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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히로쓰 가옥과 동국사

군산-전주 여행기 (5)

by memory 최호인

1. 히로쓰 가옥


초원사진관에서 나온 우리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아름다운 일본식 주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군산에 살던 부유한 일본인의 가옥인 듯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포목점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샤브로가 지은 집이었다.


히로쓰 가옥은 장방형 모양의 집 사면에 온통 창문이 많고 예뻐서 관광지로 변했다. 특히 2층 전면에 있는 넓은 유리창에 하늘과 구름이 반사되어서 더욱 눈에 띄었다. 2층 본채 옆에는 단층 객실이 있고, 그 사이에 아기자기하게 꾸민 일본식 정원이 있다. 관광객은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마당에서 주택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군산시 신흥동 일대에는 부유한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고, 그 흔적이 아직까지 이렇게 남아 있다. 사실 내가 어릴 때 자랐던 대방동 집도 원래는 예쁜 정원이 있었고 안방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었던 적산가옥이었다. 우리 집도 그랬지만 일본식 가옥은 예쁜 창문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적산가옥은 '적이 가지고 있었던 (재)산 가옥'이라는 뜻이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살다가 해방 후 정부에 귀속되었다가 일반인에게 불하된 주택을 말한다. 말하기 거북하지만, 이 일본식 가옥은 예쁘게 잘 지어졌으며,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일본식 고택에는 온돌이 없지만, 히로쓰 가옥은 우리나라 기후에 맞게 온돌을 놓았다. 이 가옥은 건립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서 건축사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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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국사


군산시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다니던 동국사다. 우리나라에 남은 몇 안 되는 일본식 사찰이라고 한다. 1909년 일본 조동종 승려 우찌다 스님이 포교소인 '금강선사'를 개찰한 후, 1913년 일본인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현 위치에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했다. 해방 후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1955년 불교전북교당에서 인수하여 동국사로 개명했다. 동국사로 개명된 것은 더 이상 일본인들의 사찰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나라 절'이란 말이다.


동국사 대웅전 건축 목재는 일본산 스기목을 사용했고, 지붕 기와도 일본에서 구워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사찰 규모가 작은 탓일 수도 있겠지만, 동국사 대웅전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일본 에도시대 건축양식을 따라 건물 외벽에 창문이 많고 지붕 용마루도 일직선으로 만들어졌다.


한증막처럼 뜨거운 8월 한낮의 대기를 뚫고 동국사로 들어갔을 때 나는 일단 그늘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대웅전 지붕 아래로 들어섰다. 사뭇 조용한 가운데 나의 거친 숨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대웅전 안을 들여다보니까 할머니 몇 분이 앉아서 차분하게 불경을 보고 계셨다. 나는 그 적막과 여유가 부러워서 땀을 닦으면서 조용히 입구 근처에 앉았다. 그러자 갑자기 소음이 사라지고, 주위가 무척 조용해졌다. 대웅전 불상이 땀 흘리는 나를 불쌍하다는 듯 응시하고 있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한 아주머니는 뭔가 절실해 보였다. 아무리 사찰이라고 해도, 적어도 나에게는 일본인들이 모여서 일본과 일본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일본식 사찰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에 약간의 심리적 동요가 일었다. 아무리 보편성을 주장한다 해도 종교에는 저절로 민족주의가 섞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곳에 앉아 계신 할머니들에게 현세구복과 내세구원을 비는 마음은 나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현재 주어진 초라하고 불쌍하며 고통에 휘감긴 운명 앞에서는 누구나 겸허해질 수밖에 없고, 없는 신이라도 앞에 놓고 빌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또는 험난하고 복잡한 이 사회에서 때로는 무념무상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종교가 인류사회에서 탄생하고 존재하고 살아남은 이유일 것이다. 불교인이 아니지만, 불상 앞에서 땀 흘리면서 앉아 있다 보니, 아주 잠시나마 나의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나의 미미함을 다시 느꼈다.


20180811_125605.jpg 동국사 일주문은 일반 사찰과 달리 민가 대문의 석주처럼 보인다. 오른쪽 석주에 새겨진 '차문불문'이란 '이 문은 문이 아니다'라는 뜻이며,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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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를 나서면서 혁국이 산사 스님들의 횡포에 관한 일화를 소개했다. 그가 지리산을 올라가다가 산사의 스님들에게 강제로 입산료를 냈던 일이었다. 그는 “불량배들로부터 삥을 뜯긴 듯했다”라고, 자존심 상했던 경험을 되새기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다시 생각해도 열받는가 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산으로 오르는 도로가 사찰 땅을 통과한다는 이유로, 스님들이 지나가는 버스를 세우고 올라타서 승객들에게 일일이 강제로 돈을 “삥땅”하는 바람에 관광객들이 분노했다는 것이다. 결국 반복되는 이 통과세 문제는 법정으로 갔고, 법원은 스님들이 불법행위를 한 것으로 판결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님들은 그 이후에도 여전히 통행료를 강탈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고 혁국은 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법원 판결이 나왔다면 이제 해결된 거 아니야? 왜 여전히 강탈한다는 거지?"


나는 법원 판결 이후에도 스님들이 계속 돈을 뜯어낸다면 경찰은 무엇을 하는가 물었다. 혁국의 대답은 간단했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는 것이다. 사찰 스님들이 관광객들에게 통행세를 거두는 것과 비슷하게, 공무원들은 각종 이권을 걸고 뇌물을 받을 것이라고 혁국은 덧붙였다. 위로 갈수록 더욱 타락한 공무원들이 더 큰 이권을 얻기 때문에, 스님들이 통행료쯤 받아내는 것을 가지고 뭐라 하겠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우리는 아무도 이견을 내지 않았고, 딱히 반박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뇌물과 부패가 일상화한 이 사회에서, 사람의 욕심이 그런가 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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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는 크기가 작고 도시 내에 있어서 그런지 일부 사찰과 달리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관광객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주차장이 없기 때문에, 사찰로 오는 자동차가 사찰 앞에 있는 식당 주차장에 주차하면,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는 한) 주차비를 내야 했다. 그것은 일견 당연해 보였다. 다만 그런 방식을 통해 사찰이 식당과 짜고 간접적으로 입장료를 거두는 것이라고 혁국은 설명했다.


하긴 유명 관광지에 있는 역사적 기념물 정도 되는 큰 교회가 아니라면 교회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료가 없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불교 사찰들이 입장료를 받는 정당한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또한, 이렇게 거두어들인 돈을 사찰이 얼마나 공개적으로 밝히고 정당하게 집행하는가도 의문이다.


하여간 종교기관 안에서 돈은 큰 문제다. 돈과 권력을 둘러싼 종교 내의 암투는, 진정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고난에 찬 현세에서 벗어나 지복의 내세를 찾아 초월적 세계를 염탐하려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20180811_130233.jpg 동국사 내에 특이하게도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1975년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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