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권하는 사회와 대학 축제]를 발행한 후에
지금은 자주 들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지만, 수년 전까지만 해도 ‘문해력’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렸었다. 조국을 떠나서 산 지 오래되어서, 일종의 ‘신조어’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내가 미처 몰랐을 수도 있지만, 문해력이라는 단어처럼 과거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단어들이 새로 많이 생겼다. 이를테면, ‘창발성’이나 ‘정성적 평가’ 등도 그렇다.
나로서는 학창시절에는 사용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요즘은 자주 보는 단어들이다. 언어에는 사회성과 역사성이 있고, 따라서 늘 변화하기 마련이다. 거기에서 단어들도 변화하고 사라지고 새로 생기기를 거듭한다. 그래서 나는 이제라도 변화를 따라가고 새 단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독해력’이라는 단어는 학창 시절에 영어를 공부하면서 많이 듣고 사용했다. 그것은 한국말이 아니라서 이해되기 어려운 영문이나 외국어로 적힌 문서를 읽고 한국어로 이해하는 능력 정도로 사용하는 단어였다. 실제로는 거의 언제나 영문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독해력’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한국말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독해력이 떨어진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그럴 때는 그냥 “한국말도 이해 못 하냐”라고 핀잔을 주면서 ‘문장 이해력이 떨어진다’고 말했을 것이다.
요즘 자주 사용되는 ‘문해력’이라는 단어는 영어 문장을 한국말로 번역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이 아니라, 어떤 글을 읽고 그 글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올바로 파악하는 능력을 말하는 듯하다. 글에 대한 전반적 이해 능력을 말한다는 것이다.
독해력과 문해력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 국립국어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독해력’은 ‘글을 읽어서 뜻을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며 ‘독해력 시험’과 같이 쓰입니다.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며 ‘정보 문해력 증진’과 같이 쓰입니다. 사전의 뜻풀이에 ‘독해력’과 ‘문해력’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아 그 차이를 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언어 현실에서는 ‘독해력’이 글을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능력이라면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이해하여 자기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이는 듯합니다.”
문해력을 “자기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까지 뜻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확대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타인의 글을 이해하는 것과 그 글 내용을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나는 문해력이 글을 읽고 뜻과 주제를 올바로 이해하는 능력 정도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그에 반해 ‘독해력’은 영어 문장을 읽어도 이해되지 않을 때 “독해력이 낮다”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문장과 단어 자체를 해독하여 이해하는 능력 정도로 받아들인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과거에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듯한데, 요즘은 특히 교육자들이 “난이도가 있다” 또는 “난이도가 높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예를 들어 "대입시험에 난이도가 있어서 (또는 높아서) 학생들이 당황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사람들은 이 문장을 시험이 “어려웠다”거나 '풀이 수준이 높았다"는 뜻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이 표현이 매우 어색하다고 느낀다. 단어 그대로 말하자면, ‘난이도’는 단지 '어렵고 쉬운 정도'를 뜻한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어렵다거나 쉽다는, 어느 한쪽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저 어려움의 정도를 뜻할 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난이도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어렵다’는 뜻을 가진 것처럼 표현하는 사람이 많다.
사회적으로 이미 그렇게 받아들여서 모두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나도 따라야 하겠지만, 그래도 어색하게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장단점’이라고 말하면서 그 단어가 마치 ‘장점’만 뜻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같다. 장단점은 말 그대로 장점과 단점이라는 양 측면을 갖는 것이지, ‘장점’만 표현하는 게 아니다. 같은 의미에서 난이도가 왜 ‘난’만 표시하는 것처럼 말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혹시라도 독해력과 문해력이라는 제목만 보고 그 차이에 관해서만 읽고 싶은 브런치스토리 독자는 여기까지만 읽으면 될 것 같다. 아래는 문해력과 관계된 경험이지만 지난주에 발표한 나의 글에 관한 후속 생각을 적은 것이다.]
2.
지난주에 브런치스토리에 [술 권하는 사회와 대학 축제]를 올렸을 때 내가 오랫동안 참여하는 한 단체채팅방에도 같은 글을 올렸었다. 그러자 내 글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나마 세 친구가 반응을 보였다.
글을 잘 쓰고 술도 잘 마시는 첫 번째 친구는 “서구 사회나 요즘 젊은이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나이 든) 우리 세대는 여전히 술이 고프다”라고 말했다. 술이 고픈 상황이나 배경에 관해 그가 충분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사회를 볼 때 저간의 사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는 또한 공동체의 소통에 있어서 경솔한 말로 오해를 살 수 있음을 피하려는 한국인의 인간관계에서 (말을 넘어서는 또는 말에 담기지 않는 미묘한 소통을 위해서) 술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한국적 음주 문화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중학교 교사였다가 얼마 전에 은퇴한 두 번째 친구는, 간단하게 내 글의 내용이 “맞다”라고 인정하면서, “젊은이들을 이렇게 키운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아린 마음을 전했다.
평생 민주화운동에 열성적이지만 가장 꼰대스러운 말버릇을 가지고 있는 세 번째 친구는 엉뚱하게도 내 글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요즘 대학생들이 “나름 가치관도 또렷하고 우리 못지않게 합리적이고 똑똑한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면서 (대학생들이) “우리 못지않게 나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내 글을 보고 아무 반응이 없는 것보다 이런 댓글이라도 주어서 고맙다.
그러면서 나는 내 글에 관해 더욱 생각하고, 때에 따라서는 지금처럼 논의도 발전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채팅방에 오른 반응을 보면서 나는 일부 친구의 ‘문해력’을 의심한다. 내 글의 주제를 올바로 파악했는지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그나마 두 번째 친구는 내 글을 성의껏 읽고 전반적인 내용에 동의하면서 ‘불편해 보이는’ 대학문화의 현실을 입에 올렸다. (언론 보도에 따른 나의 요약이지만) 캠퍼스에서 마실 술이 모자라다는 타령을 하는 듯 보이고 몰개성적으로 유명 대중가수를 초청하여 축제를 벌이는 대학 문화에 관하여 그도 마음 편하게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글에서 내가 말하려고 했던 기본 주제이기도 하다.
첫 번째 친구는 실제로는 글도 잘 쓰고 한국인들의 인간관계에 관해서도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내 글의 주제를 간파했겠지만, 술을 워낙에 즐기는 그는 한국인, 특히 기성세대의 음주문화에 특수성이 있음을 주장하고자 했던 듯하다. 그는 내가 한국인들의 음주문화와 소통방식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모자란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길지 않은 댓글에서 그가 자신의 생각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대체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글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실험적이고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문화로서의 대학문화 창달에 관해 그가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내 글의 중심 주제는 술이 아니라, 대학문화였던 것이다. 나아가, 그와 그의 세대가 술이 ‘고픈’ 현실에 관해 나 역시 이해하지만 동조하지는 않는다. 아직도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길은 계속 추구해야 하지만, 소위 '민주화운동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한국인의 술 사랑은 매우 남다르며, 음주에 따른 사고와 사건에 관해서는 특이할 정도로 지나치게 관대하다. 술을 둘러싼 사회문화는 밝고 건전하기보다는 대체로 어둡고 낭비적이고 쾌락적이고 습관적이고 퇴폐적이다. 음주문화를 부정적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거기에서도 전통적인 음습한 모습을 더욱 벗어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술을 자주 마시면서도 책 읽기를 좋아하는 세 번째 친구는, 제대로 읽고 차분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표현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내 글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말하거나 글을 쓸 때 어떤 구체적인 근거나 자료는 제시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평가하기 좋아하는 스타일로 느껴졌다. 그래서 지나친 음주문화에 길들여져 있고, 자기 생각만 정의롭다고 곧잘 주장하는, 일부 민주화운동 세대가 가진 고질적이고 편협한 단점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요즘 젊은이들 또는 대학생들이 기성세대에 비해 똑똑하다고 말하는 것은 내 글 내용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나 역시 요즘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비해 더 많이 배우고 더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더욱 풍요로운 경제문화적 생활을 누렸고 더욱 풍부하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지난 글에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이 멍청하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더욱 새롭고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문화를 창조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밝혔다.
나아가, 요즘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 비해 [술 권하는 사회]의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음주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음을 기대하고 거기에 주목했다. 현진건이 겪은 식민지 시대도 아니고, 70~80년대처럼 공포스러운 독재정치가 판치는 시대도 아닌 오늘날, 대학생들은 기성세대보다 덜 어둡고 덜 마시고 덜 취하면서 새로운 음주문화를 만들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비록 매우 짧은 응답이지만, 거기에 그들이 수십 년간 간직한 문화적이고 지적인 수준이 나타난다. 그리고 타인의 글을 대하는 태도와 문해력 수준도 드러난다.
3.
그러나 채팅방에서 이런 반응을 보면서, 나는 먼저 내 글의 난삽함을 후회했다. 내가 글을 더 명료하고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요약해서 쓰지 않았음을 자책했다. 그랬더라면, 친구들의 반응은 저렇지 않았을지 모른다. 비록 그들이 대학에 관해서 나와는 다른 관점과 기대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되짚어 사실을 말하자면, 그 글을 쓰면서 나는 브런치스토리에 올려야 하나 매우 망설였다.
지난 수개월간 매주 토요일 아침 (미 동부 시각으로는 금요일 밤)에 브런치스토리에 글이 발행되도록 해왔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서 겨우 글을 올리기는 했지만, 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글이었다. 그 글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발행에 앞서 망설였다는 것은, 글의 주제가 특별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글 구성이나 전개에서 자신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실제로는 그 글을 5월 중순 무렵 썼음에도 불구하고 브런치스토리에 발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아가, 미국에 살면서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한국사회에 관해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글을 쓰다 보면 주제가 그럴듯해도 글이 잘 전개되지 않을 때가 있다. 어쩌면 내가 그 주제에 관해 구체적인 자료나 확실한 주관이 없어서 그럴 수 있다. 하여간 [술 권하는 사회와 대학 축제]에 관한 한, 내가 진짜로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대학은 소비적 대중문화를 추종하지 말고 ‘대안문화’를 추구하면 좋겠다.
대학생들의 술 문화가 뭔가 긍정적으로 개선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그 주제를 다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첫 번째 주제는, 한국의 대학생들이 사회를 선도하는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문화를 창조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서도 수업을 전폐한 채 사나흘이나 지속되는 축제는 일반 사회인들이라면 결코 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런 축제를 벌이는 대학생들이 그저 유명 대중가수를 초청함으로써 자기들만의 실험적이고 독창적이면 좋을 축제를 희석시키면서 기성 대중문화를 추종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나아가, 그런 유명 가수를 초청하면서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학생회 전체 예산의 절반 이상을 대중가수 초청에 소비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비이성적인 일이다. 또한, 유명 대중가수를 학내로 불러오는 것은 대학 축제의 본래 목적(그런 게 있다면)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다.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가수나 밴드는 5월에 집중된 대목을 맞아 축제기간에 여러 ‘탕’을 뛰어야 하므로, 마치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표현처럼 바쁘다. 따라서 그들은 (재정) 규모가 작은 지방의 대학들에는 가지 않게 되기 마련이다. 유명 가수들을 초청할 정도 되면 수도권과 지방 대도시들에 있는 꽤 큰 대학들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가수 초청에도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설사 사실이 아니라 해도) 과거에 대학은 명실공히 지식과 지혜의 전당이라고 일컬어졌다. 대학은 엘리트 의식이 충만한 사회 선도 그룹이었다. 그들의 문화는 소비적인 대중문화와는 명백히 차별되는 창조적인 대안문화를 추구했다. 물론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 대학생들은 사회를 선도하려는 엘리트적 열망 속에 진보적이고 실험적이고 대안적인 문화를 창조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대학생들만이라도 소비주의적이고 향락 위주적이고 부의 불평등에 입각한 대중문화를 추종하는 대신, 실험적이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이고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문화를 창조하고 보존하고 추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 포괄저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이 어두운 사회를 밝히는 사회의 등불이 되기를 바란다.
한국의 술 문화에 관한 한, 나는 대학생들부터라도 또 젊은 세대부터라도 음주문화를 점차 개선하기를 기대한다.
한국인들의 음주 문화는 특이하고 유명하다. 한국인의 음주량은 세계적으로 최상위권에 속한다. 음주에 의한 각종 폭력과 사고는 거의 매일 언론을 통해 보도된다. 술 먹고 택시 운전기사를 폭행하고, 술 먹고 헤어진 애인을 찾아가 행패를 부리거나 죽이고, 술 먹고 운전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입힌다. 그런데도 사회 전반적으로 음주에 의한 사건과 사고에 아주 관대해서 판사들마저 솜방망이 처벌을 일삼는다.
그러나 내가 굳이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를 언급한 것은 그렇게 술을 마시는 데에도 어떤 ‘변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이다. 술이라도 마셔야 어두운 사회현실과 거기서 비롯되는 마음의 고통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떠올려서 그렇다. 식민지 조선의 암담한 현실에서 비롯되는 고민과 좌절감을 현진건 소설의 주인공은 술을 마시면서 해소하고 있었다. 사회가 나에게 술을 마시게 한다고!
비슷한 이유로 인해 민주화운동 시대의 음주문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굳이 첫 번째 친구의 말처럼 섬세한 언어로 표현되고 교환되기 힘든 한국인의 소통방식까지 소환해서 논의를 확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런 현실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런 고민과 좌절감이 있다고 해서 매일 술이나 퍼마시는 것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현실에서도 술을 마시지 않거나 적게 마시면서도 밝고 정의로운 미래를 꿈꾸면서 사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아직 어두운 사회정치적 현실이 있다고 해도, 이제는 그런 사회가 우리에게 술을 권하고 있다고, 현진건 시대의 변명을 똑같이 읊조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지나간 시대와 과도기의 전통이고 문화일 뿐이다. 적어도 새로운 시대의 대학에서는 새로운 긍정적 음주문화와 젊은이 특유의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대학축제가 창조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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