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교회의 추억
1.
어디에 가든 처음에는 항상 그렇지만, 성가대에서 신입생인 나는 모든 것이 어색하고 서툴렀다. 나는 학교에서 음악 시간에 이미 음악의 기본 지식을 배웠고, 집에서도 누나들과 이따금 노래책을 보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그나마 내 나이 또래 치고는 음악을 상당히 아는 편에 속했다.
그러나 성가대에 들어가서 매주 바뀌는 악보를 보고 바로 노래하는 것은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악보를 보고 다른 사람들과 화음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과 경험이 필요하다. 더욱이 주된 멜로디를 부르는 소프라노가 아니라 알토를 하는 것은, 처음에는 나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옆에 있는 상석과 성원이 서투른 나를 잘 도와주었다.
그때 어린이 성가대는 소프라노와 알토 두 성부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테너와 베이스까지 포함된 사성부는 중학생이 된 후 제2성가대인 중고등부 성가대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어린이 성가대에서 목소리가 투박하고 낮은 남자아이들은 모두 알토를 맡았다. 알토에는 여러 명의 여자아이들도 포함되었다. 소프라노는 주로 고학년 여학생들이 하는 듯했다.
합창을 할 때는 한 사람이라도 소리가 튀거나 음정이 틀리면 망칠 수 있으므로 나 같은 초보자들은 특히 조심해야 했다. 평소에는 성격이 좋고 아이들과도 잘 어울렸던 지휘자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음을 틀리거나 노래를 성의 없게 부르면 심하게 질책했다.
“너희들은 성가를 부를 자세부터 안돼 있어. 그렇게 노래 부르려면 하지 마. 성의 없이 부르는 노래를 누가 듣고 싶어 하겠니. 배에 힘도 안 주고 턱은 앞으로 쭉 내민 채 목에서만 소리를 내고 있잖아. 그런 소리가 얼마나 지저분한지 알아? 그렇게 부르면 소리가 뜨지도 않고 멀리 가지도 않는다고 말했잖아… 그리고 음이 자신 없으면 차라리 소리를 내지 마. 다른 사람들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소리를 맞춰야지. 왜 틀리면서도 소리를 크게 내려고 그러니.”
우리가 목소리를 가볍게 내고 대충 흥얼거리는 듯 보이면 그는 지휘를 멈추고 지휘봉으로 단상을 딱딱 치면서 합창을 중단시켰다. 그래도 우리가 개선되지 않으면, 그는 정색하고 우리를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한껏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했다. 우리 합창이 더욱 못마땅할 때 그는 때때로 아예 지휘봉을 내려놓고 아무 말도 없이 우리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럴 때면 우리는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긴장한 상태에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그가 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심각하고 경직된 침묵으로 우리를 집중시키고 최대한 음악성을 끌어올리도록 이끌었던 그의 표정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평소에는 우리와 같이 게임도 하고 편하게 대해 주던 그였지만, 음악에 관한 한 그는 진실로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진지했던 그의 지휘와 가르침은 오래도록 우리의 가슴에 남았다.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해 가을에 나는 성가대 아이들과 금세 친해졌다. 여전히 일부 무관심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성가대원들은 대체로 모두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나는 여자아이들과는 어색해서 쉽게 대화하지 못했지만, 상석과 성원이나 나보다 나이 어린 남자애들과는 금세 잘 어울렸다. 특히 어린 여자아이들은 나를 “오빠”라고 불렀는데, 집안에서 막내인 나는 그런 호칭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낯설고도 설렜음을 고백한다. 그 당시에 교회니까 가능한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지만, 어색하면서도 심장을 간질거리는 듯 설레는 감정은 그렇게 어릴 때에도 존재했다.
그런 감정은 나로서는 처음이었지만 매우 순수하고 맑은 느낌이 들었고 기분이 좋았다. 밝은 빛과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 찬 새로운 공동체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가족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공동체이고, 학교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공동체이지만, 교회 성가대는 자발적 참여와 사랑으로 결합된 공동체였다.
성가대는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모여서 성가 연습을 했다. 일요일 아침 어린이 예배 시간에 부를 성가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에 우리는 한 시간 정도 성가 연습을 했고 성가 연습이 끝난 후에는 교회 마당에서 놀았다. 토요일에 학교는 정오쯤 끝났으며, 나는 곧바로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고, 성가 연습이 시작하기 30분 전에 교회로 갔다. 성가 연습 시작 전부터 교회 마당에서 아이들과 뛰어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교회 마당에서 우리가 주로 했던 놀이가 찜뽕이나 집 뺏기 같은 것들이다. 그런 게임은 이미 내가 동네 아이들과 자주 했던 것이라 잘 알고 익숙했다. 그런 게임을 하면 당연히 남자아이들, 그중에서도 상급생이었던 우리가 가장 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노래는 잘하지 못했지만 게임에서는 거의 최강자였다. 특히 공놀이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찜뽕을 할 때 공을 자유자재로 쳐서 보내고 싶은 곳으로 보낼 수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교회 마당 끝까지 날려 보낼 수도 있었다.
찜뽕에서는 상대방이 친 공을 공중에서 잡아서 아웃시킬 수 있었고, 뛰어가는 상대방을 공으로 맞혀서 아웃시킬 수도 있었다. 대부분 나보다 어린아이들과 하는 게임이라, 나는 언제나 우리 팀의 마지막 강타자가 되었고 그런 점에서 아이들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집 뺏기나 다방구 등의 게임을 해도 남자애들은 빠르게 뛰었기 때문에, 특히 어린 여자애들을 쉽게 앞지르거나 의도적으로 봐주면서 장난을 칠 수도 있었다.
그런 게임들을 남자애들뿐 아니라 여자애들과 같이 하는 것은 무척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다. 여자아이들과 뛰어노는 것은 그전까지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그들과 함께 놀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오랫동안 동네 친구들과 그랬던 것처럼, 나는 성가대 아이들과 합창을 하고 그런 게임을 하면서 그들과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가는 듯했고 점점 순수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서 게임을 한다는 것은 거의 언제나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한없는 즐거움을 주었으며 상호 친밀한 교감을 나누고 우정을 쌓게 해 주었다.
2.
성가대에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늦가을이 되었다. 교회 마당에 있는 오래된 거대한 나무들에서 이미 갈색으로 변한 나뭇잎들이 수도 없이 마당으로 떨어졌지만, 교회를 관리하는 서리 집사님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싸리비로 마당을 쓸었다. 우리는 그가 쓸어서 환하고 깨끗해진 마당에서 분주히 뛰어다녔다. 점차 찬 바람이 불어왔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11월 들어 어린이 성가대는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최대 기념일인 크리스마스에 성가대는 으레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그 음악회에서 부를 합창을 여러 곡 준비해야 했으므로, 11월부터는 성가 연습 시간이 늘어났다. 우리는 먼저 일요일 어린이 예배에서 부를 성가를 준비하고, 이어서 크리스마스 합창제를 준비했다. 연습 시간이 길어진 것은 나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성가대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은 늘 행복했으니까.
합창제를 준비하면서 토요일 오후 3시에 시작하는 성가대 연습은 5시나 되어서 끝났고, 12월부터는 일요일 오후에도 추가로 연습했다. 나는 주말마다 그들을 만나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뛰어놀 수 있어서 행복했다. 크리스마스 음악회를 위해 성가대가 부를 캐럴들은 거의 모두 나의 귀에 익은 곡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토로 화음을 넣어야 했기 때문에 약간 새로 배우는 느낌이었다. 일부 노래는 노래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사를 발음하기가 어려웠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원곡 가사로 불렀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오 탄넨바움(O Tannenbaum)’이라는 노래다. 영어로는 ‘Oh Christmas Tree’라는 곡이고, 한국어 가사로는 ‘소나무야’라는 노래다. 성가대는 그 노래를 원래 가사인 독일어로 불렀다. 성가대원들 대부분은 전년에도 불렀던 노래여서 그런지 독일어 가사를 익숙하게 발음했지만, 나는 입에 붙지 않아서 고생했다. 생각해 보라. 가사에 대한 이해도 없이 갑자기 “오 탄넨바움 오 탄넨바움 비트로이진다이네 블래터…”라고 악보 밑에 쓰여 있는 가사를 따라 불러야 했으니 말이다.
12월이 되면서 우리의 연습 시간은 더 길어졌고, 우리의 마음도 더욱 들뜨기 시작했다. 그렇게 애써서 ‘공연’ 연습을 하면 아이들은 더욱 가까워지는 법이다. 한 번이라도 연극이나 합창제 같은 공연을 애써서 준비해 봤던 사람들은 그것을 잘 이해할 것이다. 공동으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하면, 참가자들은 서로 한 팀 또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강한 결속력을 갖기 마련이다.
12월 중순부터 더욱 추워졌다. 찬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진작에 교실로 들여놓은 난로에 석탄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교실이 따뜻하다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해에 첫눈이 언제 내렸는지는 모른다. 기억나는 것은, 눈이 내렸을 때 교회 마당에서 아이들과 눈에 파묻혀 놀았다는 것이다. 함박눈이 소복하게 쌓인 곳에서 우리는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추운지도 모르고 아이들은 깔깔거리면서 눈싸움을 했는데, 아 정말이지, 그렇게 노는 것은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었던가. 돌이켜보면, 내 생애를 통틀어 다시는 오지 않을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눈싸움을 할 때 우리는 눈덩이를 맞아도 아프지 않았고 머리에 눈을 뒤집어써도 춥지 않았다. 차가워진 손에 입김을 호호 불면서 우리는 교회 마당에서 뒹굴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러다가 손이 싹 젖고 너무 춥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아래층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학생회실 겸 소예배당인 그곳에는 따뜻하고 커다란 난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난로 곁으로 삥 둘러서거나 그 옆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서 차가워진 양손을 비비면서 또 재잘재잘 떠들었다. 우리가 그렇게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쉼 없이 대화하는 동안에도 교회 마당에는 차가운 북풍이 소리 없이 스쳐가고 소록소록 눈이 쌓였으며, 아주 조용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12월의 교회 창밖으로 어둠이 내리면 난롯가에 있던 아이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다. 아직 어린 우리는 밤늦게까지 교회에 있을 수 없었고,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어야 했다. 아이들은 예배당에서 나가기 전에 대부분 대화를 멈추고 잠시 긴 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고 기도했다.
“오늘도 성가 연습을 끝내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다가… 이제 집으로 갑니다. 오늘밤 무사히 보내고 내일 아침 예배에도 모두 아무 문제 없이 잘 올 수 있게 해 주세요.”
어린아이들은 작은 두 손을 코 앞에 모아서 그렇게 예쁘게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교회의 초록색 대문을 나가서 걸어가는 어두운 길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고, 교회 앞에 있던 전봇대에는 주황색 전등이 불을 밝혔으며, 아이들은 저 멀리 흰 눈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