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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l 17. 2015

퍼펙트 스톰

인간이여, 자연으로 돌아가라

자연과 문명의 충돌


영화의 타이틀백은 바다에서 귀항하는 어부들과 육지의 친지들이 정답게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늙은 어부의 죽음을 한낱 쓸모 없는 부속품의 파손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선주의 모습이 비춰진다. 이러한 장면의 교차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자연으로서의 인간이 지니는 본성과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심각하게 충돌할 것임을 암시한다.
오로지 이익의 창출에만 관심이 있는 선주는 자본이 절대 가치로 인정되는 오늘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선주의 압박에 못 이겨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게 되는 어부들은 현실의 불합리함을 뼈저리게 인식하면서도 현실 속으로 더욱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 소시민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대부분의 생활을 바다에서 보낼 수밖에 없는 선원들은 정서적으로 육지와 유리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멀어짐. 그 거리감으로 인해 소외되어 외로운 개인. 그들의 삶이 그렇게 훼손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단순히 바다라는 공간에 떨어져 있는 상황만으로 설명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부들이 바다로 나가게 되는 원인은 바로 ‘돈’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욕망, 개인의 파멸 

빌리는 바다를 고향처럼 사랑하는 어부였다. 그러나 점점 어획량이 줄어 들고 현실 속에서 무능한 선장으로 낙인찍혀 가면서, 그에게 바다는 더 이상 고향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엔 오직 만선의 욕망만이 자리하게 된다.
바비는 크리스티나를 사랑한다. 현실 속에서의 그녀와의 사랑을 뒷받침해 줄 돈을 얻기 위해, 그 역시 만선을 꿈꾸며 무모한 항해를 나선다. 함께 배를 탄 다른 선원들도 이 같은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선원들의 욕망은 궁극적으로 사회에 의해 강요된 것이기에 폭력적이다. 그 욕망을 위해 개인은 사랑하는 것들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다. 그들이 선택한 길은 자연에서 먼 인위로 향한 길이기 때문에. 어쨌든 선원들의 거짓된 욕망은 우여곡절 끝에 일단 충족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만선의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그러나 하필 그때, 얼음 기계가 고장나고, 빨리 귀항하지 않으면 잡았던 생선을 모두 잃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결국, 그들은 목숨까지 담보로 내건 채, 생선-그들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을 지키기로 한다.
이제부터 어부와 바다 간의 싸움이 시작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과 자본주의로 표상되는 문명의 충돌이 시작된다. 빌리는 고향의 품처럼 느껴오던 바다에 정면으로 대항해 보지만, 바다 속에 잠들고 만다. 사회의 욕망이 지닌 폭력성이 개인의 본성을 파괴하고, 그를 죽음으로 인도한 것이다.



인간 본성의 아름다움

인류의 문명이 만들어 낸 선박이나, 헬기 등이 허리케인의 위력 앞에 무력할 때,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연 속에서 얼마나 미약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스크린 속의 파도로 밀려오는 감동은 그처럼 뻔한 교훈만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대형 블록버스터임에도 불구하고, 러닝 타임 중 약 40분 정도를 인간 관계의 설정에 할애한 감독의 의도로 볼 때, 인간 본성의 아름다움이라는 메시지 전달에 더욱 비중을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부분의 바비의 최후 장면을 보자. 그 넓고 사나운 바다 속에 홀로 떠 있는 바비. 인간이 자연 속에서는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자신의 연인에게 남기는 사랑의 독백. 그 마지막 순간의 독백은 바비가 죽은 후에 크리스티나에게 꿈을 통해 전해지면서 짜릿한 감동을 선사한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가슴 아프게 그려 낸 장면이다. 어쩌면 죽은자와 산자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초자연적인 상황의 설정은, 사랑의 힘이 자연의 힘을 초월하는 것임을 보여 주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이러한 해석 또한 인간으로서의 오만일지도 모르지만).
빌리는 그의 배와 함께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여기서 빌리의 죽음은 비극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죽음에 이르러 빌리는 자기 자신을 회복하고 그의 고향의 품 속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므로, 오히려 행복해졌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의 마지막, 린다가 출항하는 장면에서 되풀이되는 빌리의 내레이션은 바다 속에 동화되어 있는 그의 본성을 상기시켜 준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지듯, 눈부신 바다의 경치와 그 속에서 자연의 일부로 조화를 이루는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우리들이 꿈꾸어야 할 진실한 욕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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