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전주 여행기 (6)
여행을 떠나기 전에 계획 당시부터 나는 혁국에게 새만금 도로가 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새만금은 왠지 아픈 손가락과 같다.
지금은 조용해졌지만, 새만금 사업을 둘러싸고 환경 단체들이 정부와 싸우던 모습을 나는 기억한다. 거대한 간척 사업이었다. 길이 33.9 킬로미터에 이르는 세계 최대 방조제라고 한다. 이 방조제로 인해 군산과 김제, 부안군에 무려 401 제곱킬로미터의 육지가 탄생했다. 서울시 면적의 3분의 2에 이르는 크기다.
새만금은 김제 만경 평야를 ‘금만’평야라고 불렀던 데서 비롯되었다.
'금만'을 '만금'으로 바꾸고 새로 조성되었다 해서 새만금으로 되었다.
새만금 사업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해의 천연 갯벌을 없애고 환경오염을 유발할 것이라고 걱정했던 환경단체들은 이 사업이 진행되던 당시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벌였었다. 부안과 군산을 연결하는 방조제 설립 공사가 거의 완성될 무렵, 이 간척사업에 반대했던 도올 김용옥 선생이 물막이 방조제에 서서 바닷물을 바라보던 사진을 뉴스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매우 외롭고 쓸쓸한 사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 많았던 새만금 방조제를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방조제에 놓인 도로를 달리고 싶었다. 방조제 양쪽으로 펼쳐진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 도로를 달리면서 바다와 간척지를 보면 어떤 마음이 들지 궁금했다.
1991년 노태우 정부 시절 시작된 공사는 결국 노무현 정부에서도 이어졌다. 인간이 자연의 역경을 극복하면서 문명을 건설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4대 강 사업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처럼 대규모 간척 역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과를 미리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새만금 사업이 '건설 사업으로서는' 완성된 결과에 만족하고 있다. 앞으로 거대한 간척지에서 벌어질 대규모 발전 사업에 장밋빛 전망만 잔뜩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먼 훗날, 새만금 사업으로 나타나게 될 결과가 어떨지 나는 아직도 상상하기 어렵다. 거기에는 당장 거대한 이익이 걸려 있고, 특히 김제시와 부안군과 군산시가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상태에 있다. 정부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민주적으로 새만금에 조성된 '새 땅'을 관리한다고 해도 결국 그로부터 ‘해먹을 놈은 먼저 다 해먹을’ 것이란 두려움도 여전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연환경과 해양 생물과 생태계가 이 사업으로 인해 어떤 결과에 이를 것인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개발주의자들과 환경보호주의자들 사이에서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지만, 환경보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공공의식보다 개발주의자들의 탐욕을 탓하기는 훨씬 쉬울 것 같다. 공공자원과 자연환경의 개발 목적은 늘 사회적이고 거창해 보이지만, 한참 지나 보면 '있는 자들과 가진 자들부터 먼저' 이익을 채가지 않았던가.
드넓은 바다를 양쪽에 두고 일자로 쭉 뻗은 새만금 방조제 도로.
그 위에서 우리는 신나게 달렸다. 도로 양 옆은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시원했지만 무더운 대기가 습기를 잔뜩 머금어서 하늘은 뿌옇고 우리의 시야는 그리 멀리 뻗지 못했다. 물 건너 저 건너편 어딘가에 변산반도가 보여야 했지만, 8월 초 바닷물 위로 가라앉은 대기는 무겁고 흐릿했다. 서편으로 보이는 수평선마저 저 멀리 뿌연 대기 속에서 흐린 선으로 가물거렸다. 바다 위에는 이따금 작은 섬들이 점점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여행 시간을 고려한 결과, 우리는 새만금 중간에 있는 선유도로 진입하기로 했다.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나에게는 즐겁고 신나는 결정이었다.
선유도로 가기 위해서 원래 바닷물로 서로 떨어진 섬들을 다리로 이어놓자, 이제는 육지와 다름 없어진 섬들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또 개발 붐이 일었다. 섬이 가지고 있었던 본래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이전에는 들어오지 못했던 자동차들이 떼 지어 몰려왔다. 식당과 카페와 숙박업소가 늘어나고 새로운 개발 물결이 거세게 몰아닥치는 듯했다. 조용했던 섬들은 시끄럽고 부산해 보였다.
푸른 바다에는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는 조그만 섬들이 점점이 놓여 있다. 방조제로부터 건설된 다리는 신사도, 무녀도, 장자도, 고군산분도, 선유도를 모두 이어버렸다. 집라인이라는 것이 선유도 상공을 가로지르며 등장했고, 관광객들은 요란한 쇳소리 속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허공을 줄에 의지해서 날아다녔다. 아마도 섬마을 어부들만 있었던 선유도의 거리는 이제 관광객들을 호객하는 가게들로 넘쳐난다. 거의 온통 식당들이다. 그런 것을 좋아졌다고 해야 하나. 나는 그저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선유도가 속한 고군산군도는 유인도 16개, 무인도 47개가 온 바다에 흩뿌려져 있는 곳이다. 예로부터 서해를 통해 한반도로 진입할 때 변산반도를 돌아서 알짜 자리를 차지한 고군산군도는 내륙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 섬들 사이를 헤쳐 뭍에 도달하면 백제의 수도였던 익산이 바로 코 앞이다. 그러므로 고군산군도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과거에 선유도에는 작전 본부인 ‘군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름다워서 신선이 노닐 듯 보이는 선유도의 원래 이름은 군산도였다. 왜구들이 이 군사적 밀집지역을 돌아서 군산으로 바로 쳐들어가서 공격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군산진은 결국 군산 시로 옮겨졌다. 군산 시의 이름은 원래 진포였는데 군산도에서 그 지명까지 빼왔다. 그러자 원래의 군산군도의 이름은 고군산군도로 바뀌었다.
이름의 역사란 참 묘하다. 섬은 자기 이름까지 뭍에 빼앗겼으니 말이다. 항상 뭍에서 자란 나는 섬사람들이 육지 사람들에게 갖는 암묵적 적개심이랄까 하는 거리감을 이런 억압과 수탈의 역사를 통해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선유도는 그 한자 의미상 신선이 놀던 섬이다. 정말로 가서 보니,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그곳은 이제 관광객들에 의해 너무 시끄러워져서 신선이 더 이상 올 것 같지 않다. 대신 이익을 노리는 돈과 관광객만 흘러들어 올 것 같았다. 특히 선유도의 지리적 환경을 보면, 앞으로 해양 레저 산업과 해양 스포츠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나는 언제나 조용하게 옆 자리에 앉아서 더벅머리에 게슴츠레한 눈을 끔뻑거리는 상국에게 말했다.
“너 은퇴하면 전 재산 털어서 이곳에 땅 사라. 안동이나 삼척에 땅 사는 것보다 백 배 투자가치가 있어 보인다.”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던졌다. 한 주 전에 안동과 삼척을 여행한 내 눈에는 온통 적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보다 시원하고 아름다운 선유도 지역의 투자가치가 월등히 높아 보였기에 한 말이었다.
상국은 준 국영회사에 오래도록 근무했기 때문에 몇 년만 더 일하면 정식으로 은퇴해도 될 시점에 이른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은퇴하면 어디에서 살 것이냐고 묻기도 했었다. 물론 언제나 과묵한 그는 별말 없이 씩 웃기만 했었다. 그의 꾸밈없는 촌스럽고 소탈한 모습은 마구 솟아오른 머리카락들만 빼면 웃고 있는 하회탈을 닮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선유도를 돌아 나온 우리는 변산반도로 향했다. 제법 거대한 국립공원이다. 새만금 도로가 거의 끝나갈 무렵, 높다랗게 세워진 전망대가 보였다. 새만금 간척 사업의 역사와 전망을 담은 전시관이 있었다. 전시관 내부로 들어서자, 새만금 사업을 통해 얼마나 많은 (녹색) 성장이 있을 것인지 환한 장밋빛 전망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21세기 새만금 일대의 발전상이 한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전시관은 잘 꾸며져 있었다. 산업단지와 레저단지, 농지와 주거지, 수상시설 등 다양한 공업 및 문화 시설이 새로 간척된 땅에 들어설 계획이다.
나는 3층 전망대를 둘러싼 거대한 유리를 통해 드넓은 바다와 일자로 뻗은 도로를 바라보았다. 거기서 바라본 새만금 도로는 길게 뻗은 후 희뿌연 바닷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장엄한 광경이었다.
[알림] 앞서 밝혔지만 내가 이 여행을 했던 때는 2018년 8월이다. 그 이후 이 지역에 어떤 변확가 발생했는지 알지 못한다. 여기 올린 사진들도 모두 그때 찍은 것이라 지금과는 상당히 다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