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mory May 04. 2024

"너는 네 글씨를 읽을 수 있냐?"

디지털 시대의 손글씨 3

1.


(핀란드에 있는 K선배가 보낸 편지에 오래전에 사용했던 PC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서 예전에 사용했던 컴퓨터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나도 '얼리 어답터'였고, 내 분수에 맞지 않는 거액을 들여 2,3년마다 새 PC를 사들였었다. 나의 손글씨에서 시작한 이 글은 그 편지에 대한 답장도 포함하고 있다.)


형이 쓴 글을 보니까 내가 이민 초에 사용했던 386 컴퓨터가 생각납니다. 인텔사에서 만든 중앙처리장치 모델 이름이 '80386'이라서 그렇게 불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80년대 중반, 부모님을 졸라서 내 주제에 맞지 않는 거금의 컴퓨터를 구매했지요. 따지고 보면 컴퓨터를 전공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개인적 용도로는 컴퓨터의 실용성이 거의 없었는데 과소비했다는 후회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는 나름대로 얼리 어답터라서 나는 새로운 기기에 관한 탐욕을 그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그 PC 이야기에 앞서 타자기에 관해 말해야 할 듯합니다. 386 컴퓨터가 나오기 이전에 나는 타자기를 먼저 사용했으니 말입니다.


나는 손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미술 시간에 그림 그리기나 공작 같은 것을 잘하지 못했고 특히 손글씨는 엉망입니다. 그 때문에 일찍부터, 즉 고등학생 시절부터 타자기를 사용하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대학 입학 전 겨울에 드디어 타자기를 샀으니, 나의 타자기의 역사는 제법 오래되었지요. 어쩌면 내 친구들 가운데 가장 먼저 타자기를 사서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2.


원래 초등학교 시절에는 일부 잘난 애들 빼고는 다들 삐뚤빼뚤 손글씨가 엉망이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벼루에다 먹 갈고 한지에다 쓰는 붓글씨를 배울 때만 해도 글씨를 크게 써서 그런지 내가 글씨를 그렇게 못 쓴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중학교 들어가서는 나의 손글씨가 엉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빨리 쓸 때는 나도 모르게 어깨와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고 연필도 꼭 잡고 써서 그런지 글씨 쓰기가 힘들었어요. 한 번 잘못 든 습관은 고쳐지지 않고 내 몸에 배었지요.


연필을 꽉 잡아서 가운데 손가락 끝마디 왼쪽 부분 살이 굳잖습니까. 그렇게 살이 굳을 정도라면 어쩌면 연필을 잡고 열심히 공부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필경 연필을 너무 꽉 잡아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연필을 조금 살살 잡으면 괜찮았을 법도 한데 나는 나쁜 습관을 영영 고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 그때 누군가 나를 잘 붙잡고 글씨 쓰는 방법을 고쳐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연필을 살살 잡고 몸에 힘을 좀 빼고 글씨를 쓰면 좋았을 것을...

몸에서 긴장을 풀고 글씨를 쓰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연필을 꽉 잡고 힘주어 눌러써도 글씨가 멋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선생님이든 누구든 나의 글씨 쓰는 방법에 관해 조금 더 세심하게 신경 써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결국 내 글씨는 그렇게 굳어졌고, 급기야 못 쓴 글씨로 선생님으로부터 혼나기도 했으니 참 한심한 일이었습니다.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 노력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희한하게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의 글씨를 보면서 붓글씨 쓰듯 어른스럽게 써보기도 하고, 여학생 글씨처럼 귀엽게 써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내 글씨는 대체로 어린아이들이 쓰는 글씨 모습으로 정착되었고, 더 이상 발전할 기회를 잃었지요. 결국 남들로부터 글씨를 못 쓴다는 말을 듣고 나 스스로도 못 쓴다고 생각하니까, 시간이 갈수록 글씨 쓰기가 더욱 싫어졌습니다. 손글씨 쓰기의 악순환이 반복된 것입니다.


글씨가 엉망이라고 선생님으로부터 지적당했던 것은 중2 때였습니다. 그때 기술 과목 담당인 나의 담임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백묵으로 칠판에 쓰기 귀찮다고 하면서 자기는 읽을 테니 우리에게 받아쓰라고 했습니다. 물론 느릿느릿 읽는 게 아니라 정말 빠르게 읽었기 때문에 우리는 받아 적느라 힘들었고, 특히 나는 정말로 괴로웠지요. 학기 초 어느 봄날 수업시간에도 여느 때처럼 그 선생님은 자기 노트를 줄줄이 빠르게 읽었고 우리는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받아 적기에 급급했는데, 내 공책에 적힌 글씨는 내가 봐도 읽기 어려운 상태라 난감했습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받아 적기를 하던 중 하필 선생님이 내 곁을 지나가다가 언뜻 내 공책을 보더니 말했습니다.


"그게 글씨냐? 너는 니가 적은 글씨를 읽을 수 있냐?"


선생님은 아이들 앞에서 내 글씨가 얼마나 한심한지 그렇게 핀잔만 주면서 지나갔고,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지기만 했습니다. 공책에는 내가 봐도 읽기 어려운 글씨들이 춤추고 있었지요. 글씨를 빨리 쓰지 못해서 여러 군데는 빈칸으로 남겨두고 건너뛰었는데, 그런 부분은 나중에 친구의 공책을 보고 다시 채워 넣곤 했습니다.


그 웃기지도 않은 사건 이후 나는 필기를 개선하려고 노력을 더하기는 했지만, 내 손글씨 상황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쓰면 그런대로 참고 볼 만도 하지만 조금만 빨리 쓰다 보면 곧바로 엉망이 되어버렸으니까요.



나는 나의 무능만 확인하고 손글씨를 개선하려는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결국 나는 손글씨 개선 의지가 많이 꺾인 채, 가능하면 손으로는 간단한 단어로 요점만 적으면서 주로 머리로 정리하고 외우는 일에 집중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가능해졌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고등학교까지는 선생님이 칠판에 적는 것을 무조건 따라 적어야 하고 그것을 잘 외워야 시험을 잘 보던 시절이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대학에 올라간 후에는 교수의 말을 그대로 따라 적기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정말로 웬만해선 쓰지 않겠다는 심보를 가졌지요. 그 대신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을 잘 듣고 머리에서 정리하고자 했고, 가능하면 오래도록 외우고자 했으며, 굳이 적어야 한다면 나중에 요점만 적으려고 했습니다. 머리에 뭔가 떠오를 때마다 최대한 수첩에 적어 두라는 선인들의 가르침을 수없이 들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손글씨는 내가 남들 앞에서 피하기 급급한 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고, 내 인생에 참으로 풀기 어려운 커다란 난제였지요. 나는 누군가의 앞에서 손글씨를 쓰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럴수록 손글씨는 더욱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했고요. 내가 말하는 것을 듣다가 내 글씨를 보면 상대방이 갑자기 나를 다시 보게 될 것만 같았지요.


교수가 말하는 내용을 받아 적기 힘들고, 나아가 받아 적기가 싫기도 해서 나는 시험 기간이 되면 가까운 친구들의 공책을 빌려서 필기 내용을 복사하느라 바빴습니다. 다소 처량한 일이었지만, 나는 넉살 좋게 친구들을 찾아가서 노트들을 빌려서 복사하고, 나름대로 책을 읽고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시험 예상문제들을 뽑았으며, 그 문제들에 대한 내 나름의 예상 답안을 적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시험을 준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일단 그렇게 예상 답안지가 작성되면, 그것이 몇 장이든 외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요. 시험 두 시간 전까지 예상 답안지를 완성하면 나는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열 장이라도 다시 적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아니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우리가 대학 다닐 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는 방식이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참 원시적이고 단순하고 어설펐던 과정이었고, 진정으로 학문을 닦고 쌓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과정과 결과였습니다.


(사실 그러한 이유로, 내가 강의 시간에 필기를 등한시한 것도 있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중고등학생 때처럼 교수가 어떤 '문제'에 관한 '정답'을 칠판에 적어주고, 학생들은 그저 그 내용을 아무 비판의식도 없이 열심히 적고 외워서 시험 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내 나름의 '학문에 대한 해석과 접근' 철학이 있었으니까요.


대학생으로서, '학문'에 관하여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던 듯합니다. 교수는 수많은 자료와 해석 가운데 하나의 '전례'를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학생들은 각자 나름대로 자료를 조사 연구하며, 각자 나름의 해석과 논리로 '답'을 구성하는 것이, 그래서 각자 다른 정답을 제시해도 괜찮은 것이 대학에서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저 교수가 가르치는 것만 잘 외워서 시험 답안을 쓰는 일은 대학생이 할 일이 아니고, 학문에 대한 올바른 접근도 아니었다고 나는 믿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겨우 세 달에 불과한 한 학기에, 더구나 학부 학생으로서 쉽게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3.


하여간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인데, 대학에 들어간 후 나의 손글씨는 고등학생 때에 비해 오히려 퇴보하고 말았습니다. 아마 더 이상 받아 적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점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일 것이고, 나의 손글씨는 이미 굳어진 후라 그럴 것입니다. 참으로 애처롭고 가련할 정도로 손글씨가 엉망이었던 나는 그로 인해 일찌감치 '타자기'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타자기를 사용한다면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글을 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직 퍼스널 컴퓨터가 시장에 나오기 전, 나는 '공병우 식' (세벌식) 수동 타자기를 구입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가장 유행이었기 때문이지요. 책상 위에 타자기를 놓고 두 손을 올려서 자판을 탁탁거리면서 우아하게 글씨를 쓸 수 있게 된 것은 다소 시끄럽기는 했지만 참으로 멋있었지요.


다만 공병우타자기에서 글을 쓴 후 글자를 고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한번 타이핑하면 다시는 고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타이핑하여 잉크가 찍힌 종이에서 틀린 글자를 흰 잉크로 덮어 지우고 그 위에 새로 손으로 수정한 글씨를 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타자기로 작성한 문서는 손으로 쓴 것에 비해 공식적이고 권위가 있어 보였습니다. 또한 내 이름만 쓰지 않는다면 내 글을 누가 쓴 것인지 타인들은 알기 어려울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글씨의 '탈개인화, '정형화' 또는 '규격화'가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타자기의 시대를 맞아서, 나는 공식 문서에서는 더 이상 나의 손글씨를 보여주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안도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식 기계의 시대를 맞아, 드디어 글씨에 있어서도 더 이상 글씨에 '인성'이 담겨 있다는 식의 '헛소리'를 듣거나 말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글씨에 한 개인의 성품과 재능과 실력이 들어가 있고 그것들이 글씨를 통해 온전히 드러난다는 식의 말을 어릴 때부터 자주 듣지 않았습니까. 글씨를 못 쓰는 나는 한편으로는 그런 말로 인해 마음을 다치고 혹시라도 나의 인성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되새겨야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말을 인정하기 싫었고 잘 믿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의심했지요. 설마... 글씨에 무슨 그렇게 많은 것이... (글씨와 인성 사이에 상관이 별로 없다는 것은 손글씨를 더욱 멀리 하게 된 요즘 학생들 글씨를 보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붓글씨가 학문에서 또 지적 세계에서 매우 중요했던 과거 시대가 있었던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그것 또한 학문과는 거리가 먼 대부분의 민초를 제외시키고 일부 식자층에서만 자신들의 유희적이고 과시적인 덕목으로 했던 말이 아닐까요. 그때는 붓글씨가 거의 유일한 기록 수단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개인의 글씨보다는 인쇄와 출판이 중요해지는 현대사회에 들어서부터는 더 이상 거론할 내용이 아닌 듯합니다. 대중교육과 대중매체 시대에 해묵은 글씨와 인성의 상관 타령이나 하고 있을 필요가 있나 싶었지요. 붓의 시대를 지나 여전히 연필과 펜의 '과도기'를 거치느라 그런 타령이 남아 있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미리 말하자면, '글씨의 미래'는 전혀 달라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또한, 어릴 때는 몰랐지만 크고 나서는, 손글씨를 엄청 잘 쓰는, 그러나 '멍청하고 나쁜 인간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요. 예전에 나라를 망치고 팔아먹은 수많은 인간들 가운데도 글씨를 품위 있게 잘 쓰고 주변을 잘 가꾸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요. 그들의 고매하고 품격 높은 글씨에 과연 그들의 저질스럽고 사기꾼스럽고 음흉하고 잔혹한 성품이 드러나 보였던가요.


그래서 오늘날 손글씨는, 더 이상 한 인간의 인성이나 품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대적 국민교육과 대중매체 시대에 필요한 교육과 소통의 한 '전통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컴퓨터와 스마트폰과 인공지능 시대의 손글씨는, 여전히 잘 쓰는 사람에게 분명히 세련된 간편함과 신속함과 편리함을 제공하긴 하지만, 더 이상 거기에다 인간적 숨결이나 인성까지 덮어 씌우기는 어렵게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나처럼 손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사람보다 차라리 잘 쓰는 사람이 하면 훨씬 설득력이 있을까요. 나처럼 손글씨가 엉망인 사람이 말해서 공연히 자기 합리화하는 불쌍한 '변명'으로 여겨질까 싶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기와 편지를 사랑했던 날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