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만 남은 ‘휴민트’

류승완, <휴민트>

by 박재우

2026년 2월 10일, 틱톡의 모회사 바이트댄스가 공개한 AI 영상 생성 모델 ‘시댄스(Seedance) 2.0’은 전 세계 영화 산업에 거대한 충격을 안겼다. 단 두 줄의 명령어만으로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가 폐건물 옥상에서 격투를 벌이는 15초 분량의 영상을 완벽하게 구현해 낸 이 기술을 접한 할리우드 각본가들은 “우리는 아마 끝인 것 같다”라는 절망 섞인 탄식을 쏟아냈다.


실제 촬영으로 제작한 영화와 구분이 불가능한 조명, 물리 법칙을 반영한 관성, 효과음까지 재현해 내는 AI의 진격 앞에서 천문학적인 제작비와 인력이 투입되는 전통적인 제작 방식은 근본적인 존립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시댄스 쇼크’의 한복판에서 개봉한 <휴민트>는 류승완 감독이 지닌 가장 원초적인 무기인 ‘실재하는 액션’을 전면에 내세우며 극장의 존재 이유를 설파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AI가 수만 번 학습했을 법한 기시감 넘치는 플롯과 식상한 서사 구조를 반복하며 전통적 거장이 마주한 창의성의 임계점을 동시에 드러낸다.


<휴민트>의 가장 큰 결점은 서사의 빈약함과 구태의연한 설정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의 핵심 동력인 국제 마약 밀매와 인신매매 소재는 최근작들만 살펴봐도 제이슨 스타뎀 주연의 <워킹맨(Working Man)>이나 국내 드라마 <모범택시 3> 등에서 지겹도록 변주된 것들이다. 특히 부패한 경찰과 러시아 마피아가 결탁한 조직에 맞서는 전직 요원의 서사는 <워킹맨>의 전형성을 그대로 답습하며 장르적 신선함을 주지 못한다.



류승완 감독은 <베테랑 2>부터 지적받아온 각본의 투박함과 억지스러운 유머, 감정 과잉의 문제를 이번에도 온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첩보물 특유의 치밀한 정보전보다는 액션의 자극을 위한 기능적 배경으로 소재를 소모하면서 서사는 전작들보다 더욱 단순하고 예측 가능해졌다.


물론 액션의 기술적 완성도만큼은 여전히 류승완답다. 좁고 가파른 계단에서 벌어지는 육탄전이나 실제 탄환 수까지 세밀하게 계산해 장르적 과장을 억제한 총기 액션 시퀀스는 ‘진짜 같은 액션’을 향한 감독의 집념을 보여준다. 조인성은 특유의 긴 팔다리를 이용해 절도 있는 동작을 선보이며 첩보 요원의 차가운 전문성을 시각화하고, 박정민은 체제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의 내면을 처절한 액션으로 승화시킨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재현하기 위해 라트비아 로케이션을 감행하고 부족한 적설량을 CGI로 메꾸며 완성한 설원 시퀀스는 분명 스크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압도적인 시각적 질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문제는 ‘어렵게 찍은 액션’이라는 진정성이 AI가 제공하는 ‘무결점의 효율성’을 이길 수 있느냐는 점이다. 시댄스 2.0이 단 하루 만에 저작물을 무단 사용해 정교한 영상을 뽑아내는 환경에서 전통적인 제작 방식이 내세울 수 있는 가치는 결국 ‘서사의 깊이’와 ‘인간에 대한 통찰’이 될 것이다.


<휴민트>는 누군가를 위해 시스템의 부품이 되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길을 강조하지만 정작 영화 자체가 지닌 플롯은 장르라는 시스템의 부품처럼 작동한다. 홍콩 누아르의 트렌치코트와 삼각 대치를 오마주하는 연출 역시 고전의 낭만보다는 낡은 관습의 답습으로 비칠 뿐이다. 실제로 상영관의 일부 관객들은 1980년대 홍콩 영화의 전형을 그대로 가져온 삼각 대치 장면에서 ‘풋’ 하는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이러한 정체는 자타공인 ‘성룡 키드’였던 류승완 감독의 영원한 스승인 성룡의 최근 행보와 비교할 때 더욱 도드라진다. 성룡은 최근작에서 화려한 기교 대신 쇠락하는 육체의 고통을 서사로 승화시키며 ‘노병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다.


<더 포리너>(2017)에서 그는 곡예 같은 액션을 완전히 버리고 자식을 잃은 늙은 아버지의 투박하고 처절한 몸짓을 보여주었으며 늙은 몸이 겪는 고통 자체를 극의 핵심적인 긴장감으로 승화시켰다. 또한 <라이드 온>(2023)에서는 늙어가는 스턴트맨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의 영광과 작별하는 법을 보여주었고, <포풍추영>(2025)에서는 은퇴한 전설적인 전문가로서 젊은 세대를 이끄는 멘토 역할을 수행하며 자신의 자리를 재정의했다. 성룡은 자신의 육체가 늙어감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노년의 액션 철학’을 구축한 것이다.


반면 <휴민트>의 류승완은 여전히 전성기의 문법을 변주하는 데 그친다. 기술적 숙련도는 정점에 달했을지언정, 시대를 관통하거나 자신의 위치를 반추하는 철학적 진화는 느껴지지 않는다. <휴민트>는 2013년 작 <베를린>의 세계관을 잇는 첩보 액션이지만 10여 년 전의 문법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다. 조인성과 박정민이라는 훌륭한 배우들을 활용해 정교한 합을 짜냈음에도, 그것이 예전에 보여준 ‘펄떡이는 에너지’ 이상의 새로운 울림을 주지 못한다.


결국 <휴민트>는 류승완식 액션의 기술적 도달점인 동시에 서사적 한계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댄스 2.0이 단 하루 만에 정교한 영상을 뽑아내는 시대에 관객들이 여전히 비싼 티켓값을 지불하며 극장을 찾아야 할 이유는 단순히 ‘고생해서 찍은 액션’만으로는 부족하다. 독창적인 서사와 동시대적인 문제의식이 결여된 ‘리얼 액션’은 자칫 낡은 유물의 전시회처럼 느껴질 위험이 크다.


이제 류승완 감독에게 필요한 건 더 정교한 액션의 합이 아니라 성룡처럼 자신의 자리를 다시 정의하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의 액션 서사시가 AI가 생성한 화려한 파편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술적 숙련을 넘어선 서사의 깊이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