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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l 05. 2015

도쿄

세 가지 키워드로 읽는 도시인의 삶

우리는 오늘도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나'와 '남'의 욕망이 서로 부딪히고 화해하는 가운데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깔을 내면서 말이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도시는 화려해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흑백 화면의 우울함보다 더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영화 <도쿄!(Tokyo!, 2008)>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도쿄!>는 미셸 공드리, 레오 까락스,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옴니버스 영화입니다. 세계적인 도시 도쿄를 각자의 관점으로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습니다(미셸 공드리의 경우 자신의 여자 친구가 만들려고 한 애니메이션 원작을 영화화했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배경은 뉴욕이었다네요. 그곳도 대도시이고 수많은 사람 부대끼는 곳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아야겠습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제 눈에는 관계 속에서 상처 받고, 증오심을 품으며 결국엔 단절의 길로 들어서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그 쓸쓸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키라와 히로코(Interior Design)’  (미셸 공드리 감독 작품) 

Keyword 1. 존재감
존재감 없는 당신이, 고민인가요?

첫 번째 단편입니다. 홋카이도에서 영화 작가를 꿈꾸는 애인을 따라 도쿄로 상경한 히로코의 이야기이지요. 거처할 곳도 없는 가난한 처지여서 친구의 좁은 방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합니다. 오직 애인의 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가운데, 그녀는 선물 포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아르바이트 자리도 못 구하는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회의하게 됩니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존재라는 친구의 험담을 들어가면서 말이지요. 더구나 애인이라는 작자까지 그녀에게 '야망이 없다'는 핀잔을 줍니다.

급기야 그녀는 “왜 나는 여기 있는 걸까?”라는 의문과 함께 주변의 무관심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다가 신체의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갈비뼈의 일부가 나무가 되어 가더니, 다리도 나무로 변하고 결국에는 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의자가 된 그녀는 어느 음악가의 손에 들려 충실한 의자의 삶을 살며 행복해하게 됩니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정록, <의자>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애인의 꿈을 뒷받침하던 히로코의 삶이 '야망이 없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할까요? 드러나 보이는 삶이 아니라서 히로코는 존재감이 없는 사람일까요? 내가 의자가 됨으로써 다른 존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 관계이고 인생입니다.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아보세요.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친구로서 이미 당신은 없어서는 안 될 이유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야망'을 가지고 살 수도, 살 필요도 없습니다.  



‘광인(Merde)’  (레오 까락스 감독 작품)

Keyword 2. 증오
도시의 가슴속엔, 증오가 산다.

도쿄의 상공에서 바라본 도시의 전경으로부터 맨홀 뚜껑으로 카메라가 줌인(zoom in)되면서 하수도 광인 '메르드(Merde, 불어로 '똥'이라는 뜻임)'가 등장합니다. 그는 오른쪽 눈은 멀고 수염은 한쪽 방향으로 길이 난 흉측한 몰골에 기괴한 걸음걸이로 도심을 헤집으며 멋대로 타인들을 공격합니다. 그러던 중 그는 지하 세계에 남아 있던 제국주의 시절의 무기 수류탄을 가지고 도심으로 나와 무차별한 살상을 벌입니다. 일본인이 싫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결국, 그는 사형을 당하게 되는데, 죽지 않고 사라져 버립니다. 뉴욕의 출현을 예고하면서…….

그를 보면서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증오를 느꼈습니다. 타인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그것에 대한 보복으로 증오심을 키우고 있는 우리들. 이른바 '묻지마 살인'이라는 끔찍하고 대책 없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는 오늘의 모습이 광인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에 오버랩(overlap)되더군요.

광인이 즐겨 먹는 것은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일문자국과 돈인데, 이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가 광인의 증오심을 길러온 영양분임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요? 화려한 대도시 도쿄의 어두운 가슴속에는 증오가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그러면 몰래 감추어 둔 대포와

대포 곁에서 잠드는 병사들의 숫자만 믿고

함부로 날뛰던 나라들이 우습겠지요

또한 몰래 감춘 대포를 위해

눈 부릅뜨고 오래 견딘 병사에게 달아주던 훈장과

훈장을 만들어 팔던 가게가 똑같이 우습겠지요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그러면 전 세계의 시민들이

각자의 생일날 밤에

멋대로 축포를 쏜다 한들

나서서 말릴 사람이 없겠지요

 

총구가 꽃의 중심을 겨누거나

술잔의 손잡이를 향하거나

나서서 말릴 사람이 없겠지요

 

별을 포탄 삼아 쏘아댄다면

세계는 밤에도 빛날 테고

사람들은 모두 포탄이 되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이세룡, <세계의 포탄(砲彈)이 모두 별이 된다면>


'메르드'를 사형시킨다고 해서 세상이 평화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메르드'가 사형장에서 죽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것은 치유되지 않은 증오심은 계속해서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증오심으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만을 제거하는 것이 올바른 해결책이 아닌 것이지요. '포탄'을 '별'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증오를 '애정'으로 바꾸는 우리들의 관심과 노력 말입니다.  



‘흔들리는 도쿄(Shaking Tokyo)’  (봉준호 감독 작품)

Keyword 3. 접촉
흔들리는 도쿄, 흔들리는 내 마음

10년간 히키코모리(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병적인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로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한 남자. 세상 사람들과의 접촉이 싫어서 집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아버지가 매달 부쳐 오는 돈을 가지고 필요한 것들은 전화로 주문해서 배달시키면 됩니다. 먹고 남은 피자 상자나 두루마리 휴지의 종이심 등은 가지런히 정리해 두면 되고요. 그런 나름의 규칙과 질서 속에서 살아가던 그는 언제나처럼 토요일에 피자를 시켰다가 배달부 여자와 눈을 마주치게 됩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말이죠.

그 순간 도시를 뒤흔드는 지진이 일어나고 배달부 여자는 기절하게 되지요. 갑작스러운 사건에 당황하는 그가 발견한 것은, 여자의 가터벨트 사이로 드러난 버튼 모양의 문신. 그것을 누르자, 여자는 깨어납니다.

그렇게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그가 '접촉'을 경험하게 되고, 그는 여자를 찾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히키코모리 상태가 되어 집 안에 틀어박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세상으로의 '외출'을 결심하게 되지요.

사람들이 모두 히키코모리가 되어 도시 전체가 텅 비어 버린 현실을 목격하고, 결국 그녀를 찾게 된 그. 제발 나오라고 부탁하지만 완강히 거부하는 그녀. 때마침 일어나는 지진으로 그녀는 집 밖으로 나오게 되고, 그녀의 팔뚝에 그려진 'Love'라는 버튼을 그가 누르게 됩니다. 다시 흔들리는 도시, 그리고 암전(暗轉).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장정일,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타인이 자기 몸에 스치기라도 하면 짜증들을 냅니다. 심지어는 눈빛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싸움이 일어나고는 하죠. 접촉을 기피하는 우리들은 결국 세상과 단절되기 위해 집 안에 갇혀 버립니다. 몸도 마음도 말이지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그 따스한 온기를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도시의 어깨를 흔듭니다. 그 속에 숨어 있는 우리들이 세상으로 나가 서로에게 먼저 손 내밀어 보라고. 추운 겨울날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던 우리들을 '나가서 뛰어놀아라.' 하며 흔들어 깨우던 그 옛날 어머니의 손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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