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축제로 떠들썩했던 대학가의 5월이 지나갔다.
대학가의 축제를 두고 여러 언론사에서 기사를 쏟아내어 눈길을 끌었다. 한국의 대학 축제와 관련해서 내가 읽은 뉴스 내용은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술을 팔지 못해서 과거에 비해 축제 참여가 활발하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축제에 유명 가수를 초청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쓴다는 것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의 대학에는 딱히 ‘축제’라고 할 것이 없다. 대학에 어떤 행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대학처럼 수업을 전폐하고 사나흘에 걸쳐 벌어지는 ‘축제’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말해서, 미국 대학생들은 한국의 대학생들에 비해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대학생들에게는 으레 이런저런 파티가 많고 그럴 때마다 술을 마시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니라면 미국 학생들은 그리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 편이다. 마시고 싶다 해도 술을 마실 기회는 별로 없고 대학가 앞이라 해도 거리에 ‘술집’은 매우 드물다. 특히 지방 소도시에서는 더욱 그렇다.
미국사회는 보수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며 음주문화에 관대하지 않은 편이다. 술을 광고하는 것은 법적으로 매우 제한적이며, 허가받은 장소가 아니라면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안 된다. 뚜껑이 열린 술병이 자동차 안에서 발견되어서도 안 된다. 운전과 술은 매우 위험한 관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야외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이 많지만, 미국에서 그런 행위는 거의 어디에서나 ‘불법’이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자' 정도나 되어야 거리에서 몰래 술을 마실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그들도 공개적으로 술을 마실 수는 없으므로, 술병이나 맥주 캔을 불투명한 봉지로 감싸서 홀짝거리면서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2.
축제는 대학생들의 특권에 속한다.
대학에서 축제는 학기마다 젊음과 낭만을 즐기고, 잠시 학업을 잊고 선후배 및 친구들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전통적 행사이다.
그 축제에서 학내에 있는 여러 동아리들과 전공에 따라 각 과의 학생들은 여러 행사를 준비할 것으로 기대된다. 예를 들면, 연극과는 연극을, 음악 전공과는 음악회를, 여러 학문 전공 과들은 자기 전공에 맞는 연구발표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날씨만 잘 도와준다면 그런 행사는 실내뿐 아니라 야외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각 동아리는 나름대로 자신의 특성에 맞는 모임과 발표를 하고, 학내 밴드들은 유명 대중가수와는 다른 다양한 공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학내 운동회와 과별 체육대회도 학생들의 단합과 경쟁을 유도할 수 있다.
그런 행사에 관중이 많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그들에게는 그런 행사를 준비하고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라도 충분히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동아리나 각 과의 학생들이 스스로 준비하고 공연한다는 자신들만의 축제로 여기는 것도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양하게 마련할 수 있는 축제가 유명 대중가수 초청 문제로 뒤죽박죽이 되는 느낌이다. 들은 바로는 축제예산의 절반 이상이 유명 가수나 밴드 초청 비용으로 지출된다. 등록금이 없어서 알바를 뛰면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을 텐데, 유명 대중가수의 한 번 공연을 위해 수천만 원을 지불한다. 그나마 유명 가수는 대학끼리 경쟁이 붙어서 먼저 초청해야 할 지경이다.
이것이 개인주의 시대를 사는 창의적인 대학생들의 아이디어일까 의심스럽다. ‘지성의 전당’이라고 일컬어지는 대학의 문화가 이 지경으로 몰개성적인가 싶다. 정말로 유명 대중가수 공연이 보고 싶으면 그들이 캠퍼스 밖에서 하는 공연에 가면 될 것을 왜 굳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대학 축제에 불러오는 것일까. 진정으로 학생들을 위하는 학생회라면 그 예산을 다르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유명 가수 초청 공연이 벌어지면, 대학 내 다른 행사는 거의 전멸될 것이 분명하다. 대중문화에 저항하는 자신들만의 독창적이고 도전적인 문화 창조가 그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책임일 듯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대학생들이 축제를 통해 누릴 수 있는 자신들의 의미 있는 행사를 스스로 망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만약 유명 가수가 오지 않아서 학생들의 축제 참여 의식이 줄어든다는 것이 현실이라면, 학생들은 자신의 창의적 주체성과 정체성을 스스로 마비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3.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축제가 벌어지는 캠퍼스에는 으레 다양한 ‘주점’이 설치되고 학생들은 노천 캠퍼스에서 술을 마셨다. 학생들은 그런 곳에 둘러앉아 친구들과 선후배를 만났고, 그런 곳에서 대학생 특유의 이슈들을 가지고 토론했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를 기억한다.
중학생이 되어서 그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어른이 되면 술을 마시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이며, 그것이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어렴풋이 인식했을 뿐이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후 나는 그 책 내용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 아내는 오랫동안 도쿄로 유학 간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만 돌아오면 유식한 남편이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는데,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맨날 술을 마신다. 당연히 그런 남편이 꼴 보기 싫은 아내는 “술 좀 그만 마시라”고 투정했다. 남편은 자신에게 술을 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내에게 물었고, 바로 “사회”가 자신에게 술을 마시게 한다고 스스로 답했다.
현진건에게 술을 권했던 “사회”는 무슨 뜻일까.
현진건이 살았던 일제강점기까지 상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7,80년대 군사독재 시절에 술을 마셔야 했던 것은 조금 더 이해할 만하다. 그때 한국의 대학생들은 민주화운동의 전위대와 같았다. ‘남편’이 유학에서 돌아오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처럼, 대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좋은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군사독재 시대에 많은 대학생들은 출세의 길로 가지 않고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사회’가 자신들에게 술을 권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로부터 다시 수십 년이 지난 현재, 대학생들에게는 여전히 86세대가 경험하지 않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또 다른 이슈들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술을 마시게 한다고 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들은 술을 마시면서 그런 이슈들을 더욱 깊이 있게 고민하고 폭넓게 논의할 수 있다. 이제는 기성세대의 음주문화와 다른 길을 가는 MZ세대가 있는 것처럼, 대학생들도 그들 자신만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가기를 바란다.
요즘 한국의 대학 캠퍼스에서는 학생들이 술을 팔 수 없도록 규정이 바뀌었다고 한다. 미국식으로 말하면, ‘리커 라이선스’가 없는 사람이 술을 팔 수는 없는 법이다. 한국에서도 아마 주류 판매 자격증을 받아서 술을 파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그런 자격증이 없는 학생들이 술을 팔 수 없도록 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해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주류 판매에 관해 주어진 현실이라고 인정하고, 대학생들도 음주를 대체하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만약 캠퍼스에서 마실 술이 모자란다고 해서 축제 참여가 줄어든다면 그것은 정말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다.
개인주의 시대라고 하지만, 남과 비교하면서 남 따라 하기에 바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일전에 중고등학생들이 겨울에 모두 같은 검은 색깔 같은 브랜드 코트를 입은 사진을 보고 어이가 없다고 느낀 적이 있다. 저토록 몰개성적인 사회, 따라 하기에 도가 튼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부디 기성세대와 다른 자신만의 특징을 찾고 그것을 창의적으로 개발하고, 축제를 통해서라도 자신들만의 진보적이고 독창적인 개성을 찾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