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교회의 추억
8.
들뜨고 설렜던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신나는 시간이 지나고 나니 좀 우울해졌다. 한 해가 지고 있었는데, 곧이어 또 신나는 시간이 다가온다면 우울해질 일이 없겠지만, 그럴 일이 없어 보이는 새해가 다가온 것에 나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새해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어린 나에게 인생의 한 고비를 넘어가는 것이었다. 형과 누나들을 보았을 때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완전히 다른 차원, 다른 세계라고 나는 상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말이 되었을 때 나는 마치 즐거운 잔치가 끝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드디어 딱히 기대할 것도 없는 새해가 되었을 때 교회에서 나는 중등부로 올라가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졸업을 앞둔 6학년이었고, 아직 어느 중학교에 가게 되는지 확정되지도 않았지만, 교회에서는 1월 첫 주부터 중학생이 되었다. 그 바람에 더 이상 어린이 성가대에 갈 수 없게 되었다.
그해 겨울, 토요일 오후마다 어린이 성가대 연습에 갔던 습관을 지우느라 마음이 많이 아팠다. 토요일 오후 성가대 연습시간이 되면 몸이 들썩거리고 마음이 온통 교회와 은희에게로 물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뜻 교회로 갈 수는 없었다. 그 까닭을 뭐라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생의 한 장이 지나갔다는 느낌이었다. 그 상실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중등부로 올라간 후, 1월 초에 깨달았다. 교회에서 지난 수년간 함께 지냈던 아이들 중 몇 명은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런 현상은 2월까지 이어졌다. 아마 사라진 그들에게도 교회를 떠나기로 결단할 만큼 새해가 되고 중학생이 되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접어드는 것이었다.
어린이 성가대를 함께 했던 친구들 중 상숙과 지향과 상석과 나 네 명은 중등부로 올라가자마자 즉시 중고등부 성가대에 가입했다. 선배들도 들어오라고 했고 우리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성원과 다른 여자아이들은 성가대에 합류하지 않았다.
나이 많은 중고등부 선배들이 있는 새로운 성가대는 낯설었다. 우리는 갑자기 막내가 되긴 했지만, 합창을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고 선배들도 우리에게 잘 대해 주었다. 우리는 곧 중고등부 성가대에 적응했다. 우리 네 명은 한동안, 아마 1년 이상, 어린이 성가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고등부 성가대에 열심히 참여했다. 성가대 활동을 하면, 적어도 교회 활동의 중심이 된다고 생각했던 때다. 그로 인해 실제로 상석과 나는 교회에서 우리 학년의 활동을 주도했다.
중고등부 예배가 끝난 후에 학생들은 학년별로 교실로 들어갔으며, 거기서 성경공부가 진행되었다. 학교처럼 학년별로 담임선생님이 있었고, 학년 대표가 있었다. 성경공부가 끝나면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교회에 온 아이를 소개하고, 생일을 맞은 친구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축하했으며, 친목회나 부활절 행사나 수련회 등 학생부 활동계획을 논의했다.
중고등부 성가대는 어린이 성가대와 달리 사성부로 구성되어 있었고, 음악 수준이 매우 높았다. 상숙과 지향은 소프라노가 되었고, 상석과 나는 테너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중학생이 된 후에도 여전히 매주 똑똑하고 예쁜 상숙을 볼 수 있었지만, 어린이 성가대에 두고 온 은희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은희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깊이 감춰둔 채 저절로 상숙에게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초중고 학생들은 모두 아침 열 시에 예배가 시작됐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위층 본당에서, 중고등학생들은 아래층 교육관에서 모였으므로 만날 일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예배 후에 성경공부를 하러 들어가야 했다. 중고등부 성가대는 토요일 오후가 아니라 일요일 아침과 오후에 모여서 합창을 연습했다. 그로 인해 토요일 오후가 되어도 나는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다. 어린이 성가대에 있는 은희를 비롯한 여러 아이들이 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마음뿐이었고 실제로는 차마 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나는 어린이 성가대 연습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교회로 놀러 가기로 했다. 그때가 1월 말 어느 날이었던가. 2월 초였을지도 모른다. 혼자 가기는 어색했으므로 나는 상석에게 졸라서 같이 갔다.
"오빠, 중학생 됐다고 이제 우리에게는 와보지도 않아. 벌써 우리를 잊은 거야?"
"아냐. 잊기는 무슨... 이렇게 왔잖아. 앞으로도 자주 올게."
"그래 자주 와. 얼굴 잊어버리겠다."
성가대 연습을 마친 아이들 중 일부가 교육관으로 와서 난롯가에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장난을 치면서 떠들기는 했지만, 우리가 함께 있었던 지난해처럼 신나고 들썩거리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상석은 역시 6학년이었던 우리가 떠나니까 성가대 분위기가 그렇게 가라앉은 것이라고, 후배들 앞에서 신이 나서 떠들었다. 후배들도 그런 식으로 대답했다.
"오빠 언니들이 나가니까 성가대가 너무 힘이 없어."
"형들이 없으니까 그렇잖아. 다시 와라, 형."
나도 그렇게 짐작했다. 어린이 성가대는 주로 5, 6학년이 주축이었는데, 6학년이 모두 나간 직후라 성가대 규모가 푹 줄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소리도 작아지고 분위기도 가라앉았을 거라고. 그것은 우리를 상실한 후유증일 거라고.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은희와 마주 보고 잠시 대화했다. 은희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나는 난롯가에 서 있었다. 천장 등을 한쪽에만 켜놓아서 그런지 교육관이 약간 어두침침한 가운데 은희의 눈이 반짝거렸다. 은희는 상석과 나를 봤을 때 처음에만 신나게 떠들더니 이내 말수가 줄어든 듯했다.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은희는 예전처럼 해맑아 보이지는 않았다.
매우 춥고 흐린 날이라서 그런지 아이들은 곧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은희의 단짝 친구인 미연도 은희에게 집에 가자고 말했다. 은희의 얼굴을 보게 된 반가움은 금세 잦아들고 나는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서늘해지는 듯했다. 말로는 자주 놀러 오라고 하고, 자주 놀러 오겠다고 했지만, 실은 그러기가 어렵다는 것을 은희는 알고 있었을까. 내 처지가 이미 달라졌다는 것을 은희는 이해할 수 있었을까.
"오빠는 어느 중학교로 가게 됐어?"
"강서중학교."
"강서중학교? 어디에 있는데?"
"나도 몰라. 버스 타고 독산동까지 가야 한대.
"독산동?"
"대림동 지나서 독산동."
미연이 다시 집에 가자고 재촉했고 은희는 일어나서 회색 코트를 입고 노란 스카프를 매면서 말했다.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들이 스카프 속으로 감춰지는 것을 보면서 내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오빠도 곧 머리 빡빡 밀어야겠네?"
"그럼 중학생은 그래야 하니까."
긴 나무의자에서 은희 옆에 앉아 있었던 나는 차마 일어나지 못한 채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렇잖아도 못 생겼는데 정말 못 생겨지겠다."
"야, 아무리 못 생겼어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사실을 올바로 알라고 말해주는 거야."
은희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아쉬운 웃음을 흘리고 은희는 교육관을 떠났다. 교육관 안 빈 공간에 은희의 웃음소리가 남아있는 듯했다. 나중에 또 오라는 은희의 말이 아득하게 들리는 듯했다.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머리를 빡빡 밀은 모습을 은희는 보지 못했다. 머리를 빡빡 밀고 검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못 생겨졌는지 모르게 됐다. 그러니 그것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은희를 마주 보고 대화했던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해 봄에도 일요일 아침 예배가 끝난 후에 우연히 교회 마당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일요일이라 사복을 입었지만 짧은 머리의 내 모습을 보았을까. 그랬을지도.
그러나 그런 기회가 생겼다면 혹시 무슨 대화를 했을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교회에서 나는 늘 옆에 친구가 있었고, 그것은 은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넓지 않은 교육관이나 마당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떠들거나 오갈 때 아주 우연히 마주쳤다 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미소만 지은 채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대화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3월이 되어 개학했고 나는 줄곧 긴장된 학교 생활을 해야 했다. 초등학생 때와는 전혀 다른 긴장감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다. 마음속에는 늘 은희가 해맑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지만 토요일 오후에 차마 교회로 찾아갈 수는 없었다. 왠지 모르지만 나는 이미 초등학생 때와는 다른 세계에 들어가 있는 듯했고, 두 세계 사이에는 넘기 힘든 담벼락이 놓여 있는 듯했다.
9.
어찌 보면 5학년에서 6학년으로 바뀌는 것처럼 6학년에서 7학년으로 바뀌는 것도 겨우 한 학년 올라가는 것이지만 현실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중학교의 학급 친구들은 처음 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그들과 친해지는 것은 조심스럽기도 하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선생님들도 아직 신입생들과는 친하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군기를 잡는 듯 매우 차갑고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므로 우리는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나 교실에서 조금이라도 잘못 행동하면, 또는 교복을 조금이라도 규정에 맞지 않게 입는다면, 또는 버스를 타고 가느라 아침에 조금이라도 지각하게 된다면, 학생들은 금세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초등학생 때는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어린이들이라 선생님이 그렇게 혼내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중학교 때는 선생님들이 더욱 폭력적이었다. 처벌은 더욱 강력해졌고, 아이들 간에 벌어지는 주먹싸움도 살벌해졌다. 초등학생 때와는 차이가 있지만, 크게 본다면 중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학교는 나에게 아직 밤의 세계였고 교회는 낮의 세계였다.
나는 빨리 일 년이 지나가고 은희가 중학생이 되어서 중고등부 성가대로 오기를 기다렸다. 6학년이었을 때 크리스마스 성가극을 연습하면서 나는 은희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까 너도 빨리 중고등부 성가대로 와.”
“오빠 먼저 가 있어. 나도 곧 갈게.”
은희는 자기도 중학생이 되면 중고등부 성가대에 들어올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의 생각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때 은희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직 너무 어려서 자기 집안에서 벌어지는 대사를 알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나 은희는 그해 언젠가 사라졌다. 나는 중학생이 된 은희를 볼 수 없었다. 중학생이 되어 단발머리를 하고 큰 교복을 입은 은희를 본 적이 없다. 은희는 6학년을 마치기도 전에 대방교회를 떠났다.
나는 그해가 끝날 때까지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계속 은희가 중등부로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다음 해 정월이 되어서야 은희가 중등부 예배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 은희가 사라졌구나. 도대체 언제 어디로 갔을까.
마음속으로는 깊은 아픔이 되살아났지만 누구에게 묻기도 어려웠다. 나보다 교회 사정에 밝은 상석도 은희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대놓고 은희를 찾아다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마도 어릴 때 친구들이 아무 기약도 없이 헤어지는 것처럼 은희도 어디론가 이사 갔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러지 않고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교회에 출석했던 은희가 교회에서 불현듯 사라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일 년의 기다림이었다. 그 상실감과 아쉬움은 너무 컸지만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저 가슴속으로 차오르는 긴 숨을 토해내고 은희와 뛰어놀던 빈 마당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항상 그렇지만,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은희에 대한 그리움은 타고 남은 재가 식듯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학교 생활은 더욱 바빠졌고 나는 어느새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사춘기는 누가 뭐라고 하든 하지 않든 혼자서도 늘 깊은 고민에 휩싸이는 혼란기였다.
은희에 관해서는 아주 긴 시간이 흐른 후에 듣게 되었다.
은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대학생이 된 후에도 어릴 적 추억을 입에 올릴 때마다 여전히 은희를 입에 올리는 나에게 상석은 다른 후배로부터 들었다면서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해에, 그러니까 은희가 6학년이고 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은희 가족이 모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는 것을.
"아니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나도 최근에 알게 된 거야."
갑자기 서늘해진 가슴을 누르고 나는 상석을 탓했다. 실은 상석을 탓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나는 누군가라도 탓하고 싶었다. 은희가 그렇게 일찍 사라졌다는 것을 그냥 믿기는 싫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적 관계였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은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민 갔다는 은희는 잘 살았을까.
혹시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아니면 아직도 캐나다에 살고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성숙한 은희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은희가 환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과 두 손을 모아서 기도하는 어릴 때의 모습만 떠오를 뿐이다. 그 모습은 마치 초상화인 듯 아직도 내 가슴 한 구석에 깊이 새겨져 있다.
10.
아주 아주 긴 시간이 흐른 훗날, 뉴욕에서 가족 모임을 할 때였다. 나는 형과 옛날 대방교회와 성가대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도 어린이 성가대의 성경공부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그때 성가대 아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여러 친구들과 선배들에 관한 추억을 떠올렸는데, 어린이 성가대 지휘자였던 강영근 전도사에 관해서도 말이 나왔다.
“강영근 전도사, 그분은 잘 지내고 계신가? 지금은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겠지?”
“아니야, 너는 모르고 있구나. 그분은 벌써 오래전에 죽었어.”
“아니 왜?”
나는 놀라서 외쳤다.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몰라.”
형도 한국을 떠난 이후 그에 관한 소식을 모르고 있다가, 마침 최근에 대방교회에 함께 다녔던 친구로부터 그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소식에 나는 너무나 놀라고 낙담하여 말했다.
“언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거지?”
“서른도 안 됐을 때라고 하던데.”
"서른도 안 되어서? 그렇게 일찍?"
나는 심히 놀라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20대 초 푸른빛 대학생이었던 그가 불현듯 떠올랐다. 우리 앞에서 팔을 들어 지휘하던 모습, 두 손을 모으고 진심을 담아 기도하는 모습, 노래를 부르는 모습, 우리에게 성의껏 노래를 가르치던 모습, 물구나무서기와 나무를 잘 타던 모습 등. 그는 날쌘돌이와 같아서 나무를 무척 잘 탔고, 손이 바닥에 닿지 않고도 뒤로 공중돌기를 할 수 있었다.
그가 지휘자로서 성심성의껏 우리를 가르쳤던 태도와 진지한 목소리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가 가진 특유의 억양과 제스처까지.
훗날, 나는 그것이 교육자의 진정한 자세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학교 교사들이 언제나 툭하면 학생들에게 소리 지르고 윽박지르고 때리면서 가르쳤던 시절, 그는 그런 교사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는 성가 연습 때 종종 그의 가슴으로부터 전해지는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중학생이 된 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여러 합창대 지휘자를 보았지만, 강영근 전도사만큼 나에게 인상적이고 큰 영향력을 주었던 사람은 없었다.
11.
나중에 나는 깨달았다.
나에게 어린이 성가대는 가족이나 학교와 전혀 다른 세계였다.
그것은 기독교나 교회라는 더 큰 범주에 속한 작은 세계였지만, 내가 그 범주 안에 안착할 수 있도록 원동력이 되었던 작은 공동체였다. 그 성가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교회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더 일찍 뛰쳐나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결국 어린이 성가대를 통해서, 그리고 나아가 그것을 극복하면서 교회와 기독교라는 세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에 학교는 나에게 매우 재미없는 곳이었다. 나는 학교에 가기도 싫었고 공부도 거의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교회는 대단히 흥미롭고 행복한 곳이었다. 학교는 대체로 강압적이고 수동적이고 구속된 세계였지만, 교회는 상대적으로 자발적이고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세계였다. 학교는 매우 자주 지나친 경쟁과 위협과 폭언과 폭력이 발생하는 곳이었지만, 교회는 거의 언제나 존중과 웃음과 사랑이 흐르는 곳이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의 교회생활은 더욱 풍부해졌다. 초등학생에서 시작한 그 문화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그 절정이란, 나의 종교적 신앙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님을 당신은 이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와 관련하여 진지하게 신앙심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에게 교회는 신앙의 공동체로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나에게 교회는 우정과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라는 의미가 더 컸다.
초등학생 때부터 만나기 시작한 교회 친구들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이미 아주 단단한 관계를 형성했으므로,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가까운 친구들끼리 사적으로 모일 때가 많았다. 사춘기에 접어든 우리들은 어릴 때와 달리 조금 더 성숙하게, 우정과 더불어 애정을 품기도 했다. 남녀 학생들이 모인 만큼 이성 간에 좋아하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매주 만날 수밖에 없는 교회에서 종종 어색하고 거북하고 껄끄러운 관계가 되기도 했지만,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겪는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었다. 이따금 발생하는 낯설고 어색한 관계는,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한, 점점 굳어지는 ‘우리’라는 그룹 안에서 저절로 용해되고 해소되었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어쩌면 ‘우리’라는 집단적 관계로 인해 우리들 사이에 조금 더 사적이고 은밀해야 할 개인적 관계는 오히려 억제되고 제한되었다.
다른 친구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것은 내가 특별히 남자 친구들과의 우정, 나아가 ‘우리’ 모두의 우정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당시 나에게 있어서, ‘우리’는 ‘나’보다 중요하게 취급될 때가 많았다. 그러한 치열한 공동체주의와 그것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나 스스로 정한 임무와 책임감, 또 그러한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자책감과 나의 한계로 인해, 결국 나는 역설적으로 교회에서 때때로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팔자인 듯하다.
나 스스로 그러한 상황으로 나를 몰고 갔던.
하여간, 그 모든 시간이 지나고 나서 질풍노도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면 이렇다.
가족과 학교라는 나에게 주어진 양대 세계와 달리, 내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제3의 세계가 되었던 교회라는 곳은 사회적 억압과 대학 입시라는 고된 인생 여정에서 일정한 피난처가 되기도 했고 해방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 개인적으로는, 그때를 두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듯하다.
학교는 밤의 세계이고, 교회는 낮의 세계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