과 최명길의 주장 중 하나를 채택했을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정세의 변화를 좇다 보면 관객들은 의사결정자로서의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마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처럼.


김윤석의 캐스팅은 그래서 빛이 난다. 김윤석이라는 배우가 이전에 지속적으로 보여 준 캐릭터는 식상해 보일 정도로 전형적이었다. 고집 강한 아웃사이더. 때론 외골수여서 불편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런 그가 사극의 옷을 입으니 명분을 목숨처럼 중시하는 캐릭터가 효과적으로 강조되었다. 거기에 뱃사공의 손녀 나루를 거두는 장면과 천한 인물 서날쇠(고수 분)의 말에도 귀 기울이는 장면 등은 이전의 아웃사이더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겉은 강하되 속은 부드러운 김상헌의 캐릭터가 김윤석의 연기로 사실감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 사실감 덕에 관객들은 김상헌의 입장에 동조하거나 반대하며 영화의 문맥 속에 거부감 없이 빠져들게 되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의 논쟁이 눈길을 끌었다면, 후반부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상헌의 자결이었다. 김상헌의 자결은 역사의 사실과는 다른 설정이다. 서로의 주장을 존중하며 자신의 주장을 탄탄한 논거로 펼쳐가는 두 인물의 논쟁 씬을 부각한 것처럼 김상헌의 자결 장면을 삽입한 데에서 현실 비판의 의도가 읽혔다. 현실을 보자. 우선 아무 말로나 상대방을 비방하고, 그 주장의 근거가 팩트가 아님이 밝혀졌을 때는 나 몰라라 하는 세태가 만연하다. 이에 반해 김상헌의 자결은 자신의 주장을 더욱 공고히 하는 행위로서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자신이 온전히 믿는 것을 사실에 근거하여 주장하고, 그 주장한 것에는 끝까지 책임을 지는 모습. 외우내환에 시달리는 우리들을 든든하게 지켜 줄 성벽이다. 


영화 <명량>을 보고, ‘아버지’가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가난함이 절실해져서 눈물을 흘렸었다. 이번에 <남한산성>을 보고서는 치열한 논쟁으로 쌓아 올린 믿음의 성벽이 없는 현실이 불안해서 두려움이 엄습했다. <명량>을 본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나와 비슷한 설움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명량> 이후에 우리 사회는 지도자에 대한 의문을 품었고, 새로운 세상을 손수 열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기대해 본다. <남한산성> 이후에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최선의 결과를 위해 토론하는 사회로 거듭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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