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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l 14. 2015

킹스 스피치

욕망하는 자아의 성장기

왕가(王家)라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주인공 앨버트(콜린 퍼스 분)는 왕가의 규범을 상징하는 아버지와 자유로운 욕망을 상징하는 형의 사이에서 주눅이 든 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짓눌려진 욕망은 말더듬이라는 왜곡된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앨버트는 자신을 왕가의 사람이 아닌, 한 명의 말더듬 환자로 대해 주는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제프리 러쉬 분)을 만나 자기  욕망의 실체를 확인하고, 그것을 인정하게 된다. 연극 배우로서의 욕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은 앨버트의 말더듬증을 마음의 병으로 규정하고, 앨버트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라이오넬과의 만남을 거듭하면서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는 순간, 앨버트는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게 된다.

이러한 앨버트의 성장기를 되짚어 보면서 나의 지난 이야기도 함께 떠올랐다.

 

서른이 되던 해에 나는 무척 우울했었다. 늘 술을 마시고, 의미 없이 사람들을 만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혼자 있는 시간이면, 그런 내가 너무도 혐오스러웠다. 머릿속이 온통 쾌락과 부도덕함으로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우울은 더 깊은 우울을 낳았다.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실수들도 많이 저질렀다. 늪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는 생활을 하던 어느 날. 가까운 친구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나 혼자만이 그런 것이 아니며,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처럼 욕망하는 나또한 엄연한 나의 또 다른 자아라는 사실이었다. 그와 같은 깨달음에 이르자 마음은 편해졌다. 나의 일상은 안정을 찾았고, 곧 좋은 사람 만나서 지금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누가 만든 것인지도 모를 잣대에 스스로를 맞추어 가며 우리는 주눅 든 채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를 믿기보다는 규범을 존중한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때가 많다. 그러다 가끔씩 드러나는 욕망을 마주하며 놀라게 된다. 때로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자신의 모습을 위선적이라고 혐오하면서…….

 

사람들이 나보고 그래 나는 철들면 염할 것이다. 죽는 순간에 철이 들까? 왜냐면 늘 사회에 모든 원칙적인 것들, 그 기준이 있잖아요. 그 기준이 늘 맘에 안 들어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엉뚱하단 소릴 듣는 거야. (……계속……) 그래서 나는 다르게 행동하는 건데…… 그게 세련되지 않아서 그런 거야. 사회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세련된 건 철들었다고 하는 거지. 사실 그니까 난 사회적으로 세련되지 않았으니까 철 안 들었다…….”


어느 방송에서 송창식 씨가 한 말이다. 그는 늘 아름다운 목소리로 시원하게 노래한다. 그의 호흡에는 자기 욕망에 대한 자유로움이 실려 있었나 보다. 그래서 우리 같은 말더듬이들이 듣기에 가슴 한쪽이 뻥 뚫리는 시원함이 있었나 보다. 우리집에도 아직 철 안 든 아들이 있다. 아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기발한 생각에 감탄할 때가 많다. 원래는 우리도 저랬다. 누구나 시인처럼 참신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했다. 각자의 욕망이 다 다르므로 이야기도 다 달랐으리라. 그런데 자라면서 이 사회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습득해 가며 내가 가진 목소리들을 하나씩 잃어 갔다. 어른이 될수록 말문은 닫히고, 혀는 굳어져 간다. 


앨버트가 왕가의 규범을 완전히 넘어선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조금 답답해 보인다. 다만, 이 영화는 앨버트의 삶을 통해 나를 내 자신의 욕망 앞에 앉혀 놓았다. 나 또한 내 욕망의 소리를 들을 때이다. 그 이후의 문제는 내가 풀어가야 할 과제이다. 이처럼 한 편의 영화가 끝나면 내 인생의 영화가 시작된다. 그래서 난 영화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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