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 이 책의 말미에 이르러 전체적인 정리도 할 겸 대방교회와 나의 관계에 관해 조금 더 설명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글을 처음부터 여기까지 읽었다면 당신은 내가 대방동과 대방교회에 특별한 애착과 추억을 가지고 있음을 진작에 알아챘을 것이다. 대방교회의 추억에 관해서는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더 있다. 그러나 나는 대방교회보다 대방동에 더 오래되고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어쩌면 대방동과 나의 관계에 관해 먼저 밝히는 게 낫겠다.
나는 대방교회에서 만났던 친구들 일부와 아직도 가끔 연락한다. 초등학교 성가대 시절부터 모인 사람들을 주축으로 하여 중학생이 되었을 때 만난 친구들을 포함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교회 친구들은 '우리'라는 약간 배타적이지만 자발적인 모임으로 발전했다.
우리는 고등학교 초기까지 교회에 열심히 다닌 편이지만, 대학입시 공부에 시달리면서 한 명씩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 중 다수는 고등학교 2학년 초부터 여름 사이에 떠났고, 나는 2학년 말까지 버티다가 떠났다. 그해 말에 고등부 연간 잡지인 '빛'을 발간하고 나서 비로소 내가 대방교회를 떠날 때에도 상석과 지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들의 신앙심이 남달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의 부모님이 워낙에 대방교회의 터줏대감 같은 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간 나는 그 친구들에게 농담 삼아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너희 가운데 나보다 더 대방동에 애정을 가지고 있거나 ‘대방동스러운’ 사람은 없을 거야. 나야말로 진정한 대방동의 아들, 대방동 토박이야. 우리 가운데 대방동에서 태어나서 대방동에서 올곧이 자란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걸.”
농담 반 진담 반이다.
‘대방동스럽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는 무슨 자랑거리가 되기나 할까.
그저 친구들에게 하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하다.
확신하건대, 나 못지않게 친구들도, 그들 모두 나름대로 대방교회와 대방동에 오랜 추억과 애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설령 그들보다 내가 대방동에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고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90년대 이후 서울이, 특히 강남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동안 대방동과 그 일대는 상대적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소외되었다. 그래서 그런 경제적 성과로만 좁혀서 말한다면, 대방동에 관해 특별히 자랑스럽게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 대방동은 그렇게 경제적 시각으로만 따질 곳이 아니다.
대방동은 강남처럼 획기적으로 발전되지 않아서 아직도 수십 년 전의 옛 정취가 남아 있다. 오래된 건물을 잘 보존하기보다는 툭하면 허물어버리는 한국인들의 습관으로 인해 대방동의 건물들은 모두 바뀌었지만, 어릴 때 내가 뛰어놀던 골목과 도로들은 지금도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비록 겉모습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내가 어릴 때 다니던 대방교회와 강남중학교와 대방초등학교와 성남고등학교와 서울공업고등학교도 그대로 있다. 그 당시에 내가 살던 집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새 건물이 세워져서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지만, 그 터와 도로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다.
거기를 모두 뒤엎어버리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면 나는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 동네로 가보면, 나는 조금이라도 옛 생각을 떠올리면서 어린 날의 추억에 쉽게 젖어들 수 있다.
옛것을 함부로 밀어버리고, 그 위에다 새것을 짓는 습관이 심한 한국사회에서,
대방동이 앞으로 언제까지 그런 모습으로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2.
나는 대방시장에서 태어났다.
여의대방로에서 대방시장으로 들어가면서 왼쪽에서 세 번째 가게의 뒤에 있었던 기와집이 내가 태어났다는 곳이다. 대방시장은 여의대방로를 가운데 두고 강남중학교 맞은편에 있다. 현재 여의대방로라고 불리는 강남중학교 앞 도로는 지금은 7차선이지만, 이렇게 도로가 확장되기 전에는 왕복 4차선이었다. 여의대방로라고 해서, “여의’ 자가 ‘대방’ 앞에 붙어서 하나의 도로명으로 인식되지만, 예전에 행정 개편이 있기 전에는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여의도는 대방동에 비해 나중에 신도시 형식으로 개발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여의대방로가 대방여의로로 이름 붙여져야 맞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여의대방로 확장 공사를 할 때, 정부는 강남중학교 쪽이 아니라 건너편에 있는 대방시장 쪽 건물들을 부수면서 도로를 넓혔다. 그로 인해 내가 태어나서 수년간 자랐던 대방시장 안 기와집은 그때 사라졌고, 그나마 크지 않았던 대방시장은 더욱 작아져서, 이제는 시장이라고 불리기에는 가게 몇 개밖에 안 남은 작은 거리다.
대방시장에 있었던 그 기와집에 관해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다.
나에게 남은 가장 오래된 기억을 짜내어 보면, 옛집의 입구와 마당과 방문들에 관한 아주 짧은 흑백 비디오 클립이 나온다. 시장에 있던 두 가게 사이로 난 좁은 통로를 지나서 턱이 높은 두 개의 나무 대문을 통과하면 네모난 마당이 있었고 그 옆에 기역자 모양의 기와집이 있었다. 그 기와집은 대방시장에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있는 세 번째부터 다섯 번째 가게의 뒤편에 걸쳐 있었던 집이었다. 아버지는 그 집과 집 앞에 있었던 가게 세 개의 주인이었고, 그 가게에 모두 세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에 우리 집은 가난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앞서 밝힌 대로, 나의 아버지의 고향은 충북 괴산이다.
초등학생 시절 그곳을 방문했던 내 기억으로는, 괴산은 그야말로 산속에 있는 깡촌이었다. 아버지는 3남 3녀 집안의 막내아들이다. 일제강점기에 농사만 짓던 아버지 집안은 매우 가난했고 먹을 것이 부족했다. 하도 먹고살기가 어려워서, 아버지는 자신만이라도 집을 나가서 따로 살아갈 방편을 모색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가세는 매우 기울었고 성인이 되어가는 아버지에게는 나이 많은 형들로부터 농사 부쳐 먹을 땅도 나눠 받지 못할 형편이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 끝에, 겨우 열일곱 살이 되었던 한겨울 날 아버지는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안정된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없었던 나의 친할머니는 막내아들이 집을 떠나던 날 아침에 겨우 감자를 쪄서 아버지가 등에 맨 봇짐에 싸주었다고 한다. 처참했던 일제 식민지 시대에 삶이 어찌나 궁핍하고 척박했던지, 아버지는 그 엄동설한에 나가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집을 떠났다. 아마도 눈물을 흘리며 막내아들을 떠나보냈을 친할머니의 마음을 나는 차마 헤아릴 수가 없다.
내가 어느 정도 자라서 듣게 된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의 집안은 원래부터 가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과거에 아버지 집안은 괴산 일대에서 꽤 부유한 집안이었다. 괴산에 살던 경주 최 씨의 후손인 우리 집안은 19세기 후반 나의 증조할아버지 시대부터 몰락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그러면서 집안 소유 전답이 사라지고 가세는 급속히 기울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 집안에 조금 남은 재산이라고 해야 집안의 장손인 큰형에게 집중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큰아버지인, 아버지의 큰형은 문중의 장손이었다. 그러니 일제강점기 내내 내리막길을 걸었던 집안에서 막내인 아버지는 부쳐 먹을 땅은커녕 소작농이 되기도 쉽지 않았던가 보다. 바로 그것이 아버지가 일찍이 출가해야 했던 까닭이었다.
3.
내가 막 대학생이 되었던 해의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약주 한잔 드시고 나서 옛날 노래를 서너 곡 연달아 부른 후, 밥상머리에 앉은 채 형과 나에게 우리 집안의 과거 역사를 전하셨다. 그 내용은 아버지께서 이전에도 형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던 내용이라, 형은 간간이 나에게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아주 오래전에 큰 사촌형 집에서 여러 권으로 된 족보를 본 적이 있다. 사연은 모르지만, 큰아버지 집안이 위기를 맞았을 때는 일시적이나마 그 족보가 우리 집에 보관되어 있기도 했다. 족보를 둘 곳을 찾지 못할 만큼 장손 집안 전체가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큰 사촌형이 신길동에서 편의점을 하면서 겨우 자리를 잡고, 괴산 지경에 있는 큰아버지를 대신해서 집안 제사를 도맡아 하게 되었을 때, 필경 족보는 그에게 돌아갔을 것으로 믿는다. 시골에 있는 큰아버지로부터 제사 행사를 모두 인수 받은 큰 사촌형은 제사를 지낼 때면 서울에서는 집안의 가장 웃어른이었던 아버지를 초청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제사에 참석할 때 곧잘 나를 데리고 갔다. 그때는 내가 아직 중학생이었을 때다.
내가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들었던, 우리 집안의 역사를 간단하게 종합하면 이렇다.
이것은 모두 아버지의 기억과 진술에 기초한 내용이므로, 그 안에 설사 어떤 과장이나 지어낸 이야기가 섞여 있다고 해도 그것을 객관적으로 풀어내거나 반증할 방법은 없다. 오늘날까지도 족보와 가문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여전히 많겠지만, 나는 그렇게 집안의 전통과 유산을 중요시하거나 세세히 따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것이 가치가 없고 하찮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미국으로 이민 와서 살면서 그런 문화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아버지 집안은 괴산에서는 꽤 부유했었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매우 명석해서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고, 어느 지방의 사또로 발령받았다고 한다. (이 점이 약간 의심스럽기는 하다. 머리가 좋아도 그렇지, 괴산 산골마을에서 과거 급제라니! 그러나 나로서는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파헤칠 방법이 없다.)
그런데 매우 병약했던 증조할아버지는 사또로 부임하기 바로 며칠 전에 돌연히 급사하셨다. 그 원인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집안에서는 당연히 엄청나게 커다란 불상사이자 비극이었을 것이다. 그가 명석하기도 했거니와 장손 집안에서 외동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증조할아버지의 돌연한 급사로 인해 그의 부친인, 나의 고조할아버지는 너무나 깊이 상심한 나머지 매일 술만 마셨다고 한다. 과거에 급제한 외아들이 아비보다 먼저 죽었으니 왜 아니 슬프겠는가. 집안에서는 고조할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었다. 그렇게 낙담하여 매일 술에 찌들어 지냈던 고조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수개월 만에 술독으로 세상을 뜨셨다. 그것은 우리 집안의 몰락의 시초가 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증조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갓 낳은 아들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집안의 대가 이어졌다!) 바로 그 아들이 나의 할아버지다. 그러니까 나의 할아버지는 당신이 갓난아이였을 때 그의 아버지가 돌연히 돌아가신 셈이다. 그는 부친 없이 나의 고조할머니와 증조할머니, 즉 그에게는 할머니와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명색이 장손 집안인데도 불구하고, 집안을 다스릴 건장한 남자가 없이 살면서 고조할머니와 증조할머니는 어렵게 살림을 꾸리고 살았으며, 그 바람에 할아버지 집안의 가세는 빠르게 기울었다.
그런 가운데 할아버지는 다행히 무사히 성장했다.
그는 혼인을 하여 아들 셋 딸 셋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아들이 나의 아버지다.
4.
17세가 되었던 정월 초 아침에 괴산 본가에서 출가한 아버지는 서울에 있었던 육촌형을 찾아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아버지는 자동차 기술자였던 그와 함께 서울을 떠나 만주로 갔다. 중국어라고는 겨우 몇 마디밖에 알지 못했던 그들이 곧바로 만주의 어느 한 곳에 정착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는 만주의 몇 곳을 열거했는데, 그들은 그런 곳에서 한동안 살거나 임시로 거주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동차를 고치는 기술이 없었지만, 육촌형과 함께 자동차 정비 공장 사업을 했다. 육촌형은 기술자였지만 말 주변이 없었고 머리가 그리 명석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수리 계산이 밝은 데다 특유의 친화력을 가지고 사업을 이끌었다. 다행히 그들의 사업은 잘 되었고, 아버지는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돈을 많이 벌어서 고향으로 금의환향했다.
당시로는 젊은 나이에 제법 부자가 된 아버지는 먼저 괴산으로 갔다. 아버지는 식구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았지만 그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서울로 가야겠다고 계획했던 것이다. 서울로 떠나기에 앞서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와 큰형에게 큰돈을 떼어주었다. 그것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때부터 막내아들이었던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몰락해 가는 집안을 다시 살리는 것.
또는 집안을 살피는 데 보탬을 주는 것.
그때 아버지는 미혼의 20대 중반 젊은이였고 집안의 막내아들이었으므로, 궁핍한 집에 가서 부모님에게 돈을 주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큰아버지는 장손이지만 가난하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잃었던 선산도 되사고 밭도 사서 큰아버지 명의로 주었다. 집안에서 아버지만이 고향 땅을 떠나서 자수성가한 분이었으므로, 아직 미혼의 젊은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그런 희생을 희생으로 여기지 않았던 듯하다. 아버지는 이윽고 시골을 떠나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대방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이 앞서 말한 대방시장 집이다.
대방시장에서 내가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은 아버지가 다른 사업을 했었던 왕십리로 이사했다. 또 얼마 후에는 신당동으로 갔다가 금세 다시 대방동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대방교회에서 아래쪽으로 네 번째 집이었다. 아버지는 예쁘게 생긴 적산가옥을 샀는데, 그 집이 바로 지금까지 내가 소개한 여러 에피소드가 벌어졌던 집이다.
그 집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이 지었던, 당시로서는 꽤 넓고 근사한 집이었다. 대문을 들어서서 현관에 이르기 전에 있는 넓은 앞마당에는 살구나무를 포함한 과실수들과 예쁜 꽃이 있는 화단과 아주 작은 연못까지 있었다. 동네의 구조상, 대문이 서향이므로 현관도 서향이었지만 집 자체는 본질적으로 남향으로 지어졌다. 그것은 우리 집 외에 우리 동네에 있는 다른 집들도 모두 그랬다. 각 집의 대문은 동향이나 서향이지만, 집 자체는 모두 남쪽을 바라보고 지어졌다.
그래서 앞마당과 현관방 옆 좁은 복도를 지나서 나오는 거실 마루는 남향이었고, 거실 마루에서 옆마당으로 나가는 출입문에는 작은 격자 모양의 창문들이 모인 큰 미닫이 유리문들이 여러 개 달려 있었다. 그 유리문 앞에는 수돗가가 있었으며 물이 매우 풍부하게 들어찬 우물도 있었다. 우리는 수돗물을 먹었지만 우물 물은 여름이나 겨울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우물물은 여름에는 아주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에는 앞마당에서 들어오는 현관으로 출입했지만, 곧 현관문을 아예 잠가두고 주로 옆마당으로 돌아와서 거실 유리문으로 출입했다.
나는 아마도 네 살 또는 다섯 살 무렵부터 그 집에서 살게 된 것이며, 그때부터 내가 비교적 잘 기억하는 나 개인과 우리 가족과 대방교회와 대방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 집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온전히 구체적인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가장 멀고 오래된 곳이 바로 그곳 그때부터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대방교회가 있는 우리 동네에 관한 추억이 많지만, 사실 거기서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다. 다섯 살 무렵부터 고등학교 2학년 3월 말까지 살았으니, 그 골목에서 10년 겨우 넘게 살았던 셈이다. 그래도 그곳에 많은 추억이 남은 것은 그때 내가 청소년 시기를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청소년 시절의 십 년은 훗날 나이 들어서의 이십 년보다 훨씬 의미 있고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때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날그날이 모두 비슷하지만, 그때는 하루하루가 모두 다르고 의미가 있었다.
당시 한국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하게 이뤄지는 가운데 서울은 급격하게 변화했다. 내가 대방교회가 있는 그 골목에 사는 십 년 기간 동안, 그 동네에 있던 집들 중 절반 이상이 이사를 오고 갔을 것이다. 사글세로 겨우 방 한두 개만 얻어서 살다가 떠난 사람들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때는 우리 집도 그랬지만, 한 집에 여러 가족이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다. 주인집이 집 한 구석을 비우고 전세나 월세를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전개되어서 수많은 농촌 사람들이 서울로 상경할 때였다. 서울에는 인구가 급증하는 데 비해 집이 턱없이 모자랐으므로, 낯선 사람들끼리 한 지붕 아래 모여 사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우리 동네에서 사는 사람만 바뀐 게 아니다. 건물도 많이 바뀌었다. 시간이 갈수록 여러 집에서 오래된 건물을 부수고 양옥집이라고 불렀던 더 큰 현대식 집을 짓기 시작했다. 새 집이 들어설 때마다 낡은 기와집은 사라지고 네모난 양옥집이 들어섰으며 건물은 더 크고 더 높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땅이 늘어난 것은 아니었으므로, 실제로는 마당이 줄어들고 건물만 커진 것이다. 땅은 그대로지만 건물이 커지고 높아지면서, 내가 뛰놀았던 동네 골목은 더욱 좁게 느껴졌다. 높은 양옥집이 늘어날수록 그 아래에서 볼 수 있는 하늘은 좁아지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서 내가 가장 변하지 않기를 바랐던 건물은 대방교회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을 때도 우리 동네에서 교회 건물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동네의 랜드마크와 같았다. 낮은 기와집들만 있었던 시절, 교회 건물은 가장 높았고, 예배당에는 세로로 기다란 예쁜 창문들이 있었으며, 예배당 천당은 높다랗게 박공 스타일이었다. 교회 건물 앞쪽에는 아주 높다란 첨탑이 있었으며 그 위에는 십자가가 있었고 그 꼭대기에 피뢰침이 있었다. 그때는 다행스럽게도 아직 첨탑 십자가에다 전깃불을 밝히지 않았던 때라 밤에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렸던 시절, 교회 마당 또한 우리가 뛰어놀기에 충분했다. 거기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고, 오래된 나무들도 있었으며, 본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는 아치형 스타일의 터널이 있었다. 그 터널 아래 양쪽에는 긴 돌의자가 있었다. 그곳에 앉아서 대화하거나 장난을 치기도 좋았고, 특히 비가 올 때 비를 피하기에도 좋았다. 나는 그 의자에 앉아서 성가대원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거나 ‘묵찌빠’를 하곤 했다. 그 교회 건물은 우리 동네를 품위 있고 여유롭고 특색 있는 곳으로 보이게 했다고 나는 믿었다.
누군가에게 우리 집 또는 내가 사는 곳의 위치를 설명하는 것은 무척 쉬웠다. 대방동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해군본부나 공군본부, 또는 서울공고나 성남중고등학교가 있는 동네라고 말했고, 대방동을 조금 아는 사람에게는 대방시장 맞은편이나 강남중학교 옆이라고 했다. 그 위치까지 아는 사람에게는 그냥 대방교회 아래라고 말하면 알아들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집이 어디쯤인지 거의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 과거에 대방동은 서울에서 한강 이남에서는 노량진이나 영등포와 함께 꽤 유서 깊고 유명한 동네였음이 분명하다.
6.
그때의 교회 모습, 그때의 동네 모습이 그립다.
아니, 어쩌면 그때의 나의 모습, 나의 그때가 그립다.
그때의 가족, 그때의 친구들, 그때의 미래를 향한 동경, 그때의……
오래된 단층 기와집들, 골대로 삼고 공을 찼던 차고 철제문, 동성여관과 태양여관이 있었던 작은 골목, 강남중학교 쪽에서 들어올 때 오른쪽으로 보였던 유리문들이 있었던 집들, 그 맞은편에 있었던 큰 기와집들, 담이 낮았던 낡은 집들, 언제나 대문이 열려 있어서 친구를 부르러 쉽게 들어갈 수 있었던 흙 마당이 있었던 집들, 새로 이사 오면 귀신을 쫓는 요란한 굿을 하기도 하고 떡을 해서 인사할 겸 옆집에 돌리던 사람들, 전세와 월세를 찾아 이사 왔다가 불현듯 떠난 가난한 사람들, 가난해서 순박하고 타인에게 겸손하고 머리 숙여 인사도 잘했던 사람들, 도시 주택가인데도 어딘가 시골스러운 정이 묻어 있었던 대방동 사람들.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정들었던 동네의 풍경은 점차 예전의 모습을 잃어갔다. 오래된 기와집들이 허물어지고 양옥집으로, 단층집이 복층 집으로 하나씩 하나씩 변해갔다. 그럴수록 건물은 커졌지만 골목은 좁아졌다. 또 훗날 어느 순간부터 동네 골목에서 뛰어놀던 아이들도 사라졌고, 그 자리를 자동차들이 주차 자리로 채워갔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 모든 변화는 알게 모르게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무엇보다 나의 가슴을 가장 아리고 슬프게 한 것은 오래된 정다운 대방교회 건물을 허물어내고 저 흔하디 흔한 네모난 건물로 바꾼 것이다. 그것은 내 어린 날들, 특히 어린이 성가대의 정다운 추억이 불현듯 철거되어 땅에 묻히고, 그 위에 무거운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선 것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