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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과 전동성당

군산-전주 여행기 (9)

by memory 최호인

1. 전주현대옥과 콩나물박물관


간밤에 그렇게 많이 먹고 마셨어도 아침이 되자 우리는 다시 먹을 것을 찾았다. 이른 아침부터 식사를 하려고 나온 우리는 역시 혁국이 길을 안내해서 유명 맛집으로 향했다. 전주 현대옥이라는 식당이었다. 현대옥은 콩나물 국밥 프랜차이즈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유명한 본가가 바로 우리가 찾은 전주 현대옥이다. 역시 많은 사람이 일요일 아침부터 그 식당에 모여들었다.


CeLtviYtNWkQjqVzCCw9iLZ_rSvrIDbKsAPNFhAKoSHUYe9octT5bmWEz7RFkkq_1JUur7rN-s2BakGcsDsM42i7EEEbqc7si91aHJfnZp4rI1lsPJfttqVeIhL8obHpxIr5q-mZg44Dgyx8BwIsew 전주 현대옥 2층에 있는 콩나물 박물관에서 설명하는 토렴국밥


그러나 이 집은 특이하게 이층 전체를 손님 대기실로 활용하고 있었다. 아래층 식당 옆 계단에서 번호표를 빼 들고 올라가면 위층에 식탁과 의자들이 있고, 거기에서 번호를 부를 때까지 물을 마시면서 편하게 기다릴 수 있는 구조였다. 식당은 손님들이 그렇게 기다릴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도 자랑스럽게 광고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기다림의 품격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기꺼이 현대옥 식당 2층에서 꽤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더욱 특이한 것은 2층 한쪽에 ‘콩나물 박물관’이 있다는 것이다.


콩나물에 박물관이라니!


콩나물에 그 영광을 헌납한 현대옥은 확실히 특이했고, 콩나물에 무척 큰 의미를 선사했다. 콩나물 박물관이라는 그 낯선 물음 앞에 현대옥은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만의 콩나물 국밥 짓는 방법을 내보였다. 현대옥은 '토렴국밥'을 전문으로 내세운다.


현대옥의 인터넷사이트에 나온 소개에 따르면, 토렴국밥은 "뚝배기를 가스불에 끓이지 않고 밥, 콩나물, 신선야채(청양, 고추, 마늘)를 담은 뚝배기에 솥단지 속 끓고 있는 육수를 국자로 떠 담아내는 방식"이다. 계란은 국밥 속에 넣지 않고 수란으로 제공된다.


그러나 나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다.

이 음식점을 유명하게 만든 비결은 뭐니 뭐니 해도 콩나물 국밥의 맛에 있겠지만, 거기에 더해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밥, 반찬, 김 등을 제공하는 서비스도 음식 맛에 못지않게 손님을 끌어들이는 장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국밥 맛이 짜다고 느낀 나는 조금 먹다 말고 직접 가서 밥솥에서 밥을 퍼왔고, 김과 콩나물을 그릇에 담아왔다. 그래서 결국 두 그릇을 먹은 셈이다.


소식하는 성종은 겨우 한 그릇만 비웠다. 그는 하루에 두 끼만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얼굴만큼이나 몸이 가볍고 날렵했다. 반면 혁국은 말이 느렸고 배가 두툼했다. 말 없는 상국은 비교적 많이 먹는데도 배만 약간 나왔을 뿐이다.



2. 경기전


든든하게 아침을 먹은 우리는 전주 이 씨의 본향인 경기전으로 갔다.

전주 경기전 정전은 태조를 비롯한 조선 왕들의 영정을 봉안한 유적이다. 태종 10년(1410) 전주 이 씨의 본관지인 전주에 어용전이라는 이름으로 경기전이 들어섰고, 조선 태조의 어진(초상화)을 봉안했다. 세종 24년(1442)에는 각지의 어용전을 개칭하면서 전주의 어용전은 처음으로 경기전이 되었다.


조선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진전을 서울에는 문소전 한 곳에 두었고, 외방에는 전주의 경기전, 영흥의 준원전, 경주의 집경전, 평양의 영숭전, 개성의 목청전 등 다섯 곳에 두었다.


5PraloOncXMWamTmqxVOoIwUOOmW5CPhYGbrtg4UtWluF2jwgrfXCtGdXclqCUA-S5V_YWcmY032ErHLZ2fW_dFiHvl6aa_Y8RNfeBC4X3Qu4-GXpQe4imUPemBxseOATpdx-_wZfJXp5W4THtYw2g 경기전 입구


그러나 임진왜란(1592년) 때 경기전과 영흥 준원전을 제외한 다른 곳은 모두 불탔으며, 정유재란(1597년) 때는 경기전마저 소실되었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경기전만 중건되었다.


조선 국조의 얼굴이 화폭에 담겨 유리 뒤에 보였다. 태조의 어진은 어지러운 전란들에서도 살아남아 오늘날 우리 눈앞에 여전히 살아있는 듯 보였다. 어진 원본은 영조 39년(1763)에 수리를 거치고, 고종 9년인 1872년에 원본 그대로 복사되었다.


태조 어진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총 26점이 제작되었지만, 모두 소실되고 현재는 이 경기전 경내의 어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만이 유일하게 현존하는 어진이다.


20180812_105103.jpg 경기전에 봉안된 조선태조어진


그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전란으로 시달렸는지, 또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보물이 사라지고 인명 피해가 발생했는지 충분히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어진이 그려진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수많은 전쟁이 이어지고 다양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지만, 그 그림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한 선조의 손길에 참으로 경이로움을 금할 수 없다.


경기전에는 어진 이외에도 조선 왕들의 친필 문서 등도 많았다. 그들의 일상과 책임과 의무 등을 생각해 보면 옛날 왕들은 우리가 어릴 때 상상했던 것과 달리 그리 편하지만은 않은 자리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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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동성당


경기전에서 지척 거리에 전동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때 사형된 신도들의 순교터에 세워졌다. 정조 15년(1791) 조선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이곳에서 사형당했다. 이후에도 순조 때 신유박해 때도 호남 지역의 많은 천주교 신도가 순교한 곳이다. 이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1891년 프랑스 보두네 신부가 민가를 매입하여 임시 본당으로 삼았고, 1908년 성당 건립에 착수해서 1914년에 외관 공사가 끝났으며 1931년에 완공됐다.


전동성당은 서울 명동 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설계했다. 이 성당은 호남지역에서는 최초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담은 건물로 지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전동 성당은 명동 성당을 닮았다. 하늘 높이 우뚝 솟은 둥그런 교회탑의 돔이 매우 멋있게 보였다. 전동성당은 인근에 있는 풍남문의 허물어진 성벽에서 돌을 뜯어 와서 성당의 주춧돌로 삼아 건설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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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_103631.jpg 전동성당 전경. 성당 입구에서 한 신부가 사진촬영 중이다.



우리가 전동 성당에 들어섰을 때 마침 일요일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아쉽게도 성당 안을 볼 수 없었다. 성당에는 미사를 보러 오는 신도들이 있었는데, 결혼식이 있었는지 한 여인이 하얀 색깔의 신부 드레스를 입고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의식해서 그런지 신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포즈를 취했다. 그렇게 어색하지만 사진촬영을 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순수해 보였다.


“참, 꿈에 부풀고 좋을 때다.”

하필 일요일 미사 시간에 성당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신부의 모습이 어색해 보이기는 했지만, 전동성당이 그만큼 결혼사진을 찍는 장소로도 유명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어여쁜 신부가 사진을 찍고 있는 교회 마당에서 나는"오래전에 우리도 저렇게 풋풋한 시절이 있었지"라고 혼잣말을 했다. 우리는 어색한 모습으로 두리번거리면서 사진만 찍고 나와서 근처에 있는 한옥마을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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