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라세, <시라트(Sirat)>
출근길 만원 지하철,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인파 속에 갇혀 있을 때면 나는 습관처럼 언더월드(Underworld)의 <Born Slippy>를 재생하곤 했다. 90년대 레이브 문화를 상징하는 이 곡은 시작부터 영롱한 신디사이저 코드를 깔며 심박수를 서서히 높여간다. 그러다 “Lager, lager, lager”라는 주술 같은 외침과 함께 비트가 폭발하는 순간, 나는 갑갑한 현실의 지하철 객차 안에서 이탈하여 공중으로 붕 뜨는 기분을 느꼈다.
남들에게 이 곡을 들려주면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CD가 튀는 것 같아.”, “멀미가 날 것 같아.”, “제발 그만 좀 꺼라, 돌아 버릴 것 같으니까.” 그들에게 이 곡은 그저 의미 없는 소음의 나열이자 청각적 고문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 쿵쿵거리는 킥 드럼(Kick Drum)은 중력을 거스르는 추진체였다. 비트가 임계점을 넘어 터지는 찰나, 내 영혼은 꽉 막힌 현실의 터널을 뚫고 활주로를 박차고 오르는 비행기처럼 거대한 해방감을 맛보곤 했다. 그것은 가장 완벽한 ‘비상(飛上)’이자 일상을 잊게 만드는 달콤한 마취제였다.
올리버 라세 감독의 신작 <시라트(Sirat)>를 마주했을 때, 나는 청년 시절 그 만원 지하철에서의 전율을 다시 기대했다. 이 영화 역시 하드 테크노 비트가 쿵쿵 대는 레이브 파티를 배경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크린 속 사막에서 울려 퍼지는 테크노는 언더월드가 선사했던 그 짜릿한 비상과는 결이 달랐다. 언더월드의 <Born Slippy>가 현실을 탈출해 쾌락의 하늘로 날아오르는 ‘이륙’이었다면, <시라트>의 테크노는 멸망해 가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착륙’이자 땅을 파고드는 무거운 ‘접지(接地)’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캉딩 레이(Kangding Ray)가 설계한 140 BPM이 넘는 하드 테크노의 킥 드럼을 관객의 심장에 때려 박는다. 하지만 거기엔 우리가 기대하는 ‘황홀경’이나 ‘멜로디의 카타르시스’가 거세되어 있다. 건조하고 반복적인 타격음만이 끝없이 이어진다.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러닝타임 내내 견뎌야 할 끔찍한 소음일 것이다. 하지만 실종된 딸을 찾아 사막을 헤매는 아버지 루이스(세르지 로페즈 분)와 이 리듬에 갇힌 관객에게 이 반복적인 비트는 유일한 구원의 동아줄이 된다.
왜 감독은 우리를 이 멀미 나는 반복의 굴레로 밀어 넣었을까? 그 답은 바로 음악이 멈추면 찾아올, 견딜 수 없는 정적과 고통에 있다. 영화 속 모로코 사막을 지배하는 사운드는 네 박 모두에 강한 베이스 드럼 킥을 넣는 ‘포 온 더 플로어(Four-on-the-floor)’ 리듬이다. 4분의 4박자, 매 박자마다 정확하게 떨어지는 킥은 흡사 심장 박동을 외장 스피커로 증폭시킨 듯하다. 이 단순하고 무자비한 소리는 관객의 고막이 아니라 흉곽을 직접 두드린다.
이 지점에서 라세 감독이 선택한 테크노는 음악의 영역을 넘어선다. 그것은 고대 종교의식에서 샤먼이 두드리던 북소리나 이슬람의 수도승들이 신을 만나기 위해 주문을 끝도 없이 반복해 외우는 간절한 기도와 닮았다. 가사 한 줄, 감정 한 자락 섞이지 않은 채 제자리에서 뱅뱅 도는 이 리듬은, 오늘날 우리가 고통을 잊기 위해 외우는 주문과 다를 게 없다.
인간의 뇌는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사고(思考)를 멈추게 되어 있다. 끝없이 반복되는 비트 속에 갇히면 복잡한 인과관계와 미래에 대한 걱정은 휘발되고 오직 ‘지금, 여기’의 감각만이 남는다. 딸이 사라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루이스와 멸망해 가는 세계를 목도하는 군중들에게 ‘생각’은 곧 고통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생각하지 않기 위해, 자아를 지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춤을 춘다.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레이브 현장은 쾌락의 파티장이 아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에 젖어 춤추는 군중의 모습은 마치 고행을 자처하는 수도승들의 집단 제의처럼 보인다. 거대한 스피커 탑은 그들의 제단이고 땅을 울리는 웅장한 베이스 음은 보이지 않는 신의 목소리다.
라세 감독은 이 시청각적 체험을 통해 역설을 말한다. 가장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만 가장 완벽한 내면의 침묵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육체가 부서질 듯 춤을 추는 순간에만 비로소 영혼이 그 무거운 고통의 무게를 벗어던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엑스터시(Ecstasy)의 어원인 ‘영혼의 이탈(Ekstasis)’을 시각화한 가장 현대적이고도 원초적인 풍경이다.
영화의 제목 ‘시라트(Sirat)’는 이슬람 전설에 따르면 지옥 위에 놓인, 칼날보다 날카로운 다리를 뜻한다. 멈추면 떨어진다. 균형을 잃으면 지옥불이다. 그렇기에 루이스와 군중들은 그 칼날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춤을 멈출 수 없다. 관객이 듣는 그 반복적인 비트는 그들을 지옥으로 떨어뜨리지 않게 붙잡아주는 유일한 생명줄이자, 위태로운 다리 위를 건너게 하는 보폭의 리듬인 셈이다.
다시 처음의 청년 시절 기억으로 돌아가 본다. 만원 지하철, 언더월드의 <Born Slippy>가 나를 현실의 중력에서 해방시켜 하늘로 띄워 보냈다면, 올리버 라세의 <시라트>가 뿜어내는 테크노 비트는 정반대의 힘으로 작동한다. 이 영화의 리듬은 우리를 하늘로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두 발을 대지에 더욱 단단히 박게 만든다.
지옥불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시라트’를 건너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몽환적인 비상이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추락하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접지다. 루이스와 사막의 순례자들이 먼지 구덩이 속에서 발을 구르며 춤을 추는 행위는 멸망해 가는 세계의 끄트머리에서조차 “나는 아직 여기 살아있다”라고 외치는 가장 원초적인 확인인 셈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의 불이 켜지면, 귀를 멍하게 만드는 이명(耳鳴)과 함께 기묘한 정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그 시끄러웠던 114분간의 소음이 실은 루이스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실과 절망을 삼키기 위해 바친 가장 긴, 그리고 가장 소란스러운 침묵의 기도였음을. 그리고 우리가 그 소음을 견뎌낸 시간 역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듣는’ 행위였음을.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우리의 삶은 예고 없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논리와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하나뿐일지도 모른다. 그 칼날 같은 다리 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것.
마치 루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음악이 멈춘 뒤에도 우리의 춤은 계속되어야 한다. 쿵, 쿵, 쿵, 쿵. 당신의 심장이 뛰고 있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