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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May 25. 2024

LP, CD, 그리고 종이책

디지털 시대의 손글씨 6

1.


80386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나는 내가 쓴 글, 즉 컴퓨터 용어로는 '파일'들을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담아서 보관했었지요. 플로피디스크가 뭔지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런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해도 헷갈리겠지만, 이동식 저장장치라고 하면 제일 간단할 듯합니다.


요즘은 이동식 저장장치로 주로 USB 드라이브 등을 사용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그런 게 없었고 제법 큼지막한 그러나 얇은 플라스틱 판처럼 팔락거리는 5.25인치 플로피디스크를 사용했었습니다. 거기에다 파일을 저장할 수 있었는데, 디스크 용량이 너무 적기는 했습니다. 더욱이 파일 저장 부문이 손에 닿기도 하고 부러질 듯 매우 약해서 디스크를 이동하거나 보관하기가 불편했습니다.


훗날 5.25인치짜리에 비해 더욱 작고 단단한 3.5인치 플로피디스크가 출시되었을 때 나는 그것만 해도 대단한 발전이라고 감격했었습니다. 가지고 다니기가 너무 편해졌고 용량도 커졌으니까요.


2.


그러나 80년대 말에 CD가 등장했습니다. 더 많은 파일을 저장하고, 소프트웨어들도 거기에 담겨서 판매되었지요. 컴퓨터가 더 큰 용량의 저장장치들과 CD ROM까지 처리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드디어 사진들을 컴퓨터에서 보고 음악을 컴퓨터에서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전자 앨범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수십 년간 익숙했던 전축과 LP의 시대에서 드디어 벗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미 70년대부터 사용되었던 카세트테이프는 빠르게 소멸했고, 라디오와 카세트테이프를 들을 수 있었던 붐 박스도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거대한 스피커를 갖춘 전축을 만드는 회사들과 LP를 파는 많은 가게들이 돌연히 망해 갔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고 있었던 겁니다.


LP판을 모아서 전축을 통해 음악을 듣던 시절에서 CD를 손에 들고 다니는 CD 플레이어를 통해 듣는 시절로 옮겨간 것처럼, CD 플레이어마저 컴퓨터, 그리고 인터넷 기기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CD 음악 파일이 MP3로 옮겨가면서 CD마저 사라져 가는 순간을 맞게 될 줄이야!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에 퍼스널 컴퓨터를 통해서 CD 음악을 컴퓨터에서 들을 수 있게 되자, 수많은 CD 가게들이 생겨났고 다양한 CD를 구매하는 열풍이 불었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음악파일, 나아가 비디오파일마저 간편하게 전송되고 즐겨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CD의 시대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저물었습니다. 과거에 LP들이 그랬던 것처럼, 음악 CD들도 자주 사용되지 않고 장식장만 차지하게 되었지요.


LP들이 사라지던 풍경은 CD들에서도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사하고 청소할 때마다 무겁고 자리 차지한다고 힘겨워했던 LP와 CD 더미들은 거의 모든 집에서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쓰레기로 버린 집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전히 아날로그 감성을 사랑하고, 오래된 것이 좋다고 믿는 마니아들에게, 특히 LP는 여전히 사랑받고 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에서든 '옛것'을 남다르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지요.


LP와 CD가 사라졌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깊은 아쉬움이나 후회는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LP와 CD들이 제공했던 음악의 사용가치는 인터넷에서 더욱 풍성한 축복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왔으니까요. 나아가, 한때는 엄격한 저작권 문제로 갈등을 빚고 사용이 제한되었던 각종 디지털 파일들이 인터넷에서 드디어 '해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토록 풍성한 문화예술 콘텐츠는 거의 무료로, 거의 무제한으로, 거의 아무 때나, 거의 아무 곳에서나, 그리고 거의 누구에게나 이용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종이책'은 어찌 될 것인가?

음악이나 미술 등 다른 예술에 비해 내용과 형식의 특수성이 있기도 하고, 더욱 엄격하고 보수적인 장르로 여겨지는, '책'은 아직까지는 전통적인 시장 방식으로 잘 버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종이책을 사랑하고 종이 책을 사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직까지는 종이책의 위력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미 종이로 제작되는 신문이 사라지는 위기감이 현실화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강 같은 작가는 종이와 인쇄가 주는 힘을 여전히 굳게 믿고 오히려 종이책이 부활할 것이라는 신념까지 펼치기도 했으니까요.


사실 나 역시 책에 관한 한,  아직까지도 디지털 책보다는 종이책을 선호하 편입니다. 디지털 글자들이 주는 비인간적이고 단조로운 밋밋함에 비해 종이가 물리적으로 나에게 안기는 후각과 촉감, 종이 위에 인쇄된 잉크의 냄새, 종이책을 바라보는 시각과 부피감, 종이를 넘기면서 즐길 수 있는 청각, 종이 위에 줄을 그을 때 느끼는 시각과 청각 등을 좋아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종이와 종이책이 주는 감각들에 중독된 사람들은 디지털 책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하는 여러 추억과 까닭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LP나 CD들이 그랬던 것처럼 꽤 부피가 있는 종이책들이 주는 만족감과 위용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장에 진열된 책들은 내용이 주는 사용가치 외에도 부피와 진열이 주는'과시'적 욕망도 만족시켜 줍니다. 또한, 디지털 파일에서 원하는 내용을 찾아서 이용하는 것에 비해 종이 책을 이용하는 것을 편리하게 느낄 때도 많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책'을 두고 했던 말도 생각납니다. 과거에 어떤 TV 강의에서 그는 책장에 잔뜩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볼 때마다 박학다식한 지성인들이 열병식을 벌이고 있다는 식으로 말한 바 있습니다. 길게 정렬된 책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 책들의 저자들과 교감하고 대화한다는 자족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책들이 주는 시각적 공간적 위력감이 연구하거나 학문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탓하거나 채찍질하기도 합니다. 그 책들이 모두 조그만 디바이스 안에 있거나 인터넷에서 제공된다면 그런 즐거움이나 두려움을 느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도 그런 느낌과 감정과 생각을 모두 이해합니다.


그러나 단지 시간적 문제일 뿐, 어쩌면 그 책들도 LP와 CD가 겪었던 운명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종이 책에 비해 전자책이 앞서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는 이제 '디지털 혁명'의 초입 단계에 있을 뿐입니다.


4.


요즘처럼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는 시절에는, 먼지들이 잔뜩 쌓여 있고 누렇게 바랜 채 퀴퀴한 냄새나 풍기는 책들이, 어찌 보면 오래전에 죽은 미라들과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래된 책들이 담고 있을 선열의 노력과 지식에 대한 감격이 없는 사람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모든 책들이 유익하지는 않을 테고 전혀 쓸데가 없거나 유해한 것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인간사회의 행복과 책들이 그다지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매우 잡다하고 일시적으로 유행하거나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서 보는 책들을 냈다고 폼 잡고 자부하는 지식인들이나 작가들의 공연한 거들먹거림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때로는 그렇게 철부지와 같은 오만한 꼴을 보기가 불편하니까, 보통 사람들로서는 그까짓 '파지더미'들에 대한 무시와 경멸감을 표하는 것도 어느 정도 필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헌책방에 쌓인 책들. 이 책들이 쓸모없는 파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들은 다만 '짝'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책들 중 대부분은 결국 짝을 찾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쓸모없고 유행이 지난 옷들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책들을 볼 수도 있지요. 막대한 분량의 종이책들이 안 입는 옷이나 사용가치가 떨어진 가구와 같다고 이해하고, 오랫동안 그것들을 끌어안고 있기만 하다가 결국 버리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매우 고민해서 책을 샀을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눈에 거대하게 쌓여 있는 책들은 고물상에 쌓여 있는 파지더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되는 겁니다. 시골집이라면 아궁이에 사용할 불쏘시개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지요.


(불쏘시개로 쓰려고 했던 종이를 언급하니까, 갑자기 성경 사본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해문서'가 생각나는군요. '쿰란 문서'라고도 불리는 사해문서는 사해 서쪽에 있는 쿰란 근처의 동굴에서 1946년에 발견된 고대 히브리 성경 문서입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총 11개 동굴에서 900여 편에 이르는 다양한 종교 문서가 두루마리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그 문서들은 대략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베두인 유목민이 양을 찾기 위해 동굴 안으로 돌을 던졌다가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2천 년간 봉인되었던 문서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뜬금없이 사해문서를 말하는 것은, 우리가 언뜻 불쏘시개로 사용할 수도 있는 종이 뭉치가 실제로는 막대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서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예전에 요강으로 사용하다가 깨트리거나 버렸던 자기가 이조백자였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야말로 과거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종이의 홍수'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때로는 나 역시 너무나 많은 인쇄물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실은 파지더미이고 쓰레기이며 공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수한 수험용 참고서적들과 광고 잡지들과 허무한 이야기 책들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물론 그중 일부는 훗날 우리 시대의 문화적 지표가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옛 추억을 자극하는 매체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나아가, 나는 많은 책들을 글자들을 통한, 글자들에 의한 '권력'의 문제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글자는 곧 권력이고 가진 자들의 사치이고 권력의 수단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는 겁니다. 이 부분은 아직 깊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지식이 과도한 권력이 되어 상대적으로 '무식한' 사람들을 억누르는 수단이 될 때가 많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책이 그렇다면, 오디오와 비디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글자들의 공해와 마찬가지로 시청각 파일들의 공해도 엄청납니다.


사사키 아타루가 문학이 곧 혁명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과거에 문학이 부족하고 문학이 소수의 손에만 집중되었던 시대에 대한 해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학이 지나치게 넘쳐나는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문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이에 관해 나는 아직 어떤 결론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저 사색의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하여간 오래전 손글씨에 대한 추억을 언급하다 보니...


사실 근래에 나는 킨들이라는 디바이스로 또는 스마트 폰을 통해 디지털 책들을 자주 보기는 합니다. 그런 기기를 보면 답답함이 있고, 눈이 아픈 것도 사실이지만, 매일 휴대폰을 끼고 사는 사회에서 그 '편리성'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용기를 내어 이미 수많은 CD들과 종이 책들을 버렸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 종이 책들을 껴안고 고민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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