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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Nov 16. 2024

어린이 성가대 - 첫날 (1)

대방교회의 추억

1.


5학년 봄에 발생한 늑막염 사건 이후 나는 더 이상 대방교회에 뜨문뜨문 다니지 않고 본격적으로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방학에 나는 일주일간 개최된 성경학교에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참석했고, 교회에서 매우 우수하고 착실한 어린이가 되었다. 교회에 소속감을 느끼게 되면서, 나는 일요일 아침마다 빠지지 않고 교회로 갔으며, 점차 교회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 해에 형은 마침 어린이 성가대의 성경공부 선생님으로 활동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 그때 대방교회 어린이 예배는 중간에 약 20분 정도를 ‘성경 공부’ 시간으로 할애했는데, 형이 성가대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어린이 예배 시간에 아이들은 학년별로 분리되어 앉았으며, 예배 중에 성경 공부 시간이 되면 각 학년별로 성경 내용을 배웠다. 본당 아래층에 교육관이 있었으므로, 성경공부를 한다면 예배 후에 그곳에 가서 하는 게 맞을 듯도 했지만 아래층은 중고등부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린이 예배에 오는 아이들은 너무 많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교육관 교실들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때 대방교회는 어린아이들이 몰려들어서 ‘폭발할 정도로 부흥하는’ 교회였다.


아무튼 성경공부 시간이 되면 각 학년을 맡은 선생님들은 본당 양쪽 벽에 길게 늘어져 매달려 있던 커튼을 중앙으로 잡아당겨서 임시로 칸을 나누었다. 커튼으로 가리어진 각 칸은 임시 교실이 되었으며, 우리는 그곳에 앉은 채로 성경공부를 했다. 각 칸은 얇은 커튼만으로 가려져 있었으므로 옆 칸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아이들은 성경공부에 제법 집중한 편이었다.


그러나 성가대 아이들은 성경공부 시간에 굳이 성가대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기 학년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았다. 서른 명도 넘는 아이들이 예배 도중에 성가대 좌석에서 갑자기 일어나서 빈자리도 별로 없는 회중 좌석으로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미 학생들로 거의 꽉 찬 학년별 간이 교실로 찾아가는 것은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더욱이 성가대는 설교가 끝난 후에도 기도 성가와 예배 엔딩 성가까지 불러야 하는 합창이 여러 곡이었으므로 성가대석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성가대 대원들은 그냥 성가대석에 앉은 채로 성경 공부를 했는데, 그때 그들을 가르쳤던 성경 공부 선생님이 바로 나의 형이었다.


나에게 처음으로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었던 늑막염 사건 이후 내가 교회에 지속적으로 다니는 것을 확인하자, 형은 이번에는 나에게 제3성가대로 들어와서 활동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때 우리는 어린이 성가대를 제3성가대라고 호칭했다. 아마도 제1성가대는 어른 예배에서, 제2성가대는 중고등부 예배에서 활동했었을 것이다.


“이제 너도 교회에 잘 정착해서 다니게 되었으니까 성가대로 들어와라. 너 노래하는 거 좋아하잖아.”

“성가대? 내가?” 나는 형의 말에 약간 놀라면서 대답했다.

“전에는 성가대원이 되려면 오디션도 있었다고 하는데, 너는 그런 거 없이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내가 강영근 전도사에게 벌써 너에 관해 말했거든. 네가 음악도 좋아하고 성가대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까 데리고 오라고 하더라.”


강영근 전도사는 어린이 성가대의 지휘자였으며 형보다 한 살 위 선배였다. 강영근 전도사에게 벌써 나에 관해 말했다고 하니, 나는 약간 난감했다. 나는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성가대 수준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나 자신 없는데. 성가대 아이들은 노래를 정말 잘하잖아. 내가 그 애들을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성가대는 독창이 아니라 합창을 하는 거니까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어. 합창은 혼자서 노래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야. 화음을 잘 내는 게 중요하거든. 자기 혼자 튀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하는 거지. 그게 합창의 기본이야. 교회도 원래 그런 곳이고. 여러 교인들이 화합해서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말이지. 혼자서 잘났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게 아니거든.”


형은 아직 대학생에 불과했지만 교회의 속성에 관해 이미 상당히 이해하고 있었다. 교회는 어떤 한 사람이 특출 나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교회는 한 개인의 특별한 권위나 지도력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결국 참된 신앙을 가진 성원들의 하모니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 보기에도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형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합창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형은 합창대의 성격과 기능에 관해서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각 개인이 노래를 잘하면 더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다 해도 음악 훈련을 잘 받고 다른 대원들과 화합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합창대원들의 하모니가 잘 이뤄진다면 합창은 훌륭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합창대원은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대원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가대에 들어오면 합창만 하는 게 아니야. 성가대에 똑똑하고 착한 아이들이 많으니까 그 애들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일주일 더 생각해 봐.”


형의 말을 듣고, 영동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는 둘째 누나도 나에게 성가대에 들어가라고 부추겼다. 그 누나는 이미 오랫동안 성가대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성가대에서 솔로까지 맡아서 했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네. 이왕 교회 활동하려면 성가대에 들어가는 게 좋아. 성가대는 교회의 꽃이야. 노래도 하고, 좋은 친구들도 사귈 수 있어.”


그렇게 말한 둘째 누나는 형에 못지않게 교회에 열심이었다. 누나는 집에서도 이따금 두꺼운 노래책을 펴 들고 나에게 많은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그런 누나까지 적극 권함으로써 나는 성가대에 들어가는 데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었고 성가대원이 되기 위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를 즐겨 부르기는 했지만 성가대처럼 남들 앞에 서서 노래할 정도로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과 누나의 말을 나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때 대방교회 어린이 성가대는 정말로 합창을 잘해서 나는 감히 내가 그곳에 들어가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 제3성가대 대원들은 마치 천사들과 같았다. 서른 명 정도 되는 그 아이들이 연푸른색 성가대복을 입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감명받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들은 마치 비엔나소년합창단이나 파리나무십자가소년합창단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린이 합창단에 못지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거기에는 예쁘고 똑똑한 여자아이들도 많았는데,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어쩌면 성가대의 합창보다 거기에 있는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더 들기도 해서 성가대에 들어가는 것을 더욱 진지하게 고민했다.



2.


우리 남매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부모님의 성품을 이어받은 탓이다.


어릴 때 나는 매일 엄마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자랐다. 내가 기억하는 한, 엄마는 집안일을 할 때 늘 찬송가나 가요를 부르곤 했다. 아침에 아버지는 일하러, 누나들과 형은 학교로 모두 나가고 나서 엄마와 나만 집에 남았을 때 엄마는 잔뜩 어질러진 집안을 청소하면서 찬송가와 가요를 입으로 흥얼거렸다. 나는 엄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의 노랫소리는 어린 나에게 심리적으로 부드럽고 안정된 분위기를 안겨주었다. 엄마의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엄마와 함께 있음을 알 수 있었고, 내가 엄마의 보살핌 안에서 ‘낮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주로 찬송가를 부드럽게 부르셨는데, 나는 엄마가 그 노래들의 가사를 모두 외우고 있어서 신기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가로 나를 늘 인도하여 주신다.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양. 철을 따라 꼴을 먹여주시니 내게 부족함 전혀 없어라.”


이런 찬송가들이 엄마의 십팔번이었다. 엄마는 이런 찬송가를 부르다가 가요들도 불렀다. 마당에서 빨래를 할 때처럼 노래를 하지 않을 때는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켜놓고 가요를 들으셨다. 그때 엄마는 이미자를 가장 좋아했다. 엄마는 그녀가 부른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 그리고 박재란이라는 가수가 부른 ‘산 너머 남촌에는’이라는 노래도 자주 부르셨다. 그로 인해 나 역시 그 노래들을 자연스럽게 모두 알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기억하게 된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FM라디오를 들으면서 공부를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엄마가 라디오를 들으면서 식사 준비를 하거나 빨래를 했던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엄마가 가요를 들으면서 일하셨던 것처럼 나는 팝송이나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책상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노래를 듣기보다는 노래하기를 좋아하셨다. 어쩌다가 저녁 식사에 약주라도 한두 잔 하셨을 때 아버지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오래된 가요를 우리들 앞에서 열창하셨다. 약주 한 잔만으로도 얼굴이 불콰해지는 체질인 아버지는 이내 기분이 좋아지셨고,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지만 노래를 시작할 테니 들어보라고 하셨다. 한번 노래를 시작하면 꺼지지 않는 엔진 발동이 걸린 듯 서너 곡을 연달아 부르셨다. ‘신라의 달밤’,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등 아버지의 레퍼토리에는 주로 해방 전의 노래들이 많았다.


노래를 부를 때 아버지는 이따금 스스로 심취해서 일어나서 부르기도 했고, 앉아 계실 때는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면서 박자를 맞추기도 하셨다. 그럴 때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젓가락을 들고 아버지와 함께 밥상을 두드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저절로 그 오래된 노래들에 친숙해졌다.


두 분의 음악 성향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엄마는 노래를 좋아하셨고, 아버지는 노래를 잘 부르셨다. 노래할 때 아버지의 목소리는 강약을 조절하는 힘이 있으면서도 긴 음에서는 구슬프게 떨리기도 했고 부드럽게 꼬부라지거나 구성지기도 해서 누구라도 그 소리를 들으면 감동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 깊이 흥에 취해서 종종 박자를 놓치기는 했지만, 누가 들어도 아버지가 노래하는 소리는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두 분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나도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 가요와 외국 팝송과 클래식 음악을 따지지 않고 모두 좋아하는 편이다. 굳이 따지자면, 두 분 중에 나는 엄마 쪽에 가까워서, 노래를 잘 부른다기보다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내가 성가대 대원이 되는 것은 약간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성가대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이 예배 시간에 내가 보았던 성가대의 합창 수준은 매우 높았다. 어린이 성가대는 서른 명 정도로 구성되었는데, 예배 시간에 그들이 합창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마치 하늘의 천사들이 내려와서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수준에 내가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성가대에는 예쁘게 생긴 여자애들도 여럿이 있었다. 목 이하로 전신을 가리는 성가대 가운을 입어서 그런지 그 아이들은 더욱 성스럽게 보였다. 그들은 나와 달리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특별한 아이들 같았다. 회중석에 앉아 있는 수백 명에 이르는 아이들과 그들은 매우 다른 계층에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예배당 단상을 향하여 앉아 있었지만 그들은 단상과 회중석 사이에서 세로로 긴 줄로 앉아 있었으므로, 우리는 예배 시간 내내 그들의 왼쪽 얼굴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앞줄에는 조금 어린아이들이 뒷줄에는 조금 더 큰 아이들이 있었는데 일부 여학생 대원들의 뽀얀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고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들이 일어나서 찬송할 때마다 나는 깊은 부러움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았고 내심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그 성가대에 들어가려고 생각하니까 슬쩍 겁이 났다.


이러한 자격지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용기를 내어 형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형의 추천으로, 아니 형의 ‘빽’으로 그냥 성가대로 들어가기로 했다. 실제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강영근 성가대 지휘자는 형과 가까운 선배였다. 그는 노래를 매우 잘했고, 무엇보다 성격 좋고 성실하고 훌륭한 지휘자였으며 어린아이들과도 잘 어울렸다.


나는 혹시라도 그 지휘자가 내 노래 실력을 알고 실망해서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부딪혀보기로 했다. 내가 잃을 것이라곤 자존심 상하는 것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내 결정을 듣고 형은 활짝 웃으면서 나에게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다음 토요일 오후 3시까지 교회로 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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