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교회의 추억
3.
교회의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나는 가장 기대에 찬 연말을 지냈다. 교회이긴 했지만, 내 생애 최초로 삼백여 명이나 되는 관중 앞에서 ‘공연’을 했던 것이다. 나는 겨우 삼십여 명의 성가대원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지만, 음악회의 관중이 아니라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어린 나에게 그런 경험은 너무나 대단한 것이어서, 나는 삶에서 처음으로 환희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관중이 감동하고 박수를 치는 것은 극도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크리스마스 음악회를 준비하면서 나는 성가대의 한 구성원임에 자부심을 느꼈다.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으며 어느덧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되고 있었다. 특히 합창의 성격상 우리는 서로 믿고 의지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자기 목소리를 그 안에 맞추는 귀중한 경험을 나누었다. 아울러 성가대를 오랫동안 했던 친구들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고 음악을 사랑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확실히 나보다 음악을 잘 알고 노래도 잘했다. 합창과 음악회에 있어서도, 비록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 해도, 이미 여러 번 이런 공연을 했던 나의 선배 성가대원들은 나보다 훨씬 노련해 보였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날 오후, 교회에서 열린 음악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우리는 수백 명이나 되는 아이들 앞에서, 작은 음악회를 마치고 기쁨의 뒤풀이를 할 수 있었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전후에는 다양한 행사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때마다 밝은 모습으로 모여들었고 서로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연말이라 우리는 모두 들떠 있었다. 모일 때마다 합창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했다. 성가대를 위한 연말 파티까지 함으로써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연말을 지냈다.
십이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후, 성가대 아이들은 헤어질 때 한 주 뒤에 만날 것을 알면서도 내년에 보자고 말하면서 집으로 갔다. 달력에서 다음 주는 내년이니까.
“내년에 보자.”
“내년에 봐.”
“일 년간 잘 지내.”
“일 년 있다 만나.”
아이들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손을 흔들면서 헤어졌다. 사실은 새해가 된다 해도 새로운 어떤 것도 발생하지 않음을 곧 알게 되지만, 우리는 언제나처럼 설날 아침이면 떡국을 먹으면서 올 한 해도 행복하고 운이 좋은 날들이 다가오기를 기대했다.
또한, 우리는 당연히 내년에도 모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그렇게 아무 의심도 없이 웃으면서 말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말하기는 한다. 내년에 보자고, 또는 다음에 보자고.
그러나 우리는 곧 알게 된다. 내년에 또는 다음에 아무 일 없이 모두 잘 만날 수 있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새해가 되었을 때, 적은 숫자이기는 했지만, 성가대의 어떤 아이들은 아무 말도 없이 떠났다, 또 어떤 아이는 그다음 계절에 떠나갔다. 그때 헤어졌으므로 나는 이제는 그들의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아이는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처럼 요란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지만 실제로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알고 보니, 누구든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만나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그것은 학교에서 학년이 바뀌면서 같은 반에 있던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특히 눈여겨보았던 여자애가 사라졌을 때는 더욱 그랬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잘 알게 됐다.
사람이 만나고 이별하는 것은 늘 벌어지는 것임을.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때때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점차 그런 일에 적응하고 조금씩 무디어지고 있다는 것을.
사실은 대부분의 삶이 그렇다는 것을.
그해 마지막 토요일 성가연습에서도 그랬다. 우리는 성가대석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서 즐겁고 들뜬 마음이 되어 서로 마주 보고 환하게 웃음 지으면서 신이 나서 떠들었다. 이윽고 누군가 일어나면 모두 함께 일어나서 따라 나갔고, 모두 교회 마당으로 가서 한동안 뛰어놀다가 눈에 젖은 몸으로 아래층 예배당 난롯가에 모여들었으며, 거기서 또 한동안 떠들다가 기도를 한 후 어둠이 내린 도로를 지나 집으로 갔다.
강영근 지휘자는 성가연습을 하다가 쉬는 시간이나 연습이 끝났을 때 이따금 노래하느라고 지친 아이들에게 사탕 같은 것을 나누어주었다. 서른 명도 넘는 사람들이 나눠 먹는 것이라, 사탕 큰 봉지 하나를 사 와도 모두에게 주면 한 사람당 겨우 한두 알에 불과했지만, 사탕을 받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해말간 웃음이 피어났다. 평소라면 맛이 없다고 생각하고 먹지 않았을지도 모를 사탕이 그럴 때는 무척 맛있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사탕을 넣고 볼록해진 볼을 상대방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여전히 주변에 앉은 아이들과 쉬지 않고 떠들었다.
12월 말에 학교에서는 겨울방학이 시작됐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더욱 즐거웠다. 드디어 새해가 되었을 때, 학교에서 나는 여전히 5학년이었지만, 교회에서는 6학년이 되었다. 교회는 학교와 달리 1월 첫 주부터 아이들을 새 학년으로 진급시켰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새해부터 나는 6학년 학생이 되었고, 저절로 더욱 성숙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4.
어린이 성가대에서 가까워진 친구들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더욱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학교라면 매년 반이 바뀌고 친구들이 바뀌었지만 교회에서는 해가 바뀌어도 친구들이 그대로 이어졌다.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친구들의 우정을 지속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여러 해에 걸쳐 일요일마다 만나고 교회 행사를 기획하고 함께 참여했으므로 우리의 우정은 점점 깊어졌다.
성가대에 들어간 후에, 검은 안경을 끼어서 별명이 너구리였던 상석은 나의 단짝 친구가 되었다. 교회 친구들과 친해지기 전까지 나는 주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친한 친구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앞서 밝힌 것처럼, 나는 그때까지 내가 경험하던 세 개의 세계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지나 세 번째 세계로 중심이 이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이 성가대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나는 동네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졌다. 마치 ‘우정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5학년 중반이 지나고 가을에는 어린이 성가대에 들어가면서 나는 방과 후에 바깥에 나가서 노는 날이 줄어들었는데,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에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더 줄어들었다. 그 나이에는 아마도 성장하면서 예전처럼 바깥에서 뛰어노는 것이 재미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학교 수업이 끝난 후에 나는 대방시장에 있는 상석의 집으로 자주 놀러 갔다. 상석과 나는 죽이 잘 맞았고, 더할 나위 없이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우리 집에 대포도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와서 보면 알아. 대포 보여줄게.”
상석은 대방시장에 있는 어떤 술집 뒤에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술집 옆에 있는 대문으로 들어가야 상석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술집의 미닫이 유리문에 00 찌개, 왕대포 같은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그런 단어들을 두고 상석이 처음에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집을 대폿집이라고 불렀다. 대폿집이란 주로 막걸리와 찌개 등을 파는 술집이다. 대포는 큰 술잔을 말하는데, 주로 주전자에 든 막걸리를 누런 사발에다 부어서 마시는 집이기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
겨울방학 동안 틈이 날 때마다 나는 대방시장에 있는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연탄아궁이에서 구들장을 통해 전달된 따뜻한 열기로 데워진 아랫목에 엎드려서 우리는 여자아이들처럼 한참 동안 수다를 떨곤 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눈에 띄게 예뻐 보이거나 똑똑한 아이들 이름을 거론하면서 평가회를 했고, 교회와 성가대에 있는 여자아이들까지 두루두루 대화 주제로 삼았다.
그때 상석은 딱히 누구를 좋아한다고 밝히지 않았지만, 나는 성가대에서 동급생인 상숙과 한 학년 아래인 은희라는 아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상숙은 똑똑했고 은희는 귀여웠다. 나는 실제로는 그들과 대화도 못하면서 상석 앞에서 말로만 떠들었다. 상석은 교회와 성가대 생활을 훨씬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나에 비해 여학생들과 더 가깝게 지냈고, 그래서 나중에는 나보다 빨리 여학생과 사귀기도 했지만, 나는 말만 그렇게 요란했을 뿐 모두 짝사랑에 불과했다.
대폿집 뒤에 살지만, 상석의 어머니가 그 술집을 경영하거나 거기서 일한 것은 아니다. 상석의 어머니는 대폿집과 그 뒤에 있는 기와집의 주인이었고, 그 가게에는 세를 주어서 월세를 받았다. 그 가게에는 음식을 만들고 사내들에게 술과 음식과 웃음을 파는 여성들이 있었다. 어느 봄날, 상석은 그 여성들이 더운 여름날 때때로 한낮에 자기 집 마당에서 팬티만 입은 채로 목욕을 할 때도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해 여름에 이따금 그의 집으로 가보았지만, 호기심을 자극했던 대폿집 여성들이 마당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본 적은 없다. 아무튼, 맹모삼천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런 환경에서도 상석은 아무 문제 없이 공부도 잘하고 착한 아들로 자랐다.
목포에서 태어난 상석은 열 살 무렵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혼자서 무려 다섯 아들을 키웠는데, 상석은 그중 셋째다. 아들이 다섯인 집에 가보면 누구든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독 활동적이고 목소리가 크고 노래도 잘했던 그의 식구들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상석의 형이나 동생들은 집안에서 모두 살살 걸어 다니지 않았다. 그들은 거의 언제나 시끄럽게 떠들면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뛰어다니거나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의 큰형은 전문 성악가처럼 노래를 잘해서 사람들은 모두 그가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렇게 노래를 잘했기 때문에 그 형은 교회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독창을 했는데, 그때는 찬송가뿐 아니라 이탈리아 가곡을 주로 불렀다. 상석도 그 형의 그 동생이라 그런지 노래를 잘했다. 그는 그의 형이 자주 불렀던 ‘오 솔레미오’나 선구자’ 같은 노래를 즐겨 불렀다.
그 집의 오 형제가 먹는 음식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예를 들면, 오후에 간식으로 긴 식빵 한 봉지를 뜯으면 다섯 사람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식빵을 펴고 땅콩버터나 딸기잼을 바른 후 그 위에 식빵을 덮어서 먹어 치우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서는, 특히 신앙심이 깊었던 그들의 어머니가 다섯 아들을 키우면서 거쳤을 삶의 고단함과 역경의 극복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남편도 없이 아들 다섯을 키운, 그 억척스러움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경이로웠다.
5.
상숙은 세련되고 야무지고 예쁜 아이였다. 그녀는 대방초등학교에서도 가장 똑똑하다고 평가받는 아이였고, 동급생들이 거의 다 알고 있는 학생이었다. 그때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녀와 대화한 적이 거의 없지만, 그녀가 학교에서 유명한 모범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 사실로 인해 나는 상숙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도 못했다. 그녀는 노래까지 잘 불러서 성가대에서 종종 솔로 파트를 맡기도 했다. 나는 그 애가 두성으로 높고 고운 소리를 내는 것을 들을 때마다 감탄하곤 했다.
학교 친구들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상숙은 KBS 방송에서 했던 ‘장학퀴즈’라는 프로그램에 출전했었다. 당시 이 방송은 똑똑한 초등학생들이 학교를 대표해서 출전하여 퀴즈 풀이 경쟁을 하는 프로그램이었으며,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그 방송에서 결선까지 올라가지는 못한 듯하지만, 그녀가 우리 학교를 대표해서 출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상숙은 학교에서 특별한 애였다.
게다가 상숙은 매우 부유한 집의 막내딸이었다. 아버지가 정부의 최고위 관료급에 속했던 그 애의 집은 매우 컸고 높은 축대 위에 있었으며, 넓은 마당에는 푸른 잔디가 깔려 있는 곳이었다. 내가 6학년이었을 때 한 번은 그 애가 초청해서 서른 명이나 되는 성가대원들 모두 그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우리 집에서 겨우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 그 집의 푸른 정원은 우리 모두가 게임을 하면서 놀고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나는 은근히 그녀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말이지 나 혼자만의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그녀가 가진 특유의 자신감과 도도함으로 인해 나는 그녀에게 함부로 다가서거나 말도 붙이지 못했다. 내가 ‘동경했다’고 말했지만 그것을 아직 본격적으로 ‘좋아했다’는 것으로 치환할 수는 없다. 그럴 만큼 그때 나는 아직 성숙하지 않았고, 그녀와 가깝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기 때문에 깊은 정을 쌓을 수도 없었다.
상숙에 이어 내가 두 번째로 짝사랑했던 여학생은 은희였다. 은희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여학생이었는데, 예쁘고 노래도 매우 잘해서, 5학년 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아이였다. 내가 볼 때, 6학년에 상숙이 있다면 5학년에는 은희가 있다고 할 판이었다. 나는 그 애가 나와 같은 학년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은희에게 오빠로서 쉽게 접근하고 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착하고 밝은 성격을 가진 은희는 나에게 스스럼없이 “오빠”라고 불렀기 때문에 나는 성가대에 갈 때마다 가능하면 그 애 옆에 있기를 좋아했다.
마치 순정만화에서 나올 만한 귀여운 얼굴 모습을 한 은희는 두 손을 합장하듯 모아서 얼굴 앞으로 들고 기도했다. 나는 은희가 기도하는 모습에 반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와서 앉아 있는 작은 천사가 떠올랐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내 눈에는 작고 하얀 손을 코 앞에 모으고 눈을 감고 기도하는 은희가 그런 모습으로 보였다.
6학년 이른 봄 어느 날 오후, 학교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밝은 얼굴로 집에 갈 때였다. 강남 갔던 제비들이 돌아와서 대방초등학교를 둘러싼 높은 축대 아래에 있는 길을 쏜살같이 지나다녔다. 제비가 지나갈 때 아이들은 가방을 높이 들어서 제비를 잡는 시늉을 했지만, 제비는 아랑곳없이 잽싸게 아이들 머리 위로 지나갔다.
나는 대방시장으로 가서 상석의 집으로 들어갔다. 상석과 나는 나란히 방에 엎드려서 먼저 숙제를 했다. 그러고 나서 그대로 엎드린 채 또 한참 동안 여자아이들에 관해 떠들었는데 그때 상석이 물었다.
“그래서 둘 중에 누가 더 좋은데?”
“야 그걸 어떻게 고르냐. 다 좋지.”
“그런 게 어디 있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사람이 있잖아. 나한테만 말해 봐.”
“야, 그럼 이건 비밀인데… 상숙과 은희 둘 다 좋지만 굳이 고른다면 은희가 조금 더 좋아. 상숙은 대하기가 조금 어려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서 김칫국 먼저 마시는 것처럼 나는 감히 둘 중에 은희를 골랐다. 어차피 나 혼자 생각하고 혼자 선택하는 것이라 그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나는 상석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왜냐하면, 상숙은 똑똑하지만 너무 도도해. 잘난 척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가까이하기는 어려워. 그러나 은희는 귀엽고 명랑해. “오빠, 오빠”하면서 까부는 게 진짜 귀엽지 않니? 걔랑 있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덩달아 나도 즐거워져.”
“짜식, 그렇구나. 사실 은희가 귀엽기는 하지.”
상석은 내가 왜 은희를 더 좋아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왜 상석이 나처럼 상숙이나 은희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지, 혹시 그런 마음이 있지만 감추고 있는지 의아했다.
그때 상석은 누구를 좋아했을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6.
그러나 우리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오래도록 친구로 남은 사람은 은희가 아니라 상숙이었다. 상숙과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대방교회를 다녔으며, 서로 ‘좋아하는 사이’는 아닐지라도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물론이고 상석과 나는 교회에서 우리가 만든 친한 친구 그룹의 주요 멤버였다. 나는 중학생이 된 후에 교회의 동급생들 가운데서도 친한 그룹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나갔는데, 상석과 상숙은 그 모임에서 주요 멤버였다는 말이다. 교회에서 중고등부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계획을 짜고 모임을 주도했으며, 별도로 만나기도 하면서 우정을 쌓아나갔다.
그러나 은희는 일찍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는 모두 대방동에 살고 있었지만 은희는 신풍시장 근처에 살고 있었다. 신풍시장은 대방교회에서 걸어서 30분도 더 걸리는 곳이어서, 나는 그녀가 어떻게 대방교회로 오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했다. 은희보다 한 학년 높은 나는 6학년이 끝났을 때 중등부로 올라갔고, 은희는 초등부에 남았다. 나는 어린이 성가대를 떠나서 중고등부 성가대로 올라갔고, 은희는 여전히 어린이 성가대에 남았다.
나는 은희가 중학생이 되어서 중등부에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중학생이 되기도 전에 대방교회를 떠났다. 나는 은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매우 궁금했는데, 나중에 들은 소문으로는 은희가 그때 이민을 갔다고 했다. 그로 인해 나는 그녀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영영 알지 못하게 됐다. 그래서 훗날 은희를 떠올릴 때마다 그 아이와 더 친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교회에서 친했던 친구들은 상석과 상숙 외에도 여럿이 있다. 특히 중학교에 올라간 후에 우리는 사춘기를 거치면서 더욱 성숙해졌고, 한결 수준이 높아진 우정을 쌓았다. 청소년 시절에 여러 해동안 교회에서 함께 어울리다 보니 우리는 서로를 잘 알게 되었고 남녀 학생들 사이에는 이성적 감정이 자주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매주 일요일마다 만나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있었고, 또한 약간 배타적으로 결성된 우리들의 모임에서 늘 함께 어울렸으므로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는 없었다. 제멋대로 감정을 드러냈다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칫 곤란한 지경에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관계가 상하게 되면 교회에서 서로 얼굴 보는 것이 껄끄러워지고,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도 어색해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개인들 사이의 관계에서 때때로 묘한 긴장감을 낳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총체적 우정의 틀 안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럴 정도로 우리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우리의 집단적 우정을 지키고자 노력했고,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우정을 소중하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