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교회의 추억
3.
첫날.
어린이 성가대에 처음 갔던 날을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매우 부끄럽기도 했고 긴장되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던 날이다. 조금 세분화해서 돌이켜보면, 나 개인의 역사에서 이 날은 나의 세 번째 세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중요한 날이기도 했다. 5학년 이른 봄부터 교회에 꾸준히 다니기 시작한 후 반년 정도 지났고 교회 마당에는 울긋불긋한 가을이 찾아오기 시작하던 계절이었다.
형은 그날 나와 함께 가지 않았다. 형이 나에게 혼자서 교회로 가라고 일러주었던 시간은 어느 맑은 시월 초 토요일 오후 세 시였다. 형은 나에게 성가대 지휘자인 강영근 전도사에게 미리 말을 해놓았으니까 그분에게 가보라고 했다. 어린이 성가대는 오후 3시부터 합창 연습을 시작하므로 나는 십 분 전까지 교회에 도착하기로 했다. 나는 세수를 하고 비교적 단정하게 차려입고 집에서 2시 45분에 나왔다.
교회로 걸어가면서 차분한 마음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성가대 아이들과 마주설 생각을 하니 사뭇 긴장되어 마음은 떨리고 몸의 움직임이 어색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드디어 교회의 넓은 초록색 정문 한쪽에 난 작은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교회 마당에서 십여 명의 성가대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당을 둘러봤지만 어린아이들만 깔깔거리고 소리 지르면서 놀고 있었을 뿐 강영근 전도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예배당 안에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본당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본당은 이층에 있었다. 교회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앞에 있는 이십여 개의 시멘트 계단을 올라가면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본당으로 올라가기 전에 나는 계단 중간에 서서 잠시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주로 저학년 여자아이들이 해맑은 모습으로 맑은 소리를 지르고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깊은숨을 내쉬면서 생각했다. 내가 저 애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성가대원으로서 잘 활동할 수 있을까. 이게 잘하는 일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약간 복잡해졌다. 이어,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저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아주 잠시 망설임이 시작됐다. 여기서 성가대가 되려는 꿈을 접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계단을 마저 올라가서 본당으로 들어간다면 나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었다. 오래된 친숙함에서 벗어나 낯설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어쩌면 딱딱한 알 껍질을 깨고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이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아직 알지 못하고 두렵지만 나는 이미 알 껍질을 부수고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서 나는 드디어 본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멀리 성가대석에 더 많은 아이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본당에는 전깃불을 켜지 않았지만, 예배당 양 옆에 있는 창문들로부터 빛이 들어와서 어둡지 않았다. 본당은 높은 박공 형태의 천장이어서 매우 시원해 보였고, 양쪽 옆 벽에는 격자 창살에 세로로 긴 유리 창문들이 있어서 밝은 가을 햇빛이 그곳으로 조용히 쏟아져 들어왔다. 세 줄로 된 성가대석의 긴 의자에는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보다 조금 더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옆이나 앞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마주 보면서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강영근 전도사는 피아노 앞에 서서 반주자와 대화하고 있었다. 반주자는 머리를 양 갈래로 따고 하얀 교복을 입은 고등학교 여학생이었다.
나는 본당 출입문으로 들어선 후 그 광경을 보면서 더욱 긴장했지만 입을 다문 채 참고 성가대석 가까이로 다가갔다. 내가 쭈볏쭈볏 다가서자, 성가대석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내가 그들에게 걸어오는 것을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성가대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겨우 걸어가서 멈춰 섰다. 성가대 아이들 앞에서 선뜻 강영근 전도사를 소리 내어 부르기도 어려웠다. 지휘자는 마침 더 이상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보더니 내 이름을 부르면서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는 나에게 우선 성가대석에 가까운 회중석에 앉으라고 했다. 성가대원들의 얼굴을 모두 선명하게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었다. 의자에 앉은 아이들은 내가 새로 들어오는 대원임을 직감하고 호기심이 잔뜩 어린 눈길로 지휘자의 얼굴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수십 명이나 되는 남녀 아이들이 한꺼번에 나를 바라보는 것을 의식하면서 나는 금세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으며 매우 난감한 상태가 되었다.
혼자서 긴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더욱 어색하고 뻘쭘했다. 나에게로 날아오는 성가대원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내 몸은 점점 뻣뻣하게 굳어지는 듯 느껴졌다. 나는 너무 긴장해서 그들을 마주 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정면만 볼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머리를 숙인 채 들고 갔던 찬송가를 펼쳤다. 거기서 내가 아이들 앞에서 불러야 할 노래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바깥에서 놀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와서 주로 성가대석의 첫 번째 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성가대 좌석은 세 줄이었고 뒤로 올라갈수록 한 단씩 높아져서 회중석에서는 성가대 뒷 줄에 있는 아이들이 더 잘 보였다. 아이들이 계속 웅성거리는 가운데 지휘자는 성가대석 앞에 있는 지휘자용 단상에 올라섰다.
성가대원은 서른 명 정도였는데,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보다 두 배는 많아 보였다. 성가대석의 앞줄에는 주로 키가 작은 저학년 학생들이, 뒷줄에는 고학년 학생들이 앉았다. 지휘자는 단상에 올라선 후 아이들을 주목시킨 후에 성가 연습에 앞서 기도를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지휘자가 말하는 것을 듣고, 성가대원들을 따라서 머리를 숙였다. 나는 지휘자의 기도를 들으면서 나름대로도 간단히 기도했다.
“오늘은 제가 성가대원이 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떨립니다. 어떻게 노래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발 내가 노래를 잘 부르고 저 아이들과도 잘 지낼 수 있게 해 주세요.”
기도하는 동안 더욱 긴장하여 다리가 떨릴 지경이 되었다.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리는 듯도 했다. 학교 교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들 앞으로 나가서 노래를 부르곤 했던 나였는데, 성가대 앞에서는 왜 그렇게 긴장하고, 나아가 심하게 떨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지휘자는 기도를 끝낸 후 곧바로 성가대원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여러분, 오늘 특별한 친구가 왔어요. 성경 공부 선생님의 동생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성가대원이 될 겁니다. 모두 환영의 박수.”
그 자리에 형은 없었지만, 아이들은 내가 성경 공부 선생님의 동생이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얼굴이 환해졌다. 내가 형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이유만으로 그들은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이미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나는 그들의 박수 소리에 살짝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을 흘깃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웃는 표정과 손뼉 치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지휘자는 나에게 별말도 없이, 다짜고짜 일어나라고 하더니 노래를 해보라고 했다. 그의 목소리가 까마득하게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나는 이미 형으로부터 처음에는 성가대원들 앞에서 노래를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준비한 곡이 있었다. 찬송가 199장, ‘나의 사랑하는 책’이라는 노래였다. 오랫동안 자주 불러서 잘 알고 있던 노래였는데도, 나는 그 자리에 올 때까지 집에서 아마 스무 번도 넘게 그 노래를 다시 불러봤을 것이다. 성가대원들 앞에서 노래를 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인해 뻔히 알고 있는 가사가 자꾸 생각나지 않는 듯했다.
마침내 뻣뻣하게 굳어진 몸으로 나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몸이 휘청거리는 듯했고 눈앞이 어두워지는 듯했으며 목이 막힌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일어나면서 얼핏 성가대 아이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모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호기심과 기대가 잔뜩 뒤섞인 그들의 얼굴을 보니까, 나의 몸은 더욱 부들부들 떨렸으며 두 다리까지 모두 심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너무나 긴장하고 떨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가 과연 노래를 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지난 하루 동안 수십 번도 더 불러서 뻔히 기억하는 찬송가에다 눈길을 고정한 채 나는 겨우 입을 벌려 노래를 시작했다. 극도로 조용한 예배당 공간에 갑자기 내 목소리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학교 교실에서 독창을 해본 적은 많았지만 교회 본당에서 독창하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 소리는 너무나 다르게 들렸다. 교실에서 노래 부르는 것과 달리, 나는 내 목소리가 본당의 천장과 벽에 부딪혀 반사되어 다시 내 귀에 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내가 의지를 발휘해서 나의 목구멍을 통해 나가는 소리였지만, 마치 내 목소리가 아닌 듯 낯설게 들렸다. 어설프게 나오는 목소리는 매우 떨리고 있었다. 노래를 하는 동안 나는 내가 노래를 지지리도 못 부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굳이 얼굴을 들고 보지 않아도 성가대원 삼십여 명이 떨면서 노래를 부르는 나를 불쌍하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목이 더욱 막히는 듯했고 목소리는 더 심하게 떨렸다. 빨리 노래를 끝내고 싶었다. 노래 한 곡이 이렇게 길었나 싶었다. 찬송가를 들고 있는 손까지 덜덜 떨려서 나는 잘못하면 책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겨우겨우 노래가 끝났을 때 아이들은 예의상 박수를 쳤지만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현기증을 느끼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4.
그날 내가 부른 노래를 두고두고 생각했다.
망했구나, 하고.
변명을 하자면, 나는 원래 그렇게 숫기가 없는 아이가 아니다. 학교 음악시간과 오락 시간에 나는 아이들 앞으로 나가서 노래를 하는 데 별로 주저함이 없었다. 그럴 때 나는 전혀 떨지 않았고 긴장도 하지 않았으며 다른 아이들에서 당당하게 노래하는 내가 자랑스럽고 좋았다. 나는 남들에 비해 노래를 정말 잘 부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음정이나 박자를 틀리지 않고 노래를 정확하게 부를 자신이 있었다. 학교에서 음악은 늘 ‘수’를 받았고 교과서에 있는 노래를 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음정이나 박자가 틀리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쉬운 것을 어떻게 틀리지? 머리를 쓰는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박자나 음정을 틀리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곤 했다. 학교에서 흔히 하는 오락 시간과 장기자랑 시간에 나는 서슴없이 손을 들고 앞으로 나가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나중에 친해진 교회 친구들 앞에서도 나는 떨지 않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곤 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었다.
그랬던 내가 교회에서 어린이성가대 앞에 가니까 그런 숫기는 갑자기 모두 사라졌고,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아무리 성가대 앞에서 처음이었고, 여자애들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부를 수 있었을까. 나 개인적으로는 그 일에 대해 오랫동안 두고두고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고,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행위로 여겼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원래 나의 노래 실력이었을 것이다. 그날 노래할 때 내가 몹시 떨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어쩌면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성가대원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고 하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원래 노래를 매력적으로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그날도 음정과 박자는 제대로 맞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오래도록 그날의 노래가 남아 있는 것은 왜일까. 나는 왜 그날 그토록 노래를 못 불렀다고 기억하고 있을까.)
내 노래를 듣고 나서 지휘자는 역시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떨떠름한 얼굴 표정을 지은 채 나에게 가장 뒷줄로 가서 앉으라고 했다. 나와 같은 학년의 남자아이 두 명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안경을 끼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이 약간 역삼각형 모양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런 생김새 때문에 그들은 각각 “너구리”와 “세시봉”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다행히 성격이 좋아서 곧바로 나를 친구로 받아주었다. 그들이 나중에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 상석과 성원이다.
아무튼 그날 나는 강영근 전도사에 의해 쫓겨나지 않았고, 대방교회 어린이 성가대에 무사히 안착했다. 형이 말한 대로, 합창은 혼자서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거기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소리를 조금 낮추고 타인의 소리를 듣는 것, 타인의 소리에 정성껏 화답하는 것, 그리하여 여럿이 힘을 합쳐서 소리를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하모니가 가장 중요했다. 강영근 전도사는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준 훌륭한 지휘자였고, 나는 친구들의 도움과 함께 서서히 성가대원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나아가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것 모두가 그 가을 오후에 낯선 두려움에 떨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주 작은 용기를 내어 어린이 성가대에 들어가면서 생긴 일이었다.
당신도 혹시 아주 가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순간 또는 어떤 결정이 없었다면, 이후에 당신의 인생에서 발생한 모든 것이 지금과 같이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내 생각은 이렇다.
그날 오후에 나에게 어떤 일이 생겨서, 또는 ‘첫날’ ‘첫 순간’이 어색하고 긴장되고 참기 어렵거나 귀찮다고 생각해서, 어린이 성가대로 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대방교회의 어린이 성가대원이 되지 않았다면, 이후 이어지게 될 나의 인생의 여로는 아마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그리하여, 지나온 시간을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인생에서 더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와 동경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길’에 관한 반추와 반성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