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교회의 추억
1.
나의 형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고등학생 시절에 잠시나마 신학대학으로 갈까 심각하게 고민했던 위인이다. 그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매우 빠르게 교회에 빠져들었으며 심각하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때도 대학 입시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일이라, 고등학생들은 특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에는 중고등학교부터 모두 입학시험을 치러서 합격한 사람만이 가고 싶은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이었다. 형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꽤 유명한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입학 후에는 갑자기 교회에 빠져들어서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마저 이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나 믿음직스럽게 행동했던 장남인 형을 딱히 혼낼 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교회 다니는 것도 좋지만 시간 아껴 써야 한다. 주말에 너무 교회에 가서 있는 거 아니니?”
어머니는 어느 토요일 오후에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은 일요일 아침에 교회에 가는 것은 물론이고 매주 토요일 밤에 있는 고등부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했다. 그럴 때면 예배 후에도 친구들과 어울리느라고 교회에서 늦게 집으로 돌아왔었다. 교회의 고등부 학생들은 아래층 소예배실에 모여서 예배를 보았고, 예배 후에는 둘러앉아서 떠들고 함께 식사하기도 했다. 한창 들뜨고 신나는 고등학생들이라 그들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갑자기 어른스러워진 형에게 어머니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자나 깨나 공부하느라 바쁜데 주말마다 교회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형이 못마땅했지만 그저 형을 꾸중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형이 스스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초등학교 때는 전교 회장까지 하면서 공부를 잘했던 아들이었으므로 어머니는 형이 알아서 잘할 것이라고 아직은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형의 학교 성적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서 형에게 조금 더 심각하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은 나름대로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관해 매우 심각하게 젖어들었지만, 어머니와 그 문제에 관해 깊게 의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2에 이르러 형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으로 진학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형의 진지한 고민을 알게 된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았다. 형이 당연히 유명 대학의 인기 높은 학과로 진학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어머니는 형에게 심각하게 말했다.
“목사가 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는... 다시 잘 생각해 봐라.”
"아직 결정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목사가 되어서 올바른 신앙을 전파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일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너는... 우리 집에서 장남이니까 하여간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이 문제를 두고 정작 형이 아니라 어머니가 더 심각하게 고민했던 듯하다. 형이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돈을 잘 벌기를 기대했던 어머니는 형이 목사가 될지 모른다는 현실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목사가 안 좋은 직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머니는 형이 장남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에 앞서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본인이 오랫동안 매우 신실한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까지는 원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결국 형에게는 말하지도 않고 형이 신학대학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매우 적극적이고 대담한 조치를 취했다. 어머니는 직접 대방교회를 찾아갔던 것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어머니는 대방교회로 가서 청소년 담당 전도사를 만나서 형의 장래에 관해 의논했다고 한다. 말이 의논이지, 실제로는 형이 신학대학에 가는 것을 막아달라고 부탁을 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 훨씬 강경한 자세로 으름장을 놓았다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름대로 고민한 끝에,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우등생이었던 첫째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 결과는 나중에 어머니가 원하던 대로 나왔다. 어머니 말을 듣고 그 전도사가 형을 붙잡고 무슨 말을 했는지, 아니면 형이 스스로 고민 끝에 포기한 것인지 모르지만, 형은 결국 신학대학으로 가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형이 그 문제를 두고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또 형의 결정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형이 그 문제에 관해 전도사나 친구들과 논의했을지는 모르지만 동생들과 의논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2.
형이 신학대학에 가지 않은 결정을 두고 훗날 나는 때때로 생각했다.
삶에서 선택에 관하여.
또는 선택되지 않은 것에 관하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삶에서는 종종 매우 결정적인 선택이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럴 때의 선택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렇게 매우 의미 깊은 갈림길을 만나게 될 때, 나는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리곤 한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가지 않은 길’의 마지막 연)
누구든 인생의 여로에서 종종 중대한 갈림길에 이른다. 그것은 기회일 수도 있고 위기일 수도 있다. 그때마다 뭔가 초월적인 운명의 신이 강림하여,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것이 자신의 계획과 의지라고 생각하면서, 여러 갈래 길에서 우리는 하나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누구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과감하게.
누구는 고민과 불안을 가지고 주저하면서.
그런데 살다 보면 누구든 그때 가지 않았던,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동경할 때가 있는 법이다. 자신감을 가지고 과감하게 선택했든, 미심쩍어하고 주저주저하면서 선택했든,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것은 특히 자신이 기껏 힘들게 선택해서 지나온 길에 역경과 후회가 많을 때 더욱 그렇다. 오래전에 선택하지 않았던, 그래서 갈 수 없었던 길을 뒤늦게 그리워하는 것이다. 혹시 그때 내가 다른 길로 갔다면 인생이 더 잘 풀리고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마지막 시구에 나타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적게 갔던 길을 선택하였으므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굳이 약간 삐딱하게 비판적으로 해석하자면, 미국인의 다소 도전적이고 개척자적 의식을 담은 문학적 표현일 뿐이다. "사람이 적게 간 길"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친숙하지 않고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시인은 기꺼이 그런 길을 택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인데…
달라지기로 따진다면, 사람이 많은 길을 택했다고 해도 모든 것은 달라지게 되어 있다. 어차피 인생은 중요한 순간마다 내린 결정과 선택으로 인해 매번 모든 것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그로 인해 이전과는 모든 것이 달라지면서, 또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나까지 달라지면서, 새로운 상황에 맞춰 변화하고 다시 태어나고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모두 알고 있다.
가지 않았던 길을 동경하는 것이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한 번 상상해 보라. 만약 그때 형이 정말로 '신학대학으로 진학해서 목사가 되었다면', 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재미 삼아서는 할 수 있지만 유용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쓸데없는 일이다. 삶에 있어서 그런 가정은 흥미와 재미로는 떠올릴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무의미하다.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후회와 동경으로 인해 막대한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과거의 선택에 관한 후회로 인해, 그 과거를 현실로 소급하여서, 멍청하고 어이없게도 현실을 망치는 사람은 많고 그런 것을 그리는 삼류 드라마도 많다. 그때 다른 길로 갔다면, 즉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정말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한 개인의 인생에서도 그런 가정은 거의 무의미한 공상에 불과하다. 이미 흘러간 물처럼, 모든 것은 이미 벌어졌고 다시는 바꿀 수 없으며 우리는 이미 주어진 현실에 맞춰서 살아왔으니까.
다만, 나중에 나는 형의 선택으로 인해 가지 않았던 길을 두고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형 개인이 아니라 당대 사회의 개연성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마저도 결국 쓸데없는 가정에 불과하지만, 형의 선택에 관해, 형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던 80년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떠올리면서 재미 삼아 상상해 본 것이다.
돌이켜보면, 1973년에 미국에서 온 저명한 보수적 부흥사였던 빌리 그래함 목사가 여의도에서 초대형 집회를 한 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해 봄에 초교파적으로 5일간 여의도에서 개최된 기독교 집회에는 연인원 수백만 명에 이르는 개신교인들이 운집했고, 그것은 한국 개신교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 집회 이후 기독교인들에게 ‘전도’의 사명은 전국적으로 불처럼 번졌고, 교회는 우후죽순처럼 피어났다. 신학대학들도 잇따라 설립되어 부족한 목회자 시장에 새로운 인력을 공급했다.
따라서 그 무렵 한국에서 교회 ‘사업’을 했다면 성공적으로 번창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성직자가 되는 것은, 사장이 기업을 운영하는 것처럼 사업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올곧이 진실된 신앙심에서 비롯된 목회사업을 해야 함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 시절 한국에서 기독교 인구는 놀라울 만큼 급증세에 있었고, 교인들이 넘쳐흘러서 교회와 건물은 대형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개신교가 함께 발전해 온 역사를 생각할 때 대형 교회를 대형 기업에 비유하는 것은 아주 어색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학원을 운영하고 유명 강사로 활동했던, 나의 가까운 친구인 상석도 예전에 농담 삼아서 말했었다. 자신이 목사가 되었다면 대형교회의 목사 또는 대규모 종교 집단을 이끄는 ‘교주’가 되었을 것이라고. 그것이 주류 교단에 속한 교회이든 사이비 종교집단이든, 크게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내가 목사가 되었으면 조용기 목사 못지않게 교회를 크게 만들었을지도 몰라. 어쩌면 사이비 교주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교회에는 맹목적으로 목사를 떠받들고 몸도 돈도 바치는 순진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열정적으로 일하고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그의 능력을 생각할 때 그의 말이 단순히 허풍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그가 가지 않았던, 그가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상상해 보고, 그보다 사업 능력이 모자라거나 엇비슷한 실력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엄청나게 큰 교회의 목사로 되었던 것을 떠올리면서, 그의 말이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동조했다.
“네 말이 맞다. 너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거야.”
한국에서 기독교회의 방만하고 물질적인 급성장에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그의 말이 나는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화려하고 강력하고, 때로는 진실되기도 하고 때로는 허풍스럽기도 한 그의 ‘말빨’을 생각할 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목사가 되었다면, 그는 분명히 대형교회 목사 또는 사이비 교회의 교주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그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고.
그러나 결국 다행인 것은, 그가 목사의 길로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3.
종교 전업 직업인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면 보수적인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은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기 바란다. 우리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 교회 발전의 역사는 실제로 그랬다.
1970년대부터 한국의 교회는 외형적으로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사업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그곳은 블루오션과 다름없어서, 먼저 뛰어드는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태어난 베이비 부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데다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농촌에 있던 사람들이 서울로 꾸역꾸역 올라오던 때였다. 냉전시대의 한복판에서 그들은 자본주의의 최대 강국인 미국의 경제문화 체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모방하는 한편, 박정희 정부가 주창했던 ‘한국적 자본주의’를 창조해 갔던 첫 번째 세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인들의 국교나 다름없는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의식은 더욱 팽배해졌다.
급격하게 전개된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그들은 또한 외롭고 낯선 대도시 생활의 고독과 고달픔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교회로 몰려들었다. 교회는 주로 농촌에서 올라온 그들에게 대도시의 신문화를 가르쳐주고 생활정보를 나눠주었으며 정신적 안식처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화신인 도시의 문화를 그들은 교회에서 먼저 체험할 수 있었고, 점차 도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도시인으로서의 동질성을 느낄 수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낯선 도시인이 되었던 그들을 따뜻하게 형제자매로 보듬을 수 있었던 대표적인 곳이 교회였다고 할 수 있었다. 기업들과 학교들은 그들에게 선택적이고 차갑게 대했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교회 안에서도, 다른 사회단체처럼 권모와 술수와 기만과 갈등과 억압과 투쟁이 있기는 했어도, 또 교인들을 통제하는 여러 위계적 계급이 존재하긴 했어도, 표면적으로는 모두 평등과 믿음과 사랑의 형제들로 거듭날 수 있었다.
언젠가 한국의 어떤 유명한 목사가 초청된 부흥회에 참석했을 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 목사는 자신이 유명해지고 자신의 교회가 크게 번창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것은 그 당시 어떤 유명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던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교회 부흥에는 더 많은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음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처음에는 하꼬방 같은 데서 우리 식구들까지 합해서 겨우 열댓 명 앞에 놓고 교회를 시작했어요. 처음에 나는 낙담했어요. 하지만 나는 꿈을 잃지 않고 하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번창하게 해달라고. 그런데 어느 날 버스 노선이 연장되어서 버스 종점이 교회 앞으로 왔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사람들이 종점까지 와서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우리 교회를 보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동네가 전체적으로 빠르게 개발됐습니다. 그랬더니, 교회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했어요. 말 그대로 폭발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게 다 우리 감사하신 하나님 덕분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겁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사례는 당시에 아주 특별하거나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한두 가족 모임에서 시작한 교회가 나중에 수천수만 명이 참석하는 대형 교회로 성장하는 ‘전설적인’ 교회 성장 이야기는 그 당시 한국에서 자주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현상을 놀라움에 가득 차서 두 손 들어 환영했던 사람들의 입을 빌리자면, 그러한 교회의 폭발적 성장은 신의 ‘은총’이자 ‘기적’이었다. 부흥하는 교회의 목사들의 가르침에 따라, 교인들은 대한민국이 하나님이 선택한 제2의 이스라엘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마치 유대인이 된 것처럼 선민의식을 가지기도 했다.
그 부흥회 강사의 말을 듣고 나는 오래오래 되새겼다. 그의 말은 상당히 솔직하고 맞는 말이었다. 그의 교회의 부흥은 그의 능력과 신의 보살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모멘텀은 교회 앞으로 버스 노선이 연장되고 종점이 되었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고, 놀라운 사업가적 감성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그런 변화를 이해하고 솔직하게 말했던 것이다.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 아니던가.
비즈니스의 성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로케이션이라고!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로케이션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