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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Oct 30. 2024

신의 계시 (1)

대방교회의 추억

1.


“모태신앙입니다.”

혹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았을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기독교인들이 자신이나 타인의 신앙의 역사와 연관 지어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다. 과문한 탓일 수 있지만,  미국에서 나는 한(국)인들 외에 미국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어떤 사람, 예를 들면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인" 또는 "태어날 때부터 이슬람교인"이었다,라는 식으로 영어 문장을 만들 수 있지만, 딱히 영어 한 단어로 모태신앙을 표현하는 것은 없을 듯하다.


모태신앙이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신앙을 뜻한다. 자신이 자라면서 또는 성인이 된 후에 스스로 고민하고 자신의 의지를 발동해서 신앙을 갖거나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피동적으로 생겨난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모태신앙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자신의 계획이나 소망이나 의지를 초월한 ‘선택’ 같은 후광이 작동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모태'라는 단어를 통해 신의 아들인 예수를 잉태했다는 ‘동정녀’ 마리아를 연상시키면서,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 그리고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개념을 암암리에 포섭하여 자신의 어머니의 임신과 자신의 태생적 신앙의 권위를 내세우는 듯도 하다.


나 역시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가 기독교인이었던 만큼 스스로 ‘모태신앙’을 전수받은 자였다고 생각했다. 신으로부터 선택된 자의 신앙이 마치 어머니의 임신과 탯줄을 통해서 전수된다는 선천적 의미를 은근히 내세우면서 말이다. 그래서 초중고등학교 시절에 교회 친구들과 대화할 때는 어린 마음에 그런 것을 자랑삼아 내세우기 위하여, 이따금 내가 ‘모태신앙’ 출신이라고 말하곤 했다. 교회 사람들끼리 대화할 때 그 단어는 나의 신앙이 뭔가 오랜 역사에 기반을 두었고, 기독교에서 유난히 내세우는 ‘선택’을 받았으며, 그렇게 태어난 내가 그렇지 않은 타인들보다 신앙 측면에서 특별하고 우월하다는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 단어가 종교적 신념이 부족했던 나의 신앙적 자산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듯해서 든든한 ‘빽’이라도 얻은 듯 기분 좋게 느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봐서도 알겠지만, 교회와 기독교에서 ‘선택’이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특별하고 배타적인 권위를 나타내거나 의도하고 있다.


이 같은 신의 선택을 한국에 연결 지어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80년대부터 세계적인 부흥을 경험했던 한국의 기독교는 이런 의미의 선택을 유난히 강조한 결과, 유대인들에 이어 한국인들이 새롭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식의 말을 서슴없이 퍼뜨리기도 했다. 그것은 그때부터 한국에서 워낙에 기독교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데서 비롯된 오만한 선민의식이고, 과도한 찬사이자 자기 최면이며 착각이었다. 그렇게 물 끓는 냄비 같이 급증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질적 측면에 대한 판단은 둘째 치고, 그로부터 이십 년도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실질적 기독교 인구는 점차 감소 추세로 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뿐 아니라 전통적 기독교 국가들이었던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서 기독교인들, 특히 젊은 기도교인은 이미 빠르게 줄어들었거나 줄어들고 있다.


대학생이 된 후에 나는 모태신앙이라는 단어를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모태신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단어가 마치 자신의 신앙의 역사나 권위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할 때가 많다. 그들이 스스로 그런 것을 의식해서 말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소통의 맥락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들은 보통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태신앙인데요.” 또는 “나는 모태신앙인이에요.” 또는 “내 신앙은 모태에서 시작됐어요.” 등으로 말하곤 한다. 그렇게 이상한 어법으로 말하면서 그들은 결과적으로 개인의 신앙의 기원에서 뭔가 우열을 나누고, 교회 내에서 은근히 신앙의 권위의 높낮이를 가르고 나누기도 한다.


물론 그들은 모태신앙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입에 올림에 있어서, 자신의 신앙 기원의 권위나 신앙의 우열을 의식적으로 가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신앙에서 태생적 우열이라도 있느냐는 반박이라도 나온다면 그들은 단박에 자신은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할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신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입발린 소리를 하기 마련이다. 신 앞에서 인간이 불평등하다고 말하는 것과 모태신앙이 선택 받은 자의 권위임을 거론하는 것이 동위적인 발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신 앞에서 인간은 매우 불평등하게 태어나서 불평등하게 자라고 불평등하게 살고 있다. 인간들의 삶을 아주 잠깐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너무 뻔한 사실 아닌가. 태생부터 성장과 노화를 거쳐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불평등하다는 것이!


신 앞에서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인간이 죽어서 생전의 죄를 재판할 때, 인간사회에서의 불평등을 고려하여 신이 알아서 천국행인지 지옥행인지 판단해 줄 것이라는 상상력을 동원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불평등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신의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나는 모태신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매우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모태신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거니와, 그런 단어 사용에서 신앙인들의 신앙적 또는 교우적 관계가, 작지만 저절로 미묘하게 왜곡되고 분열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모태신앙인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어느 날 나는 엉뚱하게도 종교라고는 기독교밖에 없었던 중세 유럽인들을 떠올렸다. 그들 사회에서 누군가가 ‘나는 모태신앙인데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중세 유럽인들 가운데 모태 신앙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무려 천 년 넘게 모두가 기독교인일 수밖에 없었던 그 사회에서 모태신앙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그런 단어가  사용되기는 했을까. 그런 단어를 사용할 만한 종교적 문화적 가치가 있었을까.


이런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마치 어느 한국인이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한국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즉 ‘모태 한국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모두가 한국인인 우리 중에 누가 그런 말을 할 생각이나 할까.


오늘날 혹시 신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확대하거나 재해석해서 말한다 해도 한 개인에게 그런 선험적이고 전례적인 특권은 의미가 없다. 개인주의적 느낌이 들긴 하지만, 도대체 한 개인의 신앙과 정체성에 있어서 ‘모태’라는 말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3.


하지만 한 개인이 어떤 문화에 속해서 성장했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특정 문화의 내용과 형식이 친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사람의 심신의 성장과 성격에도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나중에 공부해서 배우고 익히는 것보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접하고 익힌 것이 더 근본적이고 깊은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것을 환경적 태생적 결정론 수준으로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결정론은 거의 언제나 열린 공간과 상호작용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독단과 폐쇄라는 악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가끔 내가 불교 집안에서 자랐다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가 있었다. 지나치게 소박하거나 터무니없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내가 모르는 한자나 이해하기 어려운 불교 용어를 접했을 때 특히 그랬다. 불교문화와 깊이 연루된 수많은 한국 역사를 접할 때도 그랬다. 한국에 있는 불교 사찰들을 찾아갈 때도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만약 내가 불교에 친숙한 집안에서 성장했다면,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불교문화에 더 익숙해지고, 불교 사찰이나 경전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하게 되지 않았을까. 불교문화를 잘 이해한다면 혹시라도 한국과 동양의 역사와 문화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게 되지 않았을까. 한자를 조금이라도 더 잘 읽을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현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기대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실제로는 이뤄질 수 없었던.


그런 생각은 내가 기독교에 친숙한 집안에서 자라면서 불가피하게 교회 의식과 서양문화와 역사에 조금이나마 더 익숙해졌다는 자각에 따른 상상이었다. 교회에 다니면서 저절로 성경 내용에 익숙하게 되는데, 그것은 또한 자연스럽게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전과 서구 문명의 성장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을 동반하게 된다. 나아가, 기독교와 교회의 신앙과 역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나는 신앙과 철학의 상관성에 관한 궁금함을 해갈하기 위해서도, 비록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서양문화의 역사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는... 뭐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아무래도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무리 불교에 친숙한 집안에서 자랐다 해도 내가 별도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한문이나 한국 역사에 조예가 깊어질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나중에라도, 마음만 잘 먹고 노력한다면, 나는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화와 언어도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 놓고는 뒤늦게 후회하면서 이런 소리를 했던 것이다. 자고 놀 시간 아껴서 몇 년만 노력했다면 한문과 불교문화에도 지금보다 훨씬 더 친숙해졌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아 놓고 나중에 한탄만 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매우 서구화 또는 미국화되었으므로, 불교문화보다는 차라리 서양문화에 친숙해지면서 자랐던 것이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다지 행운은 아니겠지만, 이 사회에서 그것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식민지는 다 불행하겠지만,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라고. 그랬다면, 영어라도 잘할 수 있지 않았겠냐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식민지라도 다 같은 식민지는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식민지를 경험했어도, 스페인의 식민지였는지, 프랑스 또는 영국의 식민지였는지, 미국의 식민지였는지를 생각해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벌어지지 않은 일을 두고, 이 문제와 관련해서 나는 꼭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식민지가 된 것은, 또 우리 선조가 식민지 주민으로 살게 되었던 것은 대단히 불행한 사태이므로, 나로서는 그저 식민지가 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식민지가 되면서까지 다른 나라, 특히 강대국의 언어나 문화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존감이 극도로 낮은 사람의 미친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은 관대한 주인의 노예가 되느냐 아니면 덜 관대한 주인의 노예가 되느냐를 놓고 선택하려는 바보 같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정답은 노예가 되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고자 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다.


그래서 결국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람에게 자란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주어진 것만 중요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원래 주어진 것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나아가 주어지지 않은 것까지 애써 찾아 구할 수 있게 하는 성품의 성장까지 합해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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