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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들을 위해 이것만은 꼭 지켜야지

엄마, 아빠가 상의해서 육아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이 넷을 키우다 보면, 사람들이 종종 하는 질문이 있다.

"아이 넷을 어떻게 키우셨어요?"

이런 질문을 들을 때면 난 항상 웃으며

"정신없이 키웠어요"라고 대답을 하곤 한다.


지금에서야 웃으며 하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정말 무슨 정신으로 내가 살았나 싶을 정도로 살았고 솔직히 어떻게 키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기분은 '정말 힘들었다.' 이 한 줄의 문장으로 정리된다.


가족이 없는 곳에서 엄마, 아빠가 되어, 품 안에 안겨진 아이들을 키워내는 그 책임감이 나와 신랑을 여기까지 이끌어 왔다고 밖에는 다른 말로 우리의 시간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렇게 아이 넷을 겪으며 아이 넷이 커가는 모습을 보며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들이 현재 우리 아이들을 양육하는 잣대를 만드는 초석이 된 것 같다.


신랑과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철저하게 지켜왔던 것이 몇 가지 있다.

1. 핸드폰이나 태블릿 주지 않기

2. 책임감 어릴 때부터 알려주기


솔직히 첫 번째 전화기나 태블릿 주지 않기는 정말 지키기 힘든 일이다. 다행히 캐나다는 한국보다 느린 나라였고, 그 느린 나라에서 신랑과 나는 빠른 변화를 택하지 않고 천천히 생활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셋째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3G 핸드폰을 내 손에 쥐었으니 그때가 2011년이었다. 그전까지는 폴터폰 2G 전화를 썼었는데, 그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신기 방통 한 전화기를 늦게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0년인 현재까지도 우리 집에는 그 흔한 패드가 없다. 대신 이제는 고학년이 된 큰 아이가 학교 숙제를 하기 위해 필요한 컴퓨터를 허락해 주었다.


게임기도 지금껏 사주지 않다가 작년 겨울,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 주었는데 그 또한 매번 허락되지 않는 물건이다.

심심한 막내가 혼자서 책을 보며 종이접기를 시작했다. 만들어 준 매미는 사진을 잊어버리고 못 찍었다. 강아지와 곰돌이를 만들어 엄마 선물이라며 챙겨주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자면, 우리 집에 가장 철저한 규칙 중 하나가 '주말에만 티브이와 게임기를 허용한다'이다.  그것도 둘 중에 하나만! 이 철칙이다. 게임을 했으면 티브이를 보는 시간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제한은 우리 아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허락했고, 그 시간에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심심하면 책을 읽었고, 그림을 그리거나 색칠을 했고 만들기를 하거나 색종이를 접었다.

우리 아이들은 서점이 놀이터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가듯 서점을 보면 발걸음이 멈추어 진다.
잠자기 전, 넷이 모여 책을 읽는 모습을 항상 뿌듯하게 보곤 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대부분 자유롭다. 원하는 것을 하는 것에 내가 제한은 두지 않지만, 그 자유는 분명 제한적 자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선택에 대한 책임을 알도록 교육시켰다.

마카롱을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큰 아이에게 뒷 마무리까지 하라는 전제조건을 약속한 뒤 허락해 주었다.

아주 어릴 때, 풍선을 참 좋아하던 시기였던 거 같다.

잘 사주지 않던 풍선을 사줄 일이 있었던 날, 헬륨을 가득 머금은 풍선이 아이들 손에서 두둥실 떠오른 그날, 몇 번이고 아이들 손에 풍선을 쥐어주면서 놓치면 풍선이 날아간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수십 번을 알려주고 되새겨주며 한 가지 약속을 했다. 관리를 잘 못해서 풍선이 날아가면 다시는 사주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 날, 아이 넷 중 한 명이 잃어버렸나? 몇째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렇게 조심성 없이 까불다 풍선을 잊어버린 그 아이는 통곡을 하며 울었고, 그 우는 아이를 달래주며 약속했던 것을 상기시키고는 다른 풍선을 사주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가는 나이가 되었을 때도 나는 항상 스스로 물건을 챙기는 것을 가르쳤다. 학교에 필요한 물건을 잊어버린 날도 나는 절대 갖다 주지 않았다. 숙제며, 도시락이라도 말이다. 쫄쫄 굶고 오더라도 엄마의 일은 도시락을 싸주는 거고, 도시락을 챙겨서 잘 들고 가는 것은 학생인 우리 아이들의 몫으로 가르치며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결과를 내 도움으로 바꾸지 않도록 가르쳤다.


그 덕분인지, 아이 네 명 다 스스로 자신의 물건을 잘 챙긴다.


만 2~3살쯤 스스로 옷을 입고자 선택하며 노력할 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스스로 할 수 있게 내버려두었다.

어떤 옷을 선택하든 우선은 입게끔 해 주었다. 그리고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더라도 가끔은 놔두는 엄마였다.

그러자 더위와 추위를 스스로 느끼며 아침마다 문을 열고 그날 날씨를 체크하며 옷을 선택해 입는 아이들로 컸다.


우리 아이 넷은 스스로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한 번도 내 손으로 아이들의 옷을 입혀 준 적이 없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한국에 사는 내 남동생은 항상 이렇게 응수를 한다.

"누나, 그건 누나가 애가 넷이라서 그래."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한 아이를 세심하게 봐줄 수 없는 나의 현실이 이런 방목의 교육을 하게끔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친정 엄마는 한없이 챙겨주시는 엄마였다. 그런 나는 엄마의 보살핌을 너무 받아 마냥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던 거 같다. 그런 내가 어른이 되어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을 때, 움이 없는 가운데 놓였을 때 느꼈던 힘듦과 좌절이 너무 컸던 거 같다.


우리 엄마의 교육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랑을 주는 방법과 교육을 시키는 방법은 모두가 다른 것이니까 말이다.


아이들을 낳으며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죽으면, 애들 아빠가 죽으면, 우리 아이들은 기댈 언덕이 없어질 텐데, 친척도 조부모도 없는 이 땅에서 그들만 의지하며 살아갈 텐데..'

이런 마음이 드니 아이들을 그냥 나약하게만 키울 수 없는 나의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사랑으로만 키워도 아깝질 않은 우리 아이들이지만, 부모로서 제대로 된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한없는 사랑과 함께 무서운 엄마가 되어보기도 한다.


아마 우리 아이들이 성인의 첫발을 내딛을 때, 그 아이들이 하는 선택이 나와 우리 신랑의 교육을 인해 올바른 선택이 되기를 항상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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