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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Oct 02. 2017

시인의 사랑

다시 찾은 '생의 감각'

대학 시절 시 쓰는 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한 달 정도밖에 안 되는 기간 동안이었지만. 짧은 기간 활동하면서 나의 시는 껍데기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게 있는 알맹이가 부족했다. 두렵기만 하던 합평회 시간. 나의 시는 수식과 기교만 넘쳐난다는 지적을 받았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즉흥적으로 지어진 말들도 있었지만, 고민과 고통을 거쳐 낳은 시어들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기형도의 시집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삶과 체험이 녹아 있는 시어의 전달력을. 시란, 세상을 시어로 풀어낸 것이 아니라 시어로 지어 놓은 세상이란 것을. 그 세상은 손에 잡힐 듯이 구체적이었고, 나의 삶 어느 구석에서 만날 수 있는 공감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일까? 시어가 지어 놓은 세상은 독자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새로운 생명으로 자라나는 것이었다.

     

<시인의 사랑> 속 시인 택기(양익준 분)는 아내(전혜진 분)에게 얹혀사는 룸펜(Lumpen)이다.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택기. 그는 생명력이 없는 미사여구로 세상을 풀어내는, ‘꽃노래’ 가득한 시를 쓴다. 시라는 껍질을 내보내기는 하지만, 그 안에 삶이 녹아든 알맹이가 없다. 이런 그의 형편은 ‘무정자증’을 진단받는 것으로 치환된다. 그는 생명을 만들어 낼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게 무기력한 삶과 시 쓰기로 잉여의 세월을 보내는 택기 앞에 세윤(정가람 분)이 나타난다. 세윤을 만나면서 택기는 점점 생의 감각을 회복해 간다. 택기는 세윤의 아픔에 공감하며 세윤을 대신하여 울음을 쏟아낸다. 택기의 시에 생기가 돌고, 체험의 피복이 입혀진다.


여명의 종이 울린다.
새벽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빛은 장마에
넘쳐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에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김광섭, <생의 감각>


어떤 사람을 마음에 품고, 그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일만큼 격렬한 감정의 노동이 있을까? 더군다나 그 상대가 세윤처럼 거리를 방황하는 청춘이라면, 감정의 파랑은 더 크게 일 것이다. 한때는 행복했던 가정에서 살아갔을 세윤의 인생은 아버지가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면서’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다. 학교를 그만두고 친구들 사이를 배회하며 불우한 처지에 대한 분노를 불같이 표출한다. 그 순간 세윤이 내뱉는 언어들은 택기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일상에 마비된 감각을 세차게 내리치는 죽비소리처럼. 세윤이 걱정되고, 보고 싶고, 세윤과 함께 있고 싶은 감정의 파도는 조약돌처럼 매끈한 택기의 인생에 모서리들을 만든다. 모서리들은 택기를 자극하며 그가 생의 감각을 회복하게 한다. 세윤은 택기에게 어느 시인의 ‘채송화’이며, 모든 작가들이 꿈꾸는 ‘뮤즈’이다.

 

    

영화 <시인의 사랑>의 매력은 이처럼 세윤을 만나 변화해 가는 택기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주전자 속에 며칠은 고여 있었던 것 같은 택기의 감정이 질풍노도의 불덩이를 품고 사는 세윤의 방황과 충돌하면서 펄펄 끓어 시로 피어오르는 과정. 그 과정을 따라가며 슬며시 우리의 사랑을 추억하고 자동화된 삶을 돌아보는 데 이 영화의 매력이 있다.

     

택기가 세윤이 일하는 가게의 도넛을 맛보고 덕후가 되어 버리는 모습. 빈 매장에 앉아 세윤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는 모습. 세윤의 말 한마디를 수첩에 기록하는 모습. 세윤이 어느 여자 아이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 미묘한 감정을 느끼는 모습. 힘들어하는 세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어 하는 모습. 생각해 보면, 우리도 사랑이라는 계절을 지나는 동안 취했던 모습들이 아닌가? 그래서 영화 속 장면들은 우리의 가슴속에서 저마다의 세상으로 자라난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사라져 버린 것들 속에서 충만한 생명이 시작되는 가을처럼 쓸쓸하지만 따뜻하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 기형도, <희망>

          

절절하고 뜨거웠던 사랑의 주인공이었던 우리들. 언제부턴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잊어버린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영화 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러 버스에 실려 학교를 오가는 택기처럼. 우리의 일상은 또렷한 초점을 잃고 멍한 상태로 흘러간다. 바라는 것이 많고 아쉬운 것이 많았던 시절의 격한 감정들은 언제부턴가 바닥을 드러낸 채로 메말라 버렸다. 그런 나에게 이 영화는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세찬 빗줄기에 마음이 따갑기도 했지만, 넘쳐나는 감정들이 윤슬로 흐르던 시절들을 다시 꿈꿀 수 있어서 고마웠다. 그 희망을 씨앗으로 새로운 세상을 지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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