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교회의 추억
4.
그래서 가정환경을 생각하면 더 일찍부터 다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교회를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다니지 않았다. 그러더니, 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 무렵에 이르러 주로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또는 방학 때만 교회를 가곤 했다. 그럴 때는 잔치가 벌어진 집처럼 교회에 신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50미터 정도 거리에 있는 대방교회에서는 방학 때마다 어린이들을 위한 ‘성경학교’가 열렸는데, 그런 곳에 가면 먹을 것도 잘 나왔고 재미있는 행사도 많았다. 성경학교에 가서 나는 찬송가도 잘 부르고 성경구절도 잘 외우고 친구들과도 활발하게 어울리면서 우수한 교회 학생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렇게 흥미로운 행사가 끝난 후에 나는 조금 지치고 지루해져서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았다. 마치 즐거운 잔치가 모두 끝난 자리처럼, 행사가 끝난 교회는 뭔가 썰렁하게 느껴졌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가 다시 시작되면 나의 관심은 학교로 쏠렸고, 교회에 관한 흥미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성경학교에 열심이었던 내가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자, 교회 선생님은 일요일 아침 어린이 예배가 끝난 후에 굳이 우리 집으로 나를 찾아오곤 했다. 우리 집이 하필 교회에서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교회 선생님은 나를 아는 친구를 앞세워서 우리 집으로 왔으며, 친구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열린 대문을 통해 불쑥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선생님이 오셨어. 대문 앞에 있는데, 너보고 나오래."
거의 자고 있다가 일어난 나는 차마 나가지 않겠다고는 할 수 없었다. 급하게 옷을 차려입고 죄지은 사람 표정이 되어서 나는 대문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갔다.
“너 왜 교회에 안 나오니? 무슨 문제라도 있니?”
“아니요. 없어요.”
“그런데 교회에 왜 안 나와?”
“다음 주에는 갈게요.”
“정말이지? 확실히 올 거지?”
“네.”
“알았다. 교회에 꼭 나와야 한다. 안 그러면 지옥에 가.”
“알겠습니다.”
나는 대문가에 서서 교회 선생님에게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혼나는 것처럼 처량한 모습이 되어 머리를 숙인 채 나는 다음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난 후 다시 일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나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교회 선생님에게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면 선생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를 잡고 더 길게 말했을 것이고, 나는 그의 말의 힘을 이겨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교회에 가지 않고 선생님이 나를 찾아오는 그런 난처한 일이 한 차례 더 이어졌다.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을 만족시킬 만한 대답을 했고 그다음 주에는 또다시 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때 내 본심을 말하자면 이랬다. 내가 선생님에게 다음 일요일에 교회에 가겠다고 대답했을 때 내가 정말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기꺼이 교회에 가야겠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일요일 아침이 되면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가는 것이 영 귀찮게 생각되었다. 주중에 학교에 정기적으로 가는 것만 해도 귀찮은데, 일요일 아침까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일요일 아침만이라도 나는 늦잠을 자고 싶었고 게을러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이미 교회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바 아니었다. 교회나 선생님들이 싫다거나 친구들을 만나는 게 싫지는 않았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지루해졌을 때 교회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고 여러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기도 했다. 설교는 다소 지루한 시간이기는 했지만, 학교 수업처럼 조금만 인내하면 되었다. 선생님이 학년별로 진행하는 성경공부는 학교 교실에서 하는 것처럼 조금만 긴장하고 집중하면 되었다. 교회 선생님은 학교 선생님처럼 혼을 내거나 때리는 일이 전혀 없었다. 교회 선생님의 말을 조용히 잘 듣고 대답만 잘하면 칭찬을 받고 때로는 사탕이나 학용품 같은 상품까지 받을 수 있었다. 비록 교회와 기독교 신앙이라는 매우 강력한 테두리가 있기는 하지만, 교회 선생님은 언제나 우리가 똑똑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었으며 신의 축복을 빌어 주었다.
때때로 목사님의 감동적인 설교나 선생님의 진정 어린 말들로 인해, 나는 두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내가 지은 죄를 떠올렸고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사 나를 용서해 주시기를 빌었으며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도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나는 두 손을 모아 정성껏 기도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결국 매주 교회에 나가는 데는 실패했다. 나의 게으름과 교회 신앙에 대한 무관심은 나를 성실한 교인이 되도록 놔두지 않았다. 교회 식으로 말한다면 나는 아직도 사탄의 달콤한 꼬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뭐 하러 일요일 아침에 일찍부터 서둘러 교회까지 가려고 해. 피곤한데 그냥 더 자. 이따가 동네 아이들하고 뛰어놀기도 해야 하고, 숙제도 해야 하는데...'
그러한 사탄의 꼬임은 나를 한 걸음 더 발전시켜서 나는 또 하나의 꾀를 냈다. 교회 선생님이 끈질기게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나는 아예 그를 피하기로 했던 것이다. 4학년 가을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지났을 때였을 것이다. 조금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나는 한동안 일요일 아침마다 어린이 예배가 끝날 시간이 되기 전에 일부러 밖으로 놀러 나갔다. 아마 한 달 정도 그렇게 했던 것 같다. 그럼으로써 교회 선생님은 결국 나를 포기한 듯 더 이상 우리 집으로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5.
그러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누가 정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삶에는 숙명이라는 게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인생에서 찬란한 햇빛이 비치거나 어두운 구름이 잔뜩 끼는 것, 행운의 여신이 방긋 웃거나 화를 내는 것, 좋은 가족이나 친구가 찾아오거나 떠나는 것, 산으로 뛰어서 오를 정도로 건강하거나 치료할 수 없는 병이 나는 것 등은 대체로 우리의 의지나 바람으로는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이 뒤집혔거나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런 것을 모두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였다. 어머니도 나에게 교회에 가야 한다고 말했고, 누나들과 형도 교회에 다니고 있는 상황에서 나만 계속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이 어렵기도 했지만, 방금 말한 것처럼 내 의지와 희망을 벗어난, 삶에 묘한 기운이 나에게 닥쳤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은 아버지와 나뿐이었다. 워낙에 세속적이고 교회나 기독교 신앙에는 관심이 도통 없었던 아버지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일요일 아침에도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면서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셨지만, 나는 고작해야 감기가 걸려서 아프다는 사정 외에는 그런 핑계를 댈 수 없었으므로 교회에 가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교회에 가기 싫어”라고 말한다고 해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주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하려는 ‘본능’은 아주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를 비롯하여 우리 가족 가운데 본성적으로 강압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일 일하면서 찬송가를 부르고 힘들 때마다 기도를 하는 어머니와 뒤늦게 깊은 신앙심을 가지게 된 형이나 이미 교회에 열심이었던 둘째 누나까지 아무도 나에게 교회에 가도록 윽박지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내가 막내라 해도 그들은 절대로 강압적으로 나를 누르지 않았고, 내가 자발적으로 나갈 수 있기를 기다렸다.
아무래도 그런 탓에, 그렇게 오랫동안 제멋대로 교회를 재미 삼아 선택적으로 다녔던 나에게 매우 특별한 전기가 찾아왔다. 어느 날부터 정말로 열심히 다니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내가 심하게 아팠던 데서 비롯됐다. 심하게 아팠다는 것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내가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음을 말한다. 또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의 죽음에 가까워졌다가 되살아난 것!
나는 바로 그것이 나를 교회로 이끌고자 했던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신의 계시라고 하는 것이 황당하고 엉뚱한 관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고등학생 때까지 열심히 교회에 다녔던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생각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내 가슴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고 내가 열심히 교회에 다니게 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6.
그때 나는 5학년 학생이었다.
그해 이른 봄에 나는 늑막염에 걸렸다. 늑막염이란, 허파를 둘러싼 늑막에 염증이 생겨서 분비물이 생기고 그것이 폐를 압박하여 가슴이 아프고 숨을 쉬기 어렵게 만드는 병이다. 어떻게 그런 병에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예사롭지 않게 아프기 시작했다. 낮에는 그저 감기에 걸린 듯 열이 났지만 저녁이 되면서 춥게 느끼는 증상이 심해졌다. 곧이어 가슴이 매우 답답해지고 숨이 거칠어졌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면서 가슴 통증은 극심해졌고 나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식욕이 떨어져서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누운 나는 결국 밤새 고통에 시달렸다. 처음으로 겪는 공포와 고통으로 인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아무리 거칠게 숨을 몰아쉬어도 몸 안으로 들어오는 산소가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너무나 숨이 찼으며 아파서 죽을 고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캄캄한 밤중에 눈앞에서 뭔지 모를 보랏빛 알갱이들이 검은 공간에서 격하게 요동치고 점점이 반짝거렸다. 나는 밤새도록 숨을 헐떡거리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생애 처음으로 보라색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겨우 열한 살이 되었을 때였다. 아직 감당하기에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불쑥 다가온 고통스럽고 무서운 공포였다.
그때 일종의 기적이 발생했다.
대학생이었던 나의 형은 밤새 내 옆에서 나를 간호했던 것이다. 형은 아파서 우는 나의 손을 꼭 붙잡고 반드시 나을 것이라고 격려하면서 옆에서 기도를 하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형은 대단히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형은 나에게 마실 물을 주고 물수건으로 내 손과 얼굴을 닦아주기도 하면서 밤새 나를 돌봐주었다. 그러면서 형은 이번에 내가 병이 나으면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므로 꼭 교회에 잘 다니자고 말했다. 인간은 지극히 허약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즉각 사망의 골짜기로 빠질 것임을 나는 몸으로 느낄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금세라도 찾아올 것 같은 보라색 죽음의 공포에 짓눌린 나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지금 이 아픔만 지나게 해 준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형은 내 두 손을 잡고 나를 위해 이렇게 소리 내어 기도했다.
“주님, 동생이 많이 아픕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힘들어합니다. 부디 동생이 빨리 낫게 해 주세요. 이번에 나으면 교회에 열심히 나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동생이 어서 속히 낫게 해 주세요.”
오래전에 읽은 카뮈의 소설 [이방인]인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불확실하니까 나의 기억을 너무 믿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카뮈의 소설이 아니라 해도 그 내용의 개연성은 누구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아파서 죽게 되었을 때였다. 가족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성당 신부는 그를 찾아와서 신을 부정하고 죽은 자가 겪게 될 지옥의 참상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당신이 회심하지 않고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되면, 당신의 몸은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유황불 위에서 한없이 타들어갈 것이고,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고통이 당신을 덮칠 것이라고. 그것도 영원히!
신부는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시점에 이르러 이 같은 공포심을 그에게 안겨주었는데,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회심하여 신에게 용서를 빌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신부의 위협적인 설득은 그에게 거부하기 어려운 힘이었다. 평생 교회와 신앙을 멸시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했던 사내는 신부의 설득이 시작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국 회심했다. 죽음에 이르러 죽음 후에도 연장될 고통까지 상상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평생 믿고 지냈던 것을 뒤집는 데는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신부나 목사가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 고통이 현세를 넘어 사후까지 연결되어 영원하리라는 것을 깨닫게만 해준다면, 어느 누가 그 무서운 고통과 공포의 창조자에게 복종하지 않겠는가!
내가 그렇게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고통 속에 눈물의 밤을 지새운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대방시장에 있는 한의원으로 갔다. 그 의사가 명의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조제해 준 매우 쓴 한약을 먹고 이틀 만에 말짱하게 나았다. 어린 나에게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신기한 일이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무서웠던 시간이 한약을 먹고 사라졌다는 것 말이다. 그것이 바로 그때부터 내가 한의학에 신뢰감을 갖게 된 이유다.
아무튼, 늑막염에서 벗어난 즉시, 나는 형과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형과 약속한 대로 나는 일요일 아침마다 빠지지 않고 대방교회 어린이 예배에 나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때만 가거나 여름성경학교의 모범 학생으로서만 교회에 간 것이 아니다. 그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 때까지 나는 매우 성실한 교인이 되었다. 학교를 빠지는 한이 있어도 교회를 결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신앙심 외에도 교회 친구들과 쌓은 깊은 우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는 나는 교회에 그만큼 열심이었다. 어쩌면 내 생애에서 자발적인 참여로는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면서 열심이었던 시간이었다.
바로 그 시절에 나는 내가 늑막염에 걸리고 이어서 어린이 성가대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 모두 나를 교회로 이끌었던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