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교회의 추억
3.
[데미안]으로만 국한하여 말한다면, 나는 그 책의 1장을 가장 인상적이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훗날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의 근원과 역사에 관해 익숙해진 다음에는 그리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아직 겨우 중학생이었던 나에게는, 아니 그 당시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데미안]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함께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 1장의 제목은 ‘낮과 밤’이다. 낮과 밤이라는 제목은 세상 또는 우주가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또는 선과 악, 두 개의 구별되는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내가 이미 교회를 다니면서 익숙해진 선악의 두 세계를 한 소년의 성장 경험에 맞춰 풀어낸 것이라 매우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다.
서양의 종교와 철학에 등장하는 이분법은 고대 페르시아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에 기원을 둔 선악의 질서에 기초하고 있고, 본질적으로 낮과 밤 또는 빛과 어둠의 세계를 오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적 성격과 구원론적 의미를 담고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조로아스터 또는 자라투스트라는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500년까지 탄생 연도에 대한 조사 결과가 학자마다 분분하다. 이 종교는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에 페르시아 지역에서 크게 발전했다. 3세기 이후 7세기까지 사산 왕조 시기에 조로아스터교는 국교가 되었고, 그 경전인 ‘아베스타’는 집대성되었다.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조로아스터는 최고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계시를 받아 이 종교를 창시했다. 아후라 마즈다는 선과 빛의 신이고, 지혜와 풍요와 정의의 신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종교가 선악의 개념을 설정하고, 구원론, 사후심판, 종말론, 천국과 지옥 등의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유대교나 기독교에 앞서 처음으로 유일신을 주창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은 조로아스터교가 유대교와 기독교에 끼친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데미안]에 이런 내용이 나오지는 않는다. 나는 다만 [데미안]을 읽고 나서야 선과 악, 빛과 어둠, 이분법적 세계관 등에 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고민을 거듭한 후에 나는 이런 종교적이고도 철학적인 문제들에 관해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가설에 도달했다.
만약 창조주이자 유일신이면서 지극히 선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악을 창조했을 리가 없다. 또한, 만약 창조주이자 유일신이면서 지극히 악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선을 창조했을 리가 없다. 지극히 선한 신과 지극히 악한 신은 양립할 수 없다. 신이 애당초 지극히 선하거나 지극히 악한 하나의 속성만 갖는다면, 신은 선과 악을 모두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성이 오로지 선 또는 오로지 악에 속하는 신이 어떻게 통속적으로 반대 개념인 다른 속성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 온전히 선한 신은 오로지 선만을, 온전히 악한 신은 오로지 악만을 떠올리고 창조하고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그 속으로 범주화하며 그 자체의 속성만 파생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신이 선악 모두를 창조하고 그것들이 뒤죽박죽 뒤섞이고, 자신의 창조물들이 그 속에 뒤얽혀 생고생을 하고, 나아가 그로써 자신을 의심하거나 저주하기도 하도록 했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어설프고 모순되어 보인다. 또한 지극한 선과 지극한 악 사이에서 선악이 뒤얽히고 중첩되어 있는 드넓은 스펙트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물론 선과 악이라는 개념에 대한 고도의 추상적 정합성을 전제로 하는 상상일 뿐이다. 또한 절대적 유일신을 전제로 하는 상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의 선악의 개념, 선악의 존재와 선악의 발전과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아예 유일신 개념을 부정하고 접근한다면, 이런 사색과 논리와 철학은 서로 진지하게 논의할 근거를 잃을 것이다.
그때 나는 그렇게 어렴풋하고 불완전한 이론적 준거틀 속에서, 유일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신이 애당초 선악과 상관없는 존재여야 한다는, 다소 불만족스럽지만 어쩔 도리 없이 논리적으로 추정되는 잠정적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 논리를 연장하여, 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선악을 규정하고, 그 상상력 위에 신이라는 존재를 얹어 놓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마차 앞에 말이 가야 하는데 거꾸로 마차가 말 앞에 놓이게 된 것처럼, 신이 인간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뒤에 신이 놓이게 됐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런데 나의 이 모든 상상과 추론마저 신이 자신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또 오만하고 간교한 인간을 속이기 위해 창조한 ‘섭리’에 속한다면, 그러한 섭리는 나의 능력과 상상력을 넘어서는 것이라 나는 그 이상을 논할 수 없고, 나의 오만한 생각은 어쩌면 신을 모독한다거나 오판하고 있다는 책임에서 저절로 면죄될 가능성도 있게 된다.
4.
아무튼, 데미안을 읽은 후 나는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분법은 사고와 사상의 유희에서 확실히 결정론적 느낌이 있어서 매우 매혹적이다. 선과 악 또는 빛과 어둠으로 완전히 분리된 개념은 어떤 구체적이고 명쾌한 해답을 찾기 어려운, 또는 불가능한 현실에 갇혀서 사는 인간 사회에서 매우 명쾌한 해답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적인 체계나 표상에 가깝기는 하지만 인간 세계의 복잡한 현실과 꼭 맞는다고 하기는 어렵다. 어떠한 인간도 지극히 선하거나 지극히 악하지는 않으므로. 인간은 언제나 그 중간 어디엔가 머물러 살면서 상황에 따라 어느 쪽으로 수렴하고자 할 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싱클레어처럼, 나는 적어도 어릴 때는, 필경 밤의 세계가 아니라 낮의 세계에 속하여 살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낮'은 오로지 밝기만 한 낮이 아니다. 소설 속의 낮의 세계는,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밝고 따뜻하고 명랑하고 행복하고 아늑하고 사랑스러운 모든 개념을 포함한다. 나를 사랑과 관심으로 보살피는 부모님과 포근하고 안전한 가족은 낮의 세계의 전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생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고, 헤세는 소설을 통해 그 사실을 묘사하고자 하였으니……
싱클레어가 성장하면서 낮의 세계와 밤의 세계를 오가며 번민했던 것처럼, 나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비교해보곤 했다.
낮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탈선의 유혹 또는 불가피성과 밤의 세계에서 탈출하려는 선한 의지 또는 운명적인 힘에 관해서 나는 끝없이 고민했다. 낮의 세계와 밤의 세계는 한 사람의 삶 안에서 뒤엉켜 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을지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거기에는 삶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격렬한 전복과 전환을 동반하는 사태나 사건이 발생하며, 그럴 때마다 한 인간의 낮과 밤이 바뀌거나 단계적으로 변천하는 인생사가 전개되는 것이다
싱클레어가 가족에서 학교로 또 군대와 사회로 진출해 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그의 삶의 범주, 또는 그를 둘러싸고 있거나 가둬 두고 있는 세계가 전복되고 전환되며 새로운 세계로 확장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할 때마다 세계는 전복되고, 기존에 갇혀 있었던 알에서 껍질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돌입한다. 만약 그것을 기독교 개념으로 따진다면 그것은 어쩌면 매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사건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것일 수도 있다.
헤세는 이 소설에서 ‘알’이라는 표현을 통해 한 사람이 갇혀 사는 세계를 비유하는 듯했고, 인간의 단계적 성장을 투쟁을 통해 단단한 알 껍질을 깨고 날아가는 것으로 비유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소설에 나오는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인용했던 대목이다. 나 또한 편지를 쓰면서 인용했던 문장이다. 그런데 이 문장의 뜻은, 조금 깊게 생각해 보면, 매우 난해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연애편지에서 사용하기에는 약간 부적절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뭔가 철학적이고 지적이고 멋있다고 생각해서 자주 인용했는데, 그렇게 인용할 때 사실 나는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한 적이 별로 없었다고 고백한다. 변명하자면, 그것은 꼭 나의 잘못은 아니다. 헤세가 소설을 쓰면서 친절하게 그 뜻을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어쩌면 헤세 자신도 그렇게 폼나는 문구를 쓰면서도 인생에서 확실한 해답은 없고 역시 뭔가 불확실함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이 문구는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남겼던 글이다. 나는 어릴 때 이 구절을 놓고 많이 읊고 많이 고민했다. 거의 언제나 그렇지만, 좋은 작가는 이렇게 쉽게 파악되지 않는 문구를 써놓고, 무책임하게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 글을 쓴 사람도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현명한 작가의 작법이기도 하다. 제한된 글자를 놓고 해답 또는 해석을 향한 사색의 여정과 결론은 독자의 몫이니 말이다. 그것이 이론서가 아닌 소설의 맛이기도 하다.
싱클레어는 헤세가 자신의 성장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만든 필명이었다. 소설 데미안은 발표 당시 당대 청(소)년들에게 깊은 감정의 떨림을 안겨주었고, 철학적 사색의 장을 열었으며, 사상적 성장에 있어서 깊은 내적 공명을 울렸고,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하고 경험하고 있었던 젊은이들에게 공포와 좌절과 번민의 벗이 되었다.
2차 대전 당시 수많은 독일 청년들이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온통 데미안에 빠져들어 가슴에 그 책을 꽂고 다닌 것처럼, 70년대에 수많은 한국 청소년들도 [어린 왕자]와 더불어 [데미안]에 사로잡혀 그 책을 허리춤에 끼고 다녔다. 당대 소년과 청년의 성장과 꿈과 심리변화와 고뇌 등을 이 소설처럼 인상 깊게 파고들었던 책이 어디에 있을까 싶었던 시절이었다. [데미안]을 읽고 나서, 헤세를 영원한 마음의 친구라고 여기거나 정신적 지주인 양 좋아하는 소녀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말한 것처럼, 나는 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하나의 알로 파악하고, 그 알을 파괴하고 나감으로써 새로운 세계로 진출하는 것을 나의 단계적 성장으로 이해했다. 나는 성장할수록 내가 어떤 알에 갇혀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는데, 하나의 알을 깨고 나가는 것은 매우 힘들고 험난하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다. 나를 가두고 옥죄는 단단한 알껍질을 깨기 위해 나는 어쩔 수 없이 내적으로 투쟁해야 했다. 그것은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쉽사리 밝힐 수 없는, 밝히고 싶어도 스스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설명할 수 없는, 또는 처음 겪어서 어색하고 난감하고 혼란스러워서 쉽게 정리할 수 없는, 내적 고민이자 투쟁이었다.
그 내적 고민과 투쟁의 전개는 이렇다.
나는 내가 어떤 세계에 갇혀 있음을 깨닫는다. 어느 때부터 나는 그 상황이 나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음을 서서히 깨닫고 침묵하고 고민하고 좌절한다. 이윽고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더 큰 세계로 날아가기 위해, 나는 나를 구속하는 것을 기꺼이 깨부숴야 함을 인식한다. 알 속에 안주하고 있으면 편하고 아늑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사상의 오류이자 착각임을 이내 깨닫게 된다. 그것은 진정으로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자유인의 삶이 아니다. 자유는 그렇게 안일하고 편안하게 얻어지거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고민이 이어지면서, 어느 날 드디어 나는 알껍질을 깨기 위해 도전한다. 그리스 신화에 영원한 형벌의 화신으로 나오는 시지포스는 산 위로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고 한없는 좌절과 도전을 반복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의 번민과 좌절과 몰락은 한계가 있고, 나의 도전은 시간이 갈수록 쉬워지고 익숙해지며 결국 극복에 이른다. 그 극복의 보상은 알을 깨고 나가는 것이다.
수도 없이 위에 인용한 문구를 적고 읊었지만, 그때 나는 아브락사스(Abraxas)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 사후 1세기 후반에 발전하기 시작한 초기 기독교와 철학적으로 다투었던 영지주의(Gnosticism) 문헌에 나오는 신비의 존재 또는 천사 정도로 이해했을 뿐, 더 이상 구체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해도 괜찮았다. 인생 자체가 어디로 가는지 미리 알고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소 독단적인 해석이기는 하지만, 나는 내가 하나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가, 이윽고 그 세계를 넘어 또 다른 세계로 나가는 것 자체가 아브락사스로 향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또는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그것이 영지주의에 등장하는 천사이든, 아니면 그저 어떤 신 또는 어떤 존재의 이름이든, 나에게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거기에 신적 성격 또는 신앙적 요소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삶에서 내가 알을 깨기 위해 투쟁하고, 또는 투쟁할 수밖에 없고, 결국 그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이었다.
5.
그 책을 읽은 후에 나는 내가 존재했던 세계를 새롭게 파악했다.
또는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첫 번째 세계는 가족이었고, 그다음 세계는 학교였다. 그리고 내가 마주친 세 번째 세계는 바로 교회였다. 나는 가족에서 학교로, 또 거기서 교회로 나의 세계를 확장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마다 하나의 알을 깨고 탈출하는 것과 같다고 믿었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런 주장을 마치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할 만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우기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정도로 나는 단순하지 않으며, 내 마음대로 타인을 판단하거나 재단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한다 해도, 당신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받아들여서도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나 혼자서 나를 둘러싼 세상과 나와의 투쟁방식을 이해하는 하나의 상상이며 사색적 논리에 불과하다. 나는 그러한 이해를 위한 참고서 정도로 [데미안]을 수용했다.
그것은 정작 헤세가 [데미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하랴. 소설을 쓰는 것은 작가의 몫이지만, 그 책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극복해야 할 절실한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며, 그러한 임무 수행을 위한 나름의 지침으로 이러한 논리를 발전시켰다.
당시 그렇게 확립한 나의 세계관 또는 인생관을 바탕으로, 지금부터 나는 그 세 번째 세계인 교회, 그중에서도 정작 나를 그 속에 안착시켰던 중대한 모멘트와 모티브인 어린이 성가대의 경험에 관해 말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