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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Sep 07. 2024

김훈 소설, '흑산'에 나오는 기도문에 관하여

'기도'에 관한 작은 생각 (3)

7.


시대가 변하고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는, 더욱 확실하게,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는 것을 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예수 사후 2천 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여전히 돌아온다고 말했던 예수를 지상에서 물리적으로 만나는 것을 계속 우기는 것은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하여, 기독교인들은 마태복음 6장에 있는, 예수가 가르친 기도문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e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King James Version, 1611)


여기에 나오는 문구,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인들은 보통 “주의 나라가 임한다”, 또는 ‘이뤄진다’라는 말로 많이 표현합니다.

단,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지상에서도”.


이것은 우리가 주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의 나라가 천국에서 이뤄진 것처럼 지상에 있는 우리에게 오는 것임을 명백하게 표현합니다. 그것을 간구하는 기도를 예수가 일찍이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론가 가서 누군가로부터 구매하거나 받아내야 할 천국행 티켓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주체가 되어 주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문을 열어놓으면 된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면 그에게 지상에서도 주의 나라가 임재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 이 땅에서 이뤄질 주의 나라의 실체라고 한다면, 물리적으로 해방될 공간과 시간과 말세를 꿈꾸던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또한 성경 전체와 예수의 행적과 그가 남긴 기도문에 관한 해석 나름이므로, 여러분은 나의 명석하지 못한 해석에 찬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통일된 뜻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충되는 문구들과 다양한 묵시록적 기록으로 여러 해석을 가능하게 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기독교 내부에서도 지난 수천 년간 전쟁을 하면서까지 서로 다른 해석으로 분열하고 싸워왔던 것 아닐까요. 기독교는 곧 분열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하여간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8.


이렇게 어려운 문제에 관해, 성경이나 기독교에 관해 잘 모르는 내가 자세하게 또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안 되니까 이쯤 해두겠습니다. 김 00이 나에게 던진 질문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도 못한 채, 오로지 일전에 소설 '흑산'을 읽은 것을 언급한 이유로, 혹시 나에게 ‘기도’에 관해 물어본 것인지 해서, 나름대로 성의껏 대답하다 보니 말이 자꾸만 번지고 있습니다.


나는 어릴 때 교회를 다녀도 기도는 잘 못하고, 항상 의심하고 회의했습니다. 나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처럼 여겼습니다. 기도한다고 오랜 시간 꿇어앉아서 중언부언하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절대자 신이라면 이미 알고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으면, 기도할 때 더욱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도대체 다 알고 있다고 하는데 왜 말을 길게 하는가. 


나는 부활한 예수의 몸에 못과 창으로 난 자국을 손가락으로 확인하고자 했던, 합리적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듯 보이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도마의 의심과 확인과정을 높이 평가합니다.


안 보고 믿으면 더 좋은 것처럼 말하지만, 나는 도마처럼,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쉽게 따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욱 확실하게 현실적이고  감각적으로라도 확인하고자 하는 태도를 존중합니다. 직접 보거나 경험하지 않고 믿기 시작한 사람은 나중에라도 '그래 내가 직접 보거나 경험한 적은 없지'라고 생각하면서 돌아설 수도 있지만, 이미 손으로 확인까지 한 도마는 그럴 의심이 생기지 않을 테니, 그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경험을 믿고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그런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도록 태어났습니다.


예수가 부활했다고 전해 들었는데도 베드로를 비롯해 예수의 열한 제자 가운데 부활을 진짜로 굳게 믿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본 적도 없는 부활을 어찌 믿으라고 하는지... 그리하여 예수가 굳이 의심 많은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서 자신이 부활했고 이렇게 너희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한 후에야 '승천'했다는 것 아닙니까. (마가복음 후반부)


과학기술의 시대인 현대에 사는 우리는 그 누구라도 도마처럼 그리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눈앞에 본 대로 이해하기보다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는 듯합니다. 나아가, 보지 않고 듣지 않은 것도, 마치 보고 들은 것처럼 생각하거나 말할 때가 많습니다.


하물며 인간은 때때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데, 안 보고 믿으라고 하면 더욱 난감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믿어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하고 신기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믿어진다’는 확신도 축복이라면 축복일 겁니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라는 식의 문구를 나는 지금까지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속된 말로, 구해서 얻어진다면 인간 세계에 얻어질 게, 아니 얻어져야 할 게 한두 가지이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너무 간절해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바라고 구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바란다고 해서 우리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거기에다, 그렇게 애절하게 바라는 바를 구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구하되 우리 뜻이 아니라 주의 뜻에 맞게’라고 조건을 건다면, 그것은 주의 뜻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대단히 실망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도대체 이 땅에서 누가 주의 뜻을 잘 알고 있겠습니까. 인간세상의 역사적 경험으로 말한다면, 신의 뜻을 안다고 떠들고 나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기망하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였는지요.


진정한 기독교인은 어차피 하나님이 알아서 할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 뜻대로 하지 말고 당신 뜻대로 하라’고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절대자로서의 신이 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보통 그런 것을 기독교인은 ‘신이 역사하신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간구하는 기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릴 때부터 헷갈렸던 것입니다.


내가 구하지 않아도, 나의 능력을 넘어서, 세상은 신의 뜻대로 돌아가고, 그것이 신의 섭리라고 이해하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유럽의 계몽시대 이후 스피노자의 사상 또는 이신론(deism) 일 수도 있겠습니다. 신의 섭리가 어디에나 있다,라는 것 비슷한 생각 말입니다.




9.


그러나 나는 계몽시대의 지혜도 더 지나고 넘어서, 이제는 굳이 따진다면, 차라리 ‘불가지론(agnosticism)’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불가지론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모를 수 있고, 맞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중에 틀릴 수 있음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그렇게 믿고 설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 안에는 거의 언제나 우리의 이성과 과학으로는 이해하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이 있고, 그런 것마저 믿는 것을 흔히 ‘신앙’이라고 하니, 타인의 신앙을 누가 올바로 이해하고 판단하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비교적 이성주의자이고 과학적 사고방식을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이해하는 문자에 기초해서 흔히 하는 말이지만, 지금까지 인간이 밝힌 과학적 성과와 수천 년 전에 성경에 적힌 문구 내용은 서로 평화롭게 조화롭기는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아직도 창조과학이니 뭐니 하면서 이론적으로 짜 맞추느라고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과학계에서 지극히 소수 의견일 뿐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독교인들은 그런 문제에 관해 입을 닫는 게 상책일 듯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살면서 너무 힘들 때가 많고, 매우 불안하고 나약해서 항상 기대고 싶은 대상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흑산'의 육손이도 언문으로 된, 어미가 준  기도문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주여, 주여 하고 부를 때 노비들은 부를 수 있는 제 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웠다”고 김훈은 설명했습니다. 나는 그것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이해되어야 할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속성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굳이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고 일일이 따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의지할 것 없는 육손이가 '제 편'을 염두에 두고 '주'에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을 나는 어쩌면 종교의 본질이자 존재이유라고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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