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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l 05. 2015

허트로커(The Hurt Locker)

당신에게 전쟁이란?

오늘날 우리에게 전쟁의 의미는 무엇일까? 간간이 뉴스의 보도 화면을 통해 전해지는 전쟁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 저런…….’ 하는 안타까움의 탄사(歎辭)를 흘린다. 그런 후에는 ‘왜 저렇게 명분 없는 싸움에 목숨을 바칠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을 해 본다.

우리에게 전쟁은 언제부턴가 비디오게임과 같은 오락거리가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TV를 통해 보이는 전쟁의 풍경은 신무기들의 성능을 자랑하는 화려한 쇼이다. 우리는 그 파괴력과 정확성에 놀라며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을 실감한다. 그 사이 죽어 가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나 반성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죄 없이 죽어 가는 이의 삶은 어떻게 보상될 수 있을지 등등의 고민은 사라진 지 오래다. 차라리 전쟁으로 인해 기름값이 오르지는 않을지, 주가가 떨어지지는 않을지 고민하는 이가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우리에게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허트 로커(The Hurt Locker, 2008)>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개인들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실상을 전한다. 전투 게임의 유닛이 아닌, 우리처럼 느끼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전쟁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사실적으로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폭발물 처리반(EOD) 사람들 - 아이러니의 비애에 빠지다

영화 속의 주인물들은 설치된 폭발물을 해체하거나, 안전하게 터뜨리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폭발물이 터짐으로써 선량한 시민들이 상처 입는 것을 막는 것이다. 타인이 상처 입는 것을 막으면서, 정작 자신들은 마음의 상처를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 가고 있는 아이러니. 그래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하나씩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그들의 삶. 전장(戰場)에서 군인들이 겪어야 하는 비애가 아닐까? 전쟁에 참여한 그들을 ‘Hurt Locker(남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전쟁의 과정 중에서 가장 상처받는 자들은 바로 군인들 자신인 것이다.


제임스(제레미 레너 분) - 전투의 격정에 중독되다

그는 사냥터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거침없이 폭발물에 접근한다. 목숨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들도 거부하고 맨몸으로 폭발물 해체에 도전한다. 그렇게 목숨 걸고 해체한 폭탄의 수만 해도 873개. 전쟁 영웅이자 베테랑 용사인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두 명의 팀원은 그런 그의 용맹함을 ‘무모함’으로 읽는다. 앞뒤 안 가리고 폭발물 해체에만 몰두하는 그로 인해 자신들의 목숨도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제임스야 말로 전투를 게임처럼 즐기는 전쟁광이자, 팀원들에게조차 고통을 안겨 주는 진정한 ‘허트 로커’라 할 수 있겠다. ‘전쟁에 중독된 호전적인 인물. 사회에는 적응할 수 없음.’ 우리는 이러한 꼬리표를 제임스에게 달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의 속마음은 누구보다 여리다. 포르노 DVD를 파는 아이와 친구가 되고, 인간 폭탄이 된 아이의 죽음에 폭발할 듯이 분노한다. 전쟁터에서는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그는, 혼자 있는 시간에는 누구보다 외로운 모습으로 공포를 느낀다. 그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인 것이다.

복무 기간을 마친 제임스는 가정으로 돌아오지만, 적응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한 가지가 폭발물 해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는 다시 전장인 이라크로 돌아간다. 그는 전쟁에 중독된 것이다. 그에게 폭발물 해체, 즉 전쟁은 타인의 목숨을 지키는 숭고한 작업이다. 시신을 훼손하면서까지 폭발물을 터뜨리려는 적으로부터 선량한 이들의 목숨을 지켜내는 의미 있는 일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전쟁터에 있어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숙명이라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의미를 찾자면, 폭발물 해체는 그에게 도전할 만한 과제이다. 스스로의 능력을 확인하는 과정인 것이다. 하나의 폭탄을 해체할 때마다 그는 미션 완수의 쾌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그가 해체한 폭탄의 수가 873개인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해체가 어려웠던 뇌관은 따로 모아서 그 작업을 기념한다. 목표물을 얻었을 때의 쾌감. 그 엔돌핀에 그는 중독된 것이다.

어떤 경우로 보든 간에 제임스는 전쟁의 문맥 속에서만 그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타인의 목숨을 지키고, 신형 폭발물의 해체에 도전하면서 그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느낀다. 그렇기에 그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중독에 따른 후유증은 마음의 상처이다. 전쟁터의 현실은 그의 가슴에 수많은 상처를 남긴다. 그는 상처를 치유할 줄 모른다. 다만 혼자 괴로워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술을 마실 뿐이다. 그 아픔을 잊기 위해 그는 새로운 복무 기간인 365일 동안 또다시 무모할 만큼 폭발물 제거에 매달릴 것이다.

제임스에게 전쟁은 살아 있는 이유이자, 살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샌본(안소니 마키 분) - 죽음을 통해 삶을 보다

샌본은 한 마디로 합리적이고 매뉴얼대로인, FM 군인이다. 주어진 지침대로 행동하고, 복무 기간까지 성실히 근무하면 그만인 것이다. 군인이란 그에게 직업일 뿐이고, 전쟁터는 파견 근무 나온 현장이다. 어찌 보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가장 닮은 캐릭터일 것이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적당히’ 내 할 일만 하면 된다는 식의 삶의 방식. 명분도 없는 전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형이 아닐까?

샌본은 애인이 있지만, 아기를 갖기를 싫어한다. 아직 아빠로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전쟁터에서도 현실에서도 어느 것 하나 화끈하게 결단을 내리질 못한다. 이성의 잣대로 이것저것 재보기만 할 뿐, 선뜻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그런 그가 복무 기간을 이틀 남기고 출동한 현장에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아들을 갖고 싶어한다.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는 가운데 허망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어느 하나에도 치열하지 못하고, ‘적당히’ 살아온 것이기에 자신도 ‘적당히’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샌본에게 전쟁은 죽음의 공포를 보여 주었다. 죽음의 공포를 통해 나약한 자신을 직면한 그는 적극적인 삶을 희망하게 된다. 제임스처럼 자신이 결단을 내리고 목표를 해치우는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려 하는 것이다.


엘드리지(브라이언 게라그티 분) - 살기 위해선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엘드리지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데, 남을 죽이는 것도 만만치 않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나약함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나약함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지니는 당연한 본성이 아닐까? ‘총’이라는 무기가 생기면서 살인에 대한 양심의 부담은 가벼워졌다. 나는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다. 총알이 상대를 관통한 것뿐이고. 엘드리지는 이처럼 무뎌진 살인에 대한 양심을 일깨워 준다. 설령 그 모습이 답답해 보이더라도. 반면에 전쟁터에서는 그런 양심 따위는 살기 위해 버려야 한다는 비정함도 보여 준다.

엘드리지가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기만 했어도, 그의 상사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수차례의 망설임 끝에 그도 결국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터란 그런 곳이다. 전쟁에서는 무엇보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제임스가 적에게 끌려가는 엘드리지를 구하기 위해 엘드리지를 향해 총을 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엘드리지가 총에 맞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적에게 총을 쏠 수밖에 없었다. 엘드리지는 다리의 뼈가 아홉 조각이 나는 중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후방으로 후송되는 엘드리지는 제임스에게 온갖 욕을 퍼붓는다. 그처럼 엿 같은 상황이 또 있으랴. 자신을 살린다는 사람이 자신에게 총질을 해대는 상황.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가 모호해지면서 오로지 살아남는 자만이 선(善)이 되는 혼돈의 공간. 엘드리지가 보여 주는 전쟁의 실상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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