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방교회 어린이성가대의 합창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무리 내가 우리 성가대가 합창을 잘했다고 말해도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성가대가 우수했다는 것은 나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혹시라도 나의 추억이라고 해서, 내가 과대 포장하거나 미사여구나 늘어놓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당신에게, 지금부터 내가 진실을 말하는 것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증거를 밝히려고 한다.
바야흐로 1970년대 중반이었다.
언젠가 서울에 있는 큰 교회들이 어린이 성가대 경연대회를 열기로 합의했던 듯하다. 그 결과 어느 여름에 제1회 서울시 어린이성가대 경연대회가 열렸다. 내가 알기로는, 서울시에서 어린이 성가대를 위한 합창 경연대회는 그때 처음으로 열린 것이었다. 그 경연대회에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교회였던 영락교회를 비롯하여 다수의 대형 교회가 참가했다.
대방교회는 교인 수가 2천 명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라 아마도 중형 교회였지만, 우리 성가대의 뛰어난 실력을 믿고 그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다행히 내가 성가대 대원이었을 때 그런 행사가 열렸고 결과도 좋았으므로, 나는 그 추억을 지금까지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가슴 깊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팀은 두 곡의 합창을 불러야 했다.
짧은 지정곡 한 곡과 자유곡 한 곡.
그때 우리가 불렀던 노래를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는 두 달도 넘게 그 노래들을 준비했다. 어린이 성가대가 대외적으로 경연대회에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교회의 어른들은 우리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우리가 연습할 때 이따금 사탕 같은 군것질 거리를 제공하는 등 우리를 적극 지원했다. 그해 여름에 우리는 크리스마스 공연을 준비하는 것처럼 공들여서 경연대회 출전곡을 연습했다.
지정곡은 ‘해지는 저편’이라는 짧은 곡이었다,
“해지는 저편
저 하늘에는 우리 주 예수 계시는 곳
고난은 가고 찬란한 햇빛
영광의 날이 밝으리라.”
이 짧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지정곡을 우리는 수십 번이나 연습했다. 이 노래는 낮은음에서 높은음으로 번갈아 파도를 치듯이 오르내리는 노래였는데, 강영근 지휘자는 다른 교회의 성가대와 차별성을 주기 위해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서 솔리스트가 한 옥타브 올려 부르도록 했다. 그는 그 역할을 우리 성가대에서 가장 고음을 낼 수 있었던 상숙에게 맡겼다. 상숙은 처음에는 약간 긴장했지만, 지휘자가 가르쳐준 대로 곧 머리 위로 소리를 띄워 올려서 높은음을 무리 없이 소화해 냈다.
나는 합창을 하다가도 그녀가 두성으로 우아하게 고음을 내는 것을 들으면서 마음이 뿌듯했다. 혼자만의 생각이긴 하지만,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 아이를 내가 좋아하고, 나아가 나도 그런 친구와 함께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큰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스꽝스러운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예쁘게 노래를 부르는 상숙을 보면서 혼자서나마 행복감을 느꼈다.
4.
강영근 지휘자는 찬송가에 있는 ‘놀라운 놀라운 날이었네’라는 곡을 자유곡으로 선정했다.
지휘자가 선택한 자유곡은 비교적 단조로울 수 있는 노래였다. 나는 이 노래의 멜로디가 너무나 짧고 단조로워서 우리 성가대의 실력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지 않은 곡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휘자는 우리가 내는 소리의 크기 조절을 강조하고 아름다운 화음을 낼 수 있도록 우리를 연습시켰다. 그는 우리에게 화음과 음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노래 부르도록 강조했다.
드디어 경연대회가 열리는 7월의 어느 토요일에 우리는 긴장한 분위기 속에 교회에 모였다. 경연대회장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연습을 하고 나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떠날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교회의 다른 집사님 서너 분도 우리를 돌보기 위해 참석했다. 우리는 조금 긴장했지만, 지휘자는 우리를 모아놓고 걱정할 것 없으니 “지금까지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약간 들뜬 마음으로 교회에서 우르르 나가서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사십 명도 넘는 인원이라 버스 한 대에 모두 탈 수는 없었다. 어른들은 우리를 두 팀으로 나누었다. 어린이 성가대가 어딘가로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은 처음이라 우리는 모두 마음이 들떠서 괜스레 호들갑을 떨기도 했지만 그것은 긴장감을 감추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일부 남자아이들은 버스를 타고 간다 해서 공연히 신이 났다. 그들은 버스를 타서도 자기들끼리 지나치게 웃고 떠들었는데, 강영근 지휘자와 반주자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
경연대회는 어느 고등학교의 큰 강당에서 열렸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강당으로 들어섰을 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강당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당 앞에 있는 넓은 무대의 중앙에는 합창단이 올라서서 노래할 수 있도록 세 줄로 된 긴 계단식 단상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할당된 좌석으로 가서 줄지어 앉았다. 얼마 후 강당에는 여러 교회에서 온 수백 명에 이르는 아이들이 가득 들어찼으므로 우리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큰 교회 성가대 대원 숫자는 우리의 두 배 정도나 되는 듯해서 숫자만으로도 압도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경연대회가 시작되었고, 각 교회 성가대는 순서에 따라 단상으로 올라가서 합창을 했다. 어떤 성가대는 잘하는 듯했고, 어떤 성가대는 너무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긴장 속에서 여러 성가대가 합창하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그런 비교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합창을 끝낸 성가대가 무대 한쪽에 설치된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다음 성가대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강영근 지휘자가 일어나더니 그다음은 우리 차례라고 하면서 모두 일어나라고 했다. 가만히 앉아서 다른 성가대의 합창을 듣고 있다가 막상 우리 차례가 되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더욱 긴장했다. 긴장으로 인해 얼굴이 굳은 채 모두 일어나서 무대 옆에 있는 대기실로 조용히 줄지어 갔다.
거기서 우리는 먼저 성가대 가운을 차려입었고, 서로 옷을 잘 입었는지 봐주었다. 우리는 서로 불안한 눈을 바라보면서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무대에서 합창하고 있는 성가대가 합창을 끝내면 그다음에는 우리가 무대로 나가야 했다. 그렇게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서 있자니 갑자기 몸이 굳는 듯했고 사뭇 긴장되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 얼굴에도 긴장된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런 우리 모습을 보더니 지휘자와 어른 집사님들은 우리가 잘할 수 있으니까 긴장을 풀라고 말했다.
“모두 여기 봐.”
지휘자가 그렇게 말했을 때 우리는 서로 속삭임을 중지하고 지휘자를 바라보았다.
“긴장할 필요 없어. 연습했던 대로만 하면 된다. 알았지?”
우리는 아주 작게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주 짧게 모두 눈을 감고 기도했다.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된다는 것은 꽤 간단하고 쉬운 말로 들린다. 그런데도 살다 보니까, 그런 상황에 이르면 그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무리 연습했던 대로만 하자고 마음먹는다 해도 실제로 무대에 오르면 너무나 긴장해서 평소에 했던 것이 전혀 생각나지도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 그것은 마치 시험 볼 때 이미 공부했던 대로 알고 있었던 것인데도 긴장해서 그런지 정답이 생각나지 않는 것과도 같다. 특히 시험 막바지에 시간이 모자랄 때 더욱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그럴 때는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렀을 때가 많다. 긴장이란 그런 것이다.
드디어 앞선 성가대 공연이 끝나고 우리 순서가 되었다. 연습한 대로 세 줄을 맞춰서 섰을 때 갑자기 대기실 문이 활짝 여렸다. 지휘자와 반주자를 선두로 해서 부지런히 무대로 나갔을 때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넓은 강당 모습이 우리 눈에 들어왔다. 앞서 합창한 성가대 아이들은 무대 왼쪽에 있는 계단을 통해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무대 단상 위로 올라갔다. 나는 물론 제일 뒷줄, 그중에서도 가장 끝에 서 있었다. 단상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니까 갑자기 아마도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눈과 마주치는 듯했다. 합창에 앞서 지휘자가 우리 앞에 서서 지휘봉을 든 채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모두 집중. 다른 곳 보지 말고 내 얼굴을 봐.”
강당에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은 가운데 약간 어수선했고 우리는 잔뜩 긴장해서 그런지 그의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입 모양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고 거기에는 어떤 간절함 같은 것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지휘자의 지휘봉이 올라가는 신호가 시작되고 반주자의 연주로 전주가 나오는 동안 나는 깊은숨을 내쉬면서 마지막으로 강당을 휘둘러 본 후에 지휘자의 얼굴과 손에 시선을 집중했다.
우리의 합창이 시작되었을 때, 마치 내가 어린이 성가대에 처음 갔던 날 느낀 것처럼, 우리의 합창 소리는 넓은 강당에서 낯설게 울리는 듯했다. 합창 소리는 멀리 퍼져서 강당 벽으로 갔다가 반사되어 우리에게 돌아왔는데 그것이 정말 우리가 내는 소리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교회보다 훨씬 높고 넓은 곳이라서 그런지 교회에서 합창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 들었다. 같은 노래를 하는데도 그렇게 차이가 느껴지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우리는 먼저 지정곡을 불렀다. 미리 연습했던 대로, 노래 끝부분에 이르러 상숙은 한 옥타브 높여서 곱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보냈다. 넓은 강당에 퍼지는 그녀의 고음은 아득하게 들리는 듯했다. 아무리 그녀가 연습했다 해도 정말로 그렇게 아름답고 높게 소리를 내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내심 감탄했다. 넓은 강당에서 퍼지는 고음이라 더욱 신비롭기까지 했다. 나는 지휘자의 전략이 성공했다고 판단했다. 그런 식으로 합창한 성가대는 우리밖에 없었다. 심사위원들이 어떻게 판단했을지 모르지만, 천장이 높고 넓은 강당에서 상숙이 두성으로 높이 띄워 올린 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매우 감동적이었다.
얼떨결에 곧이어 부른 자유곡에서도 우리는 그야말로 연습한 대로 했다. 약간 정신이 없는 가운데 연습했던 대로 입을 벌렸고 소리를 냈다. 노래가 너무 짧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긴장된 순간이 흘렀다. 어느새 노래는 끝났고 강당 여기저기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두 달여 기간 동안 연습했던 것은 순식간에 끝난 듯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또 줄을 맞추어 계단으로 걸어갔고 우리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았을 때 우리는 저절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절한 표현력과 아름다운 화음을 이룬 우리 합창은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았다. 영락교회나 다른 큰 교회 성가대도 노래를 잘하는 듯했지만 우리는 결국 준우승을 차지했다. 우리가 부른 합창곡의 제목대로 정말로 ‘놀라운 날’이었다. 지휘자와 교회 어른들은 우리에게 정말로 잘 불렀다고 칭찬했다. 우리는 좋은 결과를 내면서 공연이 무사히 끝났다는 데 안도했고 기쁨에 사로잡혔다. 경연대회가 끝난 후 강당을 나오면서 아이들은 모두 긴장감이 풀어졌으며 얼굴에는 화사한 웃음이 번졌다.
운동장으로 나왔을 때 우리를 경연대회장으로 데리고 갔던 어른들 가운데 한 분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너희가 제일 잘 불렀어. 우리 교회 성가대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정말 아름답게 들려서 감동이었어. 그런데 영락교회가 제일 큰 교회라서 거기에다 우승을 준 거야.”
다른 어른들도 그 말이 맞다고 동조했다. 나는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그분들은 그냥 우리들 기분을 더욱 좋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라면, 어린이 성가대 경연대회마저 사회경제적 권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는 어릴 때부터 체득한 셈이다. 그때 영락교회는 서울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교회였기 때문이다.
성가경연대회에서 우리 성가대가 준우승을 차지한 것은 우리 교회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이 되었다. 어차피 그 성가경연대회의 역사가 오래가지도 않았지만 아무튼 우리가 합창할 당시 우리 성가대의 수준이 그랬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나 개인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다 해도 우리 성가대가 합창을 잘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이 합창의 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지휘자 강영근 전도사의 공이 절대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지휘자는 당시 연세대학교 신학대에 재학 중이었다. 신학대에서 그의 전공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노래를 무척 잘했고, 우리 같은 어린이들에게 화음과 음악이론과 발성법을 잘 가르쳤다.
나는 어릴 때부터 노래하기를 좋아했지만, 어린이 성가대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성악과 발성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우리에게 발성법을 가르쳐주었고 합창의 묘미를 알려주었다. 소리는 당연히 목에서 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그는 소리를 머리에서 또는 코에서 또는 가슴에서 내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 몸에 공명대라는 것이 있어서 소리가 그 공명대를 울려서 나와야 아름답게 들린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성악가의 노래를 들어보니, 소프라노는 소리가 머리에서 나는 듯했고, 베이스는 소리가 가슴에서 나오는 듯했다. 그는 우리 몸이 소리를 울리는 울림통과 같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소리가 잘 울리는 곳이 있다고 했다. 그것을 높은음부터 두성, 비성, 흉성 등으로 표현했다. 목에 힘을 주어 소리를 바로 앞으로 보내면 소리가 뜨지 못해서 아름답게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소리를 머리나 코로 내보내고 싶었고, 그렇게 연습도 해봤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내 연습이 부족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 예술은 역시 타고난 재능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 법이다.
강영근 지휘자가 과장해서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화여대 강당에서 소프라노가 두성으로 소리를 제대로 내면 그녀의 소리가 멀리멀리 날아가서 연세대학교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소리를 띄워서 낼수록 소리가 높게 멀리 간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화여대와 연세대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몰랐지만, 지휘자의 인품과 진지함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노래를 할 때 공명대를 잘만 이용하면, 사람이 띄우는 소리가 공중 어딘가로 흘러가서 아주 멀리 있는 곳에서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 말이다.
5.
경연대회 이후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모두 버스를 타고 신촌으로 갔다. 거기서 먼저 중국집을 찾아갔다. 모든 성가대원이 그렇게 중국집으로 갔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자장면을 먹고 나서 지휘자가 재학 중인 연세대 캠퍼스로 갔다. 그는 경연대회 결과가 좋으면 우리에게 캠퍼스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이전에 말했었다. 그는 물론 경연대회의 결과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중국 음식을 먹게 하고 캠퍼스를 돌아볼 수 있도록 계획을 짰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대학 교정에 가보았다. 대학 교정은 매우 넓고 아름다웠다. 그때까지 내가 대방초등학교 외에 가보았던 학교라고는 우리 동네에 있었던 강남중학교와 성남중고등학교와 서울공업고등학교, 그리고 누나나 형이 다니거나 졸업한 중고등학교 정도였다. 그때 형도 이미 고려대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내가 그곳에 가본 것은 나중에 형이 졸업식을 할 때뿐이었다.
연세대 캠퍼스는 초중고등학교 교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학교의 크기와 건물의 아름다움 등 말 그대로 품격이 다른 곳이었다. 입을 벌리고 감탄하면서 캠퍼스를 구경한 우리는 어느 동상 아래에 모여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 겨우 하나 남아서 나는 아직도 그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 성가대 단체사진으로는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그 사진 속 얼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는 그때 함께 했던 성가대 아이들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듯하다. 아이들이 짓는 표정 하나하나가 나의 오래된 기억을 헤집고 되살아나며, 당시 우리가 노래하고 뛰놀았던 날들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성가대의 강영근 지휘자가 얼마나 열성적이고 진심으로 우리에게 합창을 가르쳤는지 알고 있다. 그는 우리 앞에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곧잘 “당신”이라고 표현했다. 어린 우리가 기도할 때 맨날 “하나님 아버지” 또는 “예수님”이라고 호칭했던 것에 비해 그가 선택한 “당신”이라는 표현은 내 귀에는 꽤 수준이 높고 멋있게 들렸다. 그래서 나도 그 후부터 때때로 기도할 때 하나님을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초등학생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 어른스럽고 고상하지 않은가.
“당신의 사랑 안에서” 또는 “당신을 사모하나이다” 또는 “당신의 은혜와 자비”라고 말한다면 말이다.
하여간 나는 아직도 그가 두 손을 모아서 진실된 목소리로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기도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나중에 신학생이 되면 학교에서 말하거나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가 상상했을 정도다. 그만큼 그의 절실한 기도와 목소리는 때때로 나의 마음을 감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