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전주 여행기 (7)
변산반도 국립공원으로 들어선 우리는 채석강으로 향했다. 채석강은 외변산의 대표적 명소다. 채석강은 변산반도 서쪽 끝 격포항과 그 오른쪽 닭이봉 사이 1.5km 일대에 펼쳐진 층암절벽과 바다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그 절벽에는 책들이 수천수만 권 차곡차곡 겹쳐진 듯한 모습으로, 부서지기 쉬워 보이는 바위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오랜 세월 바닷물의 침식 작용으로 생겨난 이 바위 절벽은 중국의 채석강과 모습이 비슷해서 이렇게 이름이 붙었다.
채석강은 썰물 때면 걸어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는 밀물 때 도착했기 때문에 아쉽게도 바위 가까이 가서 볼 수 없었다. 대신 파도가 약간 일렁이는 너른 바위 위에서 흐릿한 바다를 등지고 사진만 찍었다. 태고의 시간을 디지털 사진 한 장에 담기를 원하면서 말이다.
절벽 아래로 내려간 우리는 파도가 일렁이는 바닷가에 있는 너른 바위 위를 걸었다. 저 멀리 옆에는 누런 모래사장이 있었고 그곳에 피서 관광객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관광 리조트 같이 보였다. 썰물 때면 그곳에서 우리가 서 있는 곳까지 걸어올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인 책 같이 생긴 부서지기 쉬운 바위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위 접근을 막는 긴 보호 줄이 쳐져 있었다.
우리는 그 바닷가에 잠시 머무른 후 나무 계단을 통해 절벽 위로 올라갔는데, 거기에도 역시 크고 작은 숙박시설들이 많았고, 식당과 카페들이 줄지어 있었다. 더위에 지친 우리는 절벽가에 있는 큰 나무 밑 바위 위에 앉았다. 눈앞에 드넓은 바다가 무심한 듯 거대한 유리처럼 잔잔한 모습으로 펼쳐져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문득 조용히 일렁이고 있는 서해 바다가, ‘너희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조용한 폭넓음이 전하는 의미를 나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괜스레 구차하고 왜소함을 느끼는 나는 그저 하염없이 희뿌연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비릿한 바다 내음이 나는 듯했다. 참 습하고 더운 날씨였다.
전북 부안군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은 내소사이다. 백제 무왕 34년 (633년)에 창건된 이 절은 원래 대소래사와 소소래사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대소래사는 언젠가 소실되었고, 내소사로 불렸던 남은 소소래사마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던 것을 인조 11년 (1633년) 다시 지었다고 한다. 내소사로 들어가는 거리에는 각종 식당들과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우리가 사찰로 들어갈 때쯤 멀리서 비구름이 몰려오는 듯 바람이 일었다.
일주문을 지나자 , 단풍나무 터널이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전나무들이 양쪽으로 멋들어지게 줄지어 서 있었다. 500미터 정도 길이의 아름다운 전나무 숲길이 끝나자 갑자기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멋진 바위산을 배경으로 내소사가 등장했다. 사찰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능가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바위산의 품 안에 싸여 있는 듯 아늑한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사천왕이 지키는 입구를 지나 사찰 앞에 이르자, 무려 1천 년 수령의 거대한 느티나무가 서 있어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렇게 오래 살아 있는 나무 앞에 서면, 우리는 경외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현대인인 나조차 그렇게 느끼는데, 옛날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그 나무에 신령한 성격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까마득하게 올라가도 그 나무의 수명을 따르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나무 둘레는 장정 7,8 명이 둘러서서 손을 맞잡아도 닿을까 의심될 만큼 거대했다. 또 봉래루 앞에도 수령 300여 년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보리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찰의 역사를 저절로 추정하게 하는 나무들이다.
그 나무들을 앞에 두고 사찰은 품위있게 자리 잡고 있다. 사찰이래야 거의 모두 비슷한 형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특이하다고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내소사는 정말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오래된 단청에 새로 색을 입히지 않아 매우 낡고 고풍스러운 모습이라는 것. 눈에 띄는 알록달록한 색깔로 장식한 단청을 보는 것은 나름대로 산뜻하고 사찰의 보전을 위해서 불가피하겠지만, 내소사는 아직 새롭게 치장하지 않은 모습이다.
나는 세월에 지쳐버린 그 희끄무레한 단청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소사의 단청은 언제부턴가 장구한 시간을 참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묵묵히 나대지 않고 무던한, 그 낡고 오래됨에 깊은 고마움을 표했다.
여느 사찰들처럼, 경내 대웅전 앞마당으로 가기 위해 통과하는 봉래루 기둥에는 긴 줄이 매달려 있었다. 그 줄에는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어 적은 쪽지들이 매달려 있었다. 대웅보전 안에도 많은 이름이 적힌 위패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런 식으로 사찰이 보전되고 운영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
사람들이 현세구복과 내세구원을 비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미천해서 아는 바가 없지만, 사찰에 있는 위패의 의미를 무시할 수도 없다. 돌아가신 분이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불자들을 욕보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모두 돈과 관계된다. 사찰이 돈 없이 운영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게 눈에 보이는 돈의 장식들로 치장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어쩌면 너무 드러내놓고 종교시설이 돈을 밝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장식을 통해 자기도 한 이름 올리도록 신도들을 자극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이름을 올리려는 경쟁과 부러움과 시기심을 유도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이름을 올리지 않으면 나의 신앙심이 의심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내가 사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수십 년 전 내가 어릴 때 보았던 사찰은 이런 식으로 돈을 끌어모으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제부터 이런 전통이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나의 눈에는 이런 명찰표와 위패들이 불교사찰의 종교적 품격을 낮추는 것으로 보였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교회에서도 신도들은 교회 직분이 오를 때마다 헌금을 (해야) 한다. 집사가 될 때, 또 장로나 권사가 될 때 각각 내는 액수도 다르다. 그것은 이미 많은 교회에서 오래된 전통이다. 교회와 이미 직분을 얻은 사람들이 새로 직분을 얻는 사람에게 일정 액수를 요구한다고 한다. 모든 교회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미 세금 종류만큼 많은 헌금 종류를 생각할 때 참 가슴 아픈 일이다. 헌금으로 죄 사함을 받았던, 종교개혁을 앞둔 중세 말기의 교회가 연상되는 것은 나만의 과도한 상상일까.)
내소사를 나오는데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전나무 숲길을 걸어 나올 때 비는 더욱 세차졌지만, 빗방울 대부분을 나무가 가려서 우리는 그리 심하게 젖지 않았다. 그만큼 전나무 숲은 울창했다. 나무들은 우리가 걷는 도로 위를 반쯤 가렸다.
얼마 전 한 친구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친구가 서울의 어느 궁전 숲길을 단체관람하고 있었는데, 해설사가 열심히 설명하던 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자 해설사는 그 숲길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면서 관람객들에게 전나무 숲길을 주제로 시를 읊어줄 테니 우산을 쓴 채 잠시 눈을 감고 들어보라고 했다.
그 시는 결국 사람의 목소리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였다. 그보다 아름다운 시가 있을까. 나도 잠시 눈을 감고 들었다. 전나무 숲에 내리는 비의 소리를. 나뭇잎들과 빗방울이 교감하는 소리를. 그 정겹고 고즈넉하고 아늑한 정취는 반드시 눈을 감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채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는 소리였다. 더운 공기로 익은 빗물 냄새가 전나무 내음과 함께 코로 스며들었다. 참으로 은은하고 향기로운 정취였다.
일주문까지 나온 우리는 거세진 비를 그냥 맞고 주차장으로 가기 전에 커피라도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세찬 비로 인해 일주문 바로 앞 카페 안으로 여러 사람이 들어섰다. 그 더운 여름에도 막상 비가 내리자, 나는 따뜻한 커피가 당겼다.
사찰과 아메리카노. 이제는 별로 낯설지도 않은 그 조합 속에 커피 향이 코를 자극했다. 카페 내에는 고객에게 판매하는 각종 토산품과 관광용품이 놓여 있었다.
어느 정도 비가 그친 후 우리는 주차장으로 나섰다. 차를 몰고 나오면서 바라보는 산 아래로부터 짙은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더운 공기에 내린 차가운 비로 인해 하얀 연기가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모습을, 차에 앉은 나는 기꺼이 얼굴을 돌려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비 개인 하늘은 다시 밝아졌고 우리는 이제 전주로 달려갔다. 남자 넷이 앉은 차 안에서는 그리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빨리 전주로 가서 거나하게 막걸리를 걸칠 꿈이나 펼치고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