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전도 (1)

대방교회 이야기

by memory 최호인

1.


거의 모든 종교가 포교를 중요시하겠지만, 한국의 개신교회는 특히 더 그래 보인다.

교단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들은 대체로 매우 공격적으로 포교하는 편이다.


전도 또는 포교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가장 전통적인 방법 중 하나는 적극적이고 사명감에 찬 신도가 길거리에서 아무 행인이나 붙잡고 포교 활동을 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그런 일이 무척 많았다.


길을 가다가 그런 포교를 당한 사람이 많겠지만, 어릴 적 내 경험을 말하자면 이렇다.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누군가 갑자기 할 말이 있는 듯 다가와서, 지나가는 당신을 굳이 붙잡고 말을 건다면, 그것은 거의 두 가지 중에 하나였다. 하나는 집에 갈 차비가 떨어졌으니까 돈을 꿔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공부를 하거나 교회 모임에 같이 가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돈을 꾸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보통 양아치 아니면 말쑥해 보이는 남성이다. 양아치들은 말 그대로 돈을 강탈하기 위함이고, 말쑥해 보이는 남성은 차비가 필요하다면서 돈을 빌리려고 한다. 양아치를 만나면 최대한 말을 섞지 말고 빨리 도망가는 게 최고다. 일반적으로 양아치들은 남의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굳이 멀리까지 쫓아오면서 강탈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차비가 필요하다고 돈을 꾸려고 하는 사람은 주로 착하거나 맹하거나 순진해 보이는 사람을 선택하고, 딱한 사정이 생긴 표정으로 급히 다가와서 말을 건다. 주로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하면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어느 곳까지 빨리 가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돈을 빌려주면 다음에 반드시 갚겠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옛날이야기다. 요즘은 전화기나 신용카드를 가지고 다니니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돈을 빌리고 싶다면서 접근하는 사람은 주로 혼자 일(?)하지만, 종교적 전도는 대체로 여러 명이 함께 행동한다. 이들도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지 않는다. 그들은 행인들의 얼굴이나 차림새를 보고 대체로 단정한 복장에 순박하고 착실하고 만만해 보이는 사람을 붙잡는다. 만약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거나 대화가 되는 듯하면, 금세 두세 명이 달라붙어서 말할 때가 많다. 냉정하게 거절하기가 뭣해서 어떤 대답이라도 하는 상황이 되면 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밀어붙인다.


그들은 보통 말쑥하게 차려입고 잘생기거나 예쁘게 생긴 사람을 앞에 내세운다. 그래야 붙잡힌 행인이 관심을 갖고 대화에 응하기 때문이다. 먼저 교회 다니냐고 물을 때가 많은데, “안 다니는데요.”라고 하면 교회에 재미있는 모임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한다. 선제적 대응 차원에서 “교회 다니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이번에는 성경토론 모임에 가자고 한다. 어떻게 해서든 대화를 이어갈 구실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길거리에서 돈을 빌려준 적도 있고 양아치에게 돈을 빼앗긴 적도 있고 전도를 당한 적도 있다. 전철역에서 신사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에게 차비를 준 적도 있고,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예쁜 여자에게 잡혀서 끌려간 적도 있다. 하여간 결과는 모두 좋지 않았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보면 내가 순박하거나 맹하거나 멍청해서 그랬다는 말이다.


2.


십 년 전쯤 여름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때 나는 탑골공원 근처에서 한 달 동안 체류했으며, 주변 거리를 걸어 다닐 때가 많았다.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는 모두 걸어 다닌다고 생각하고 다녔었다.


탑골공원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언제나 종각역 근처에서 행인들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쁘게 차려 입은 젊은 여성 두 명이었다. 나는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저들이 언젠가는 나를 붙잡고 말을 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때까지는 다행히 내가 지나갈 때마다 그 여성들이 마침 다른 행인을 붙잡고 대화하고 있었으므로 나에게 말을 걸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 맑은 날 드디어 때가 왔다. 하필 길거리에 행인이 거의 없었다. 내 앞에는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걷고 있었고, 전방에는 여느 때처럼 그 두 여성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할아버지와 나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잠시 뭔가 논의하는 듯했고, 드디어 탐색이 끝났다는 듯 말을 걸 준비를 했다. 나는 그들이 내 앞에 있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나를 선택했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걸 것이라는 느낌이 든 순간 나는 잠시 망설였다. 뭔가 잊어버리고 왔다는 것을 돌연히 깨달았다는 듯 뒷머리라도 긁적이면서 그냥 뒤로 홱 돌아서 도망갈까. 그런 고민이 머리를 스쳤지만 엉뚱하게도 그것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나는 용감하게 차분히 걷기로 했다.


“도를 아십니까?”


아마도 그 당시 한국에서 가장 유행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대순진리회. 또는 증산 계열의 종교에서 포교할 때 퍼뜨린 말.


기독교인들이 “교회 다니세요?”라고 물으면서 전도를 시작하는 것처럼, 그들은 거의 언제나 그런 물음으로 시작하면서 낯선 행인을 붙잡고 포교한다고 했다. 그 종교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포교 활동을 하는 것으로 너무 유명해서, 나는 그들에 관한 뉴스와 에피소드들을 이미 익히 듣고 있었다.


7월의 뜨거운 여름날 오전 11시쯤이었다. 화사한 원피스 드레스를 입은 두 여성과 겨우 5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내 앞에 걷던 할아버지를 무사통과시키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 나는 레이더에 걸린 사냥감과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들이 말을 걸 때 대답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그 젊은 여성들이 나에게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니요. 모릅니다. 나는 매우 신실한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해야겠다고. 그렇게 마음을 먹고 당당한 자세로 앞으로 전진했다. 그들은 역시 상냥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인상이 좋아 보이네요. 잠깐 저희와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들은 뜻밖에도 나에게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하얀 치아가 보일 정도로 예쁜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띤 채. 예상이 빗나가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도를 아십니까?”가 아니라, “인상이 좋아 보이네요”라니!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순간적이지만, “저는 신실한 기독교인인데요.”라고 말하는 것은 어울리는 대답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얼굴이 뽀얗고 젊고 예쁜 여성 두 명이 겨우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나에게 생긋생긋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는데도, 나는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라 긴장해서 얼굴이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가빠지는 듯했다. 그들로부터 옅은 향수 냄새가 풍겨오는 것이 느껴졌다. 찰랑거리는 머리에서 풍기는 것인지 몸에서 풍기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부드럽고 향긋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들은 얼굴에 약간 어색한 미소를 보이면서도 매우 나긋나긋한 느낌을 함께 전하고 있었다. 그들의 싱싱한 젊음과 밝은 미소에 나는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두 여성이 내 앞에 너무나 가깝게 서 있었고 그들로부터 묘한 기운이 전달되는 듯했다. 뭔가 거부하기 힘든 관능적 기운이랄까, 매혹하고 잡아당기는 기운이랄까, 아무튼 그런 긴장된 기운이 팽팽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환한 미소를 띤 그들의 붉은 입술 속에서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아주 순간적이지만, 그들도 약간 긴장한 듯 봉긋한 가슴이 일렁거리는 듯했다.


이런 긴장감, 또는 기싸움이 왜 생기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금세 마음을 가다듬고 그들의 부드러운 웃음에 넘어가서는 안 되며, 냉정하고 단호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그들과 말을 길게 섞으면 안 되고 그들을 따라서 그들의 도장으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에게 강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나는 순간적으로 멍청하게도 이렇게 대꾸했다.


“I am sorry. I don’t understand what you are trying to say. Can you speak English?”


나는 내 목 아래서부터 경직된 목소리가 겨우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미안하지만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영어로 말할 수 있겠어요?”라고 영어로 빠르게 말하면, 그들이 당황하면서 나를 그냥 통과시켜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완전한 착각이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두 명의 여자 중 곱상하고 작은 여성은 살짝 뒤로 빠지면서 덩치가 나만한 여성이 갑자기 반갑다는 듯 더욱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Wow, I am glad that you can speak English. Of course, we can speak English. I used to live in America; I graduated from a college in California.”


그녀는 자기도 미국에서 살았었고 캘리포니아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면서, 영어로 대화할 수 있다고 나보다 훨씬 유창한 영어로 떠들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유창한 영어 앞에서 나의 짧은 한국식 영어 발음이 금세 탄로 나는 듯했다.


나는 매우 당황했지만, 잽싸게 전략을 바꿔야 했다. 이제 와서 한국어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또한, 그녀와 길게 대화할 형편이 아님을 직감하고, 나는 더욱 냉정하고 대담해지기로 했다.


“Oh my God. That’s wonderful. But I am sorry. I have to go now. I have a very important meeting.”


나는 황당하고 얼떨떨해진 표정을 한 채, 미안하지만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당장 가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의 또 뭐라고 말하기 전에 용기를 내어 그들 사이를 뚫고 나가려고 했다. 그녀는 약간 비켜서면서도 한 손으로 나의 팔을 붙잡고 영어로 뭐라고 또 떠들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고 앞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목에다 깁스라도 한 듯,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쳤다. 목에 너무 힘을 주어서 뻣뻣해진 듯했고 뒷머리가 몹시 따갑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나는 내가 그 젊은 전도인들의 수준을 무시하고 섣불리 행동한 것을 후회했다. 대순진리회에서마저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야말로 우수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이렇게 포교 형태로 나타나고, 그날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나에게 구현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내가 처음에 말하고자 했던 교회의 전도활동도 대순진리회의 그 젊고 똘똘하고 활발한 여성들의 포교 활동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교회에 가자고 하거나, 예수를 아느냐고 묻거나,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거나,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 등이, “도를 아십니까?” 또는 “인상이 좋아 보이네요.”라고 말하는 것과 무슨 큰 다른 점이 있느냐 말이다.



3.


1970년대 중반은 대한민국 개신교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대한민국에 개신교 신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때였다. 기독교와 관계없이, 나이 든 사람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1973년 빌리 그래함 목사의 여의도 전도집회를.


그래함 목사는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여의도 광장에 집결한 오십만 명이나 되는 군중 앞에서 열의를 가지고 설교했다. 그는 대단한 부흥 강사였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여의도 광장 집회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텔레비전에서 보았을 때, 정작 그래함 목사보다 그의 설교를 동시통역하는 김장환 목사의 목소리가 더 열정적이었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여러 부흥회에 참석한 적이 있지만, 김장환 목사가 했던 연설보다 더욱 신기하고 감동적인 것은 없었다. 내 말은 그들의 설교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연출하는 분위기가 그렇다는 말이다. 수십만 명의 군중 앞에서 엄청난 음량을 가진 스피커를 통해, 영어와 한국어가 쉼 없이 교차되면서 파도를 타듯 흘러나오는 그 분위기! 그것은 대단한 연설이면서 선동이었다.


수많은 분파가 있는 개신교에서 초교파적으로 개최한 이 집회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끝났다. 그 정도 대규모 집회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그리 많지 않은, 또는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집회가 대한민국 개신교에게 끼친 영향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특히 개신교의 전도에서 그랬다.

그래함 목사 집회 이후 전국적으로 개신교회마다 전도 열풍이 불었다.


그 열풍은 우리 교회에도 밀어닥쳤다.


그 전도 집회가 끝난 지 겨우 한 달이 조금 더 지난 후, 그해 여름방학에 우리는 교회에서 그래함 목사의 특별 은혜를 입은 전도 강사들로부터 전도활동을 위한 특별 훈련을 받았다. 그 열정적이고 집중적이고 세뇌적인 훈련을 통해, 나는 겨우 6학년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거룩한 십자군이라도 된 것처럼 전도자로서의 사명감에 불타오르게 되었다.


여름방학 특별 부흥 집회를 통해 우리는 전도야말로 기독교인으로서 수행해야 할 최상의 임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때 우리가 교회에서 반복적으로 배우고 연습한 후, 거리에서 누군가를 붙잡고 실천해야 할 전도활동의 첫 문구는 이랬다.


“사영리를 아십니까?”


사영리란, 지금은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때 교회에서 전도를 위해 가르쳤던 기독교의 네 가지 기본적 영적 원리다. 아마 그 주된 원리는 천상에 있는 하나님과 지상에 있는 인간을 연결하는 중앙에 예수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는 십자가의 원리 같은 것이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다리로 하여 하나님이 있는 천당으로 갈 수 있다는 그 논리는 십자가 그림과 약간의 설명 문구들로 구성된 조그만 수첩으로 제작되었다. 그 수첩이 바로 전도의 도구였다.


우리는 사오일 동안 열정적인 훈련을 받은 후에 손바닥만 한 그 책자를 무기로 삼아 전도의 전선으로 출정해야 했다. 교회는 전도의 사명에 지나치게 투철한 나머지, 어린 초등학생들에게도 '사영리'라는 수첩을 무기로 주고 거리로 나서도록 했다.


8월의 무더웠던 어느 날 오후. 나는 교회 친구 한 명과 함께 영등포로 가서 전도활동을 하도록 배정받았다. 친구와 나는 순교의 사명이라도 띤 듯 굳은 결의를 가지고 버스를 타고 영등포 역전으로 향했다.


길거리에서 막상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말을 붙이려고 하니, 우리는 저절로 망설이게 되고 겁도 났다. 우리는 아무래도 어른들보다 또래 어린이를 찾아서 전도하는 게 낫겠다고 합의했다. 결국 용기를 내어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여자아이에게 다가가서 다짜고짜 말을 붙였다.


“저 혹시 … 사영리를 아세요?”


그러자 그 여학생은 우리를 보고 매우 놀라서 대꾸도 없이 도망갔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이후에도 다른 학생을 붙잡고 몇 차례 더 그렇게 말을 붙였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이라 극도로 어색했지만, 몇 번 해보니까 쑥스러움이 줄어들고 약간 재미있기까지 했다. 상대방으로부터 거부당한다 해도, 하늘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오늘날까지 길거리에서 포교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그런 마음일 것이라 추측한다.


우리는 그렇게 몇 차례나 또래 학생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들 중 아무도 사영리를 안다고 대답한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다짜고짜 사영리를 아느냐고 물으면 누가 안다고 대답하겠는가.


그러니 비슷한 말이겠지만, 길 가는 사람에게 갑자기 “도를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누가 감히 “도를 압니다” 또는 “도를 모릅니다”라고 대답하겠는가 말이다. 우리가 숭고한 전도의 사명으로 말을 걸면 낯선 그들은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줄행랑치든지, 도대체 사영리가 누구길래 나에게 묻냐는 식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그들은 때때로 참 안 됐다는 표정을 짓거나, 어이없다는 싸늘한 표정을 짓고 지나갔다.


“누구요?"

"사영리..."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차갑게 말을 뱉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는 그들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절대로 그들을 욕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속으로 “하나님 아버지, 저 사람이 안타깝게도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날 결국 전도에 성공하기는커녕, 지나가는 행인 누구와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일생 동안 약간 창피하게 그러나 매우 재미있게 기억하는, 유일한 ‘길거리 전도활동’ 경험이었다.


이후의 사실을 조금 더 밝히자면, 교회에 다니는 동안 나는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남에게 전도한 적이 없다. 아니, 어떤 방식으로든 의도적이거나 적극적으로 전도활동 자체를 한 적이 거의 없다. 개인적으로 잘 알지 않고 친하지도 않은 누군가에게 우리 교회에 오라고 말할 만큼 숫기가 많지 않았고, 그것이 올바른 일인가에 관해서도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신앙을 전하고자 할 때는 먼저 나의 내부에 깊은 확신이 서고, 마치 물이 차면 자연히 넘쳐흐르는 것처럼, 삶의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절실함이 솟아나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것이 부족했다.


학교에서 마음에 드는 친구에게 대방교회에 오라고 권유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 친구에게 나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았고, 내가 속한 세계를 어느 정도 노출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약간 부담이 가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중학생 시절, 나의 권유로 인해 우리 교회를 방문했던, 나와 가까운 학교 친구들이 서너 명은 있었다. 그것은 꼭 전도행위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들과 친한 나머지, 그들과의 우정을 주말까지 연장시키기 위해서 우리 교회로 오라고 말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들도 어쩌면 나에 대한 우정과 관심의 연장선에서 우리 교회를 방문했을 수 있다. 굳이 자기 교회로 오라고 하는 이 친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어떤 친구들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온 친구들은 오래지 않아서 교회를 떠났다. 그들은 한두 차례 교회에 와서 반갑게 나를 만났을 뿐이다. 신앙 문제를 넘어서, 학교 친구들이 굳이 일요일 아침에 버스까지 타고 우리 교회로 올 까닭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나의 신앙생활은 긴 고민 끝에 어느 정도 정리됐다. 따지고 보면, 그때는 교회나 신앙에 앞서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 소중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교회 친구들과의 관계가 학교 생활 다음으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으므로.



4.


빌리 그래함 목사의 그 불타는 여의도 집회가 없었다 해도, 1970년대에 대한민국의 교회는 분명히 놀라울 정도로 부흥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에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제3공화국을 건설했다. 그것은 이미 쿠데타로 집권했던 그가 어떤 위기감 속에 다시 한번 친위 쿠데타를 벌인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골치 아픈 정치를 잊고 종교에 심취해 보기를 권하는 듯, 이듬해 봄에 빌리 그래함 목사를 불러들였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또한 자신의 기독교적 사명을 가지고,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그래함 목사의 전도집회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집회가 되었다. 그 집회 이래 대한민국 개신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광범위하게 부흥했고, 전국적으로 전도의 불길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이 ‘제2의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유태인들처럼 우리 민족을 선택했다는 선민의식을 갖는 기독교인이 무척 많아진 때였다.


그때는 또한 한국의 산업화 과정이 본격화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으며,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교회는 낯선 대도시의 변두리에서 고향을 떠난 삶의 불안감과 외로움을 덜어내고 차가운 도시생활에 적응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전통시대의 문화에서 막 벗어나는 대한민국에서 교회는 서구화의 상징이었고, 시골스러운 사람들이 도시 문화와 서구 문화에 친숙해지는 효과를 주는 성물과도 같았다.


그렇게 해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기업형 교회들이 한국에서 탄생하고 득세하기 시작했다. 여름날 비 온 후에 잡초 자라듯 신학교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아주 짧은 시간에 개신교회의 십자가가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졌다. 교회들은 기업들이 상품 판매와 지점 숫자를 늘리기 위해 경쟁하듯이 신도 숫자를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그들에게 전투적인 길거리 전도는 일상화되었다.


그들은 교회마다 가장 높은 곳에 십자가를 세우기 경쟁을 했다. 교회마다 첨탑을 세우고 그 끝에 피뢰침과 같은 십자가를 세웠다. 밤이 되면, 그 십자가는 일제히 환하게 불을 밝혔다. 그래서 어두운 밤에 달동네 같은 높은 곳에 올라가면, 누구나 저절로 도시 곳곳에 울긋불긋 불을 밝힌 십자가들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보기에 따라서 희망의 십자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절망의 십자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캄캄한 어둠 속 드넓은 대지 위에 붉은 십자가들이 둥둥 떠 있는 듯한 풍경을 다시 상상해 보라!

훗날 대학생이 되어 불현듯 사회정치적 의식이 늘어난 나는 그것이 거대한 공동묘지의 광경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말을 할 때, 혹시라도 내 말을 비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까 봐 미리 처량한 변명을 얹어놓는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그렇겠지만, 모든 교회가 헛된 영화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고, 모든 목회자가 선한 양들을 악의 골짜기로 몰고 가지는 않음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많은 교회에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종교인들이 있었을 테고, 진정으로 낮은 곳에 임하여, 스스로 낮은 종이 된 목회자들로부터, 힘들고 고된 삶에서 평화의 안식을 얻은 중생도 많았을 것임을 나는 결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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