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교회의 추억
4.
내가 어릴 때 다녔던 대방교회는 대방동에 있는 강남중학교 옆으로 올라가는 도로에서 왼쪽으로 첫 번째 골목에 있다. 바로 그 골목이 지금까지 내가 말했던, 내가 자라면서 각종 게임을 하고 축구를 했다는 흙길이 있는 곳이다. (과거에 강남중학교의 정문은 서울공업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여의대방로를 향해 나 있었지만, 현재는 방금 위에 밝힌 “옆으로 올라가는 도로”와 곧바로 통하는 곳으로 옮겨져 있다.)
대방교회에 대한 깊은 추억과 사랑을 가진 나는 대방교회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현재 대방교회의 웹사이트를 보면, 이 교회의 연혁은 194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6년이라면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이듬해이므로, 한국의 교회에 관한 한 무척 오래된 역사에 속한다. 그런데 대방교회는 창립된 연도만 소개하고 있을 뿐, 이후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한 기록을 내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오래된 것은 가치 있는 것이니, 이렇게 오래된 역사라면 자기 교회의 역사를 자세히 소개할 만도 하건만, 대방교회는 자신의 역사를 소개하는 기록이 대단히 부실하다. 1946년에 누가 어떻게 설립했고, 그로부터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관한 서술이 전혀 없다. 한국에서 이 정도의 역사를 가진 교회라면 지역교회사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연혁을 자세히 밝혀두는 것이 옳아 보이는데, 대방교회는 오래된 교회가 가질 수 있는 신앙의 권위를 몰라서 적지 못한 것인지, 알기는 하지만 일부러 내놓지 않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천 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를 세밀하게 알고자 하는 것과 자기 교회의 역사를 세밀하게 알고자 하는 것은 비슷한 일일지 모른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본 사람들은 누구나 아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는 밝히기 자랑스러운 것도 있고 부끄러운 것도 있는 법이다. 거기에는 거의 언제나 창조와 성장과 분열과 대립과 투쟁과 몰락과 적응과 부활의 사건들이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대방교회는 그러한 기독교 역사를 이해하고 스스로에게 조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무튼 대방교회 웹사이트에서 찾지 못한 내용을 나는 다행히 '디지털동작문화대전'에서 발견했다. 그 자료에 따르면, 대방교회는 1946년 9월 4일에 김은석 목사와 교인 6명이 창립했다. 이후 대방교회는 한국전쟁 기간에 해산됐다가 1954년에 현 위치에 부지를 확보하고 미군의 자재 원조를 받아서 예배당을 건축했다.
김은석 목사에 이어 채태원, 안영준을 거쳐 김시원 목사가 취임했는데, 아마 그때 이 교회가 분열되었던 듯하다. 이제는 자초지종을 알지 못하지만, 결국 김시원 목사는 장로들과의 갈등 후에 대방교회를 떠났다. 1959년에 그는 대방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영동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된다. 그것은 영동교회의 연혁에 등장한다. 그때부터 그는 (교회 운영에서 장로들의 권한을 최대한 축소하기 위해) 교회 내에 장로 숫자를 겨우 한 명 정도로 유지하게 된다. 그는 교회로 들어오는 헌금 대부분을 지방 선교에 사용했다고 한다.
김시원 목사가 대방교회에 있을 때 나의 큰외삼촌이 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큰외삼촌은 김시원 목사가 대방교회를 떠나 영동교회를 설립하자, 그를 따라 영동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중에 대방동으로 이사 온 우리 집에서도 나의 어머니는 큰오빠를 따라서 영동교회로 가게 됐다. 그것이 우리 집과 영동교회의 관계의 시작이었다.
김시원 목사 시절 대방교회의 분열에 관해 나는 나에 비해 대방교회를 더 잘 알고 있는 나의 형님으로부터 들은 바가 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형님은 고1 때 우연히 친구를 따라 대방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금세 교회와 기독교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웬만하면 어머니가 다니는 영동교회로 갈 만도 하건만 형님은 친구를 따라 굳이 대방교회에 정착했다.
그럼으로써 1960년대 말부터 우리 가족은 대방동에서 두 개의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어머니와 둘째 누나는 영동교회로, 형님과 그에 이어서 셋째 누나는 대방교회로 갔다. 어머니는 형님이 기독교 신앙을 갖는 한 어느 교회로 다니든 괜찮다고 생각하셨다. 그리하여 나의 셋째 누나도 초등학생 시절에는 형을 따라 대방교회로 갔으며, 결국 나까지 대방교회로 가게 되었다.
5.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대방교회를 오랫동안 이끌던 담임 목사가 은퇴했다. 그 뒤를 이어 교회를 맡게 된 사람은 꽤 젊은 '강도사'였다. 그는 원래 나의 형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학생부를 담당하던 전도사였다. 그런 그가 당시 한국에서 꽤 규모가 있던 중형교회인 대방교회를 덜컥 맡게 된 데는 뒷사연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날 갑자기 새로 예배 설교자가 바뀐 것을 보고 아이들이 수근거렸다.
"목사님 은퇴하셨고, 이제부터는 강도사님이 목사님 역할을 하나 봐."
"우리 교회가 얼마나 큰데, 저렇게 젊은 사람이 어떻게 우리 교회를 맡니? 곧 다른 분이 올 거야."
대방교회를 오래 다닌 친구들은 새로 교회의 설교자가 된 강도사에 대하여 나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전하곤 했다. 친구들과의 우정과 성가대 활동에만 관심이 많은 나는 우리 교회의 담임 목사가 누군가에 관해서는 사실 아무 관심도 없었다. 학생 예배는 어른들이 보는 예배와는 다르기 때문에 나는 어차피 교회에서도 담임목사를 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조금 특이하게 느끼기는 했다. 성가대석에서 가깝게 보았던 은퇴한 목사나 어머니가 다니는 영동교회의 김시원 목사님이나 모두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이었다. 교회 목사라고 하면 설사 턱에 하얀 수염이 많지 않다고 해도 으레 할아버지 정도의 연륜을 가진 남자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새로운 대방교회의 설교자는 조금 낯설게 보였다.
보통 담임목사가 공석이 되면, 내부에 적임자가 없을 경우 외부에서 연륜 있는 목사를 청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겨우 전도사 티를 갓 벗은 사람에게 큰 교회를 맡기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여러 교회를 보아왔지만, 개척교회도 아닌 기성 중형 교회를 그렇게 젊은 전도사나 강도사가 맡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단어의 어감이 그리 좋지 않게 들릴지 모르지만, '강도사'는 장로교회에서 목사가 되기 전 수련 단계에 있는 일종의 목사 후보자를 일컫는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우리 교회를 맡았던 담임목사가 은퇴한 후 그 전도사는 곧 강도사가 되었고 그 자격으로 대방교회를 이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어서 대방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나로서는 강도사라는 직책 자체를 대방교회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을 정도로 특이한 상황이었다.
대방교회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나는 우연히 한 언론 매체에서 대방교회에 관한 기사를 발견했다. 그 기사는 2000년대 초에 대방교회에 목사와 일부 신도들 사이에 중대한 갈등이 벌어져 분열되었다고 보도하는 내용이어서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당시 내분으로 인해 일부 교인들이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은 당연하다.
사실 한국의 개신교회에서 목사와 신도들 사이의 분란은 전혀 새롭거나 놀랄 일이 아니며, 웬만해서는 뉴스거리도 안 될 만큼 흔한 일이 되었다. 교회가 둘로 갈라지고 교인들이 맹렬하게 대립하는 이면에는, 마치 기업의 오너나 독재자처럼 군림하려는 목회자의 비뚤어진 권력욕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권력이 독점되면 재정이 불투명해지고, 무리한 세습과 도덕적 타락이 뒤따르기도 한다. 반목하고 분열된 교회들을 보면, 특정인이나 세력의 막강한 권력 주변에 기생하며 아첨하는 사람들이 패거리를 지어 반대파를 미친 듯이 공격하곤 한다. 갈등과 분열이 벌어진 교회에서, 목사는 선하고 경건하고 신앙적으로 올바른데, 교인들끼리 이권 다툼을 벌여 교회가 쪼개졌다는 뉴스를 들어본 적은 없다.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그 본질은 결국 권력의 남용과 이익을 위한 욕망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그리고 나와 우리 가족의 신앙적 궤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대방교회에서 이렇게 분열된 교회의 전철을 두 차례나 밟았다는 사실은 이미 이 교회를 떠난 지 오래된 나에게 괜한 부끄러움과 깊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다행스럽게도, 대방교회는 그 숱한 어려움이 지나간 후에도 아직까지 잘 살아남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가 흙먼지를 마시며 뛰어놀던 그 골목은 거의 그대로인데, 교회 건물만 커진 것은 어딘가 쓸쓸함을 자아낸다. 어릴 적 내가 보았던 소박한 첨탑과 본당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그 계단 아래에 있었던 작은 터널은 모두 아득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6.
내 어린 시절 대방교회가 겪었던 신앙과 욕망과 분열과 재정립은 비단 한 동네 교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이천 년의 역사 속에서 반복해 온 모순의 아주 작은 축소판에 불과하다.
대체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신실한 신앙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누구든 교회에 출석하면 교인이 된다. 종교적 측면에서 교회에 적을 두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긴 하지만, 참된 신앙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인정될 만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전도와 선교를 중요시하지만, 온 나라 사람들이 교인이 되고 온 세계가 기독교로 뒤덮인다 해도 인간의 갈등과 싸움은 끝날 일이 없을 것이다. 천 년 이상 동안 기독교가 유일한 종교였던 중세 유럽은 이러한 역사의 한 예에 불과하지만, 종교가 한 사회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해서 평등과 평화가 찾아오고 사람들이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탁월한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 사후 발전하기 시작한 기독교는 유대인으로부터 로마인으로, 그럼으로써 결국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로마를 멸망시켰던 게르만인들이 기독교에 포섭됨으로써 기독교는 비로소 유럽을 장악한 유일한 종교가 되었다. 유일신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는 다른 종족의 신과 종교를 부정하고 그 종교와 관련된 문화마저 무참히 파괴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인류 역사에서 매우 독특하고 배타적인 이 유일신 종교는 "땅 끝까지" 포교한다는 모호한 규정을 정하고, 매우 공격적으로 다른 사회와 문화를 침략하여 자신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처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 때는 지구의 크기를 알지도 못했을 텐데,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단순하게 이해한 유럽인들은 훗날 영토 정복에서 그랬던 것처럼, 종교에서도 기독교 정복과 제패의 기초로 삼게 되었다. 그것이 모두 ‘신이 원하고 신을 위한’ 일이라는 상상이나 주장과 함께 말이다.
이교도에 대한 포교활동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유럽인들이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에도 그들은 서로 자신의 신앙만 옳고 자신의 해석과 판단과 행동만 올바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신을 위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유럽의 외부 지역으로 진출하기 전, 거의 천 년간 유럽인들은 자신들끼리 치고받고 싸웠는데, 그것은 그들의 전쟁과 과학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점차 기술이 발달하고 힘이 넘치게 되면서 그들은 배를 타고 유럽 밖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모험심에 가득 차서 드디어 대서양을 건넜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적 가르침과 사상으로 상상했던 것과 달리 세계가 둥글면서 매우 넓고, 아직 기술과학 문명이 자신들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많으며, 그들로부터 해 먹을 것은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리적 혁명의 전개과정에서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은 신이 선택한 ‘인간’이고, 다른 대륙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제를 받아야 할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믿음의 근거와 정당성을 성경에서 찾아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매우 방대하고 모호하기도 하며 종종 모순적이기까지 한 성경의 수많은 문구들은 그만큼 다양한 해석의 통로가 될 수 있었다. 19세기 미국의 기독교인들도 흑인들을 노예로 인정하고 억압하고 착취할 수 있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내지 않았던가.
그 놀라운 발견과 자신들의 생각을 정당화할 수 있는 독특한 성경 해석 후에 근대 역사의 수세기 동안 그들이 다른 대륙으로 가서 저지른 악행은 세계 도처에 차고도 넘친다. 그것은 원래 예수는 누구이고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기독교는 충분히 자기중심적이고 몰염치하고 파괴적이어서, 온 세계의 다양한 문화적 유산을 짓밟고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멸살하고 약탈하면서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기독교를 통해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했으며, 스스로 자신의 악행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었다. 또는 그것이 신의 섭리라고 이해했다.
이슬람이 한 손에는 코란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나섰던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용감하게 전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도와 선교가 문명이라는 횃불로 이교도 세계에 어둠을 밝히는 발걸음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곧 역사의 진보이고 신의 왕국의 확장이라고도 생각했다. 그것이 유럽이 아프리카와 남북아메리카와 아시아를 향해 저질렀던 선교와 전도의 진정한 발자취이기도 하다.
그러한 침략과 파괴의 혼란 뒤에 그 대부분의 지역에 기독교 신앙과 교회들이 평화롭게 유지되는 기적이 발생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넘어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사도들과 바울의 가르침이 마침내 지상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을 넘어서 모든 현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