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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Oct 26. 2024

교회와 나 (2)

대방교회의 추억

4.


내가 어릴 때 다녔던 대방교회는 대방동에 있는 강남중학교 옆으로 올라가는 도로에서 왼쪽으로 첫 번째 골목에 있다. 바로 그 골목이 지금까지 내가 말했던, 내가 자라면서 각종 게임을 하고 축구를 했다는 흙길이 있는 곳이다. (과거에 강남중학교의 정문은 서울공업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여의대방로를 향해 나 있었지만, 현재는 방금 위에 밝힌 “옆으로 올라가는 도로”와 곧바로 통하는 곳으로 옮겨져 있다.)


대방교회의 웹사이트를 보면, 이 교회의 연혁은 194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46년이라면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이듬해이므로, 한국의 교회에 관한 한 무척 오래된 역사에 속한다. 그런데 대방교회는 창립된 연도만 소개하고 있을 뿐, 이후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한 기록을 내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오래된 것은 가치 있는 것이니, 이렇게 오래된 역사라면 자기 교회의 역사를 자세히 소개할 만도 하건만, 대방교회는 자신의 역사를 소개하는 기록이 대단히 부실하다. 1946년에 누가 어떻게 설립했고, 그로부터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관한 서술이 전혀 없다. 한국에서 이 정도의 역사를 가진 교회라면 지역교회사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연혁을 자세히 밝혀두는 것이 옳아 보이는데, 대방교회는 오래된 교회가 가질 수 있는 신앙의 권위를 몰라서 적지 못한 것인지, 알기는 하지만 일부러 내놓지 않는 것인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천 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를 세밀하게 알고자 하는 것과 자기 교회의 역사를 세밀하게 알고자 하는 것은 비슷한 일일지 모른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본 사람들은 누구나 아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는 밝히기 자랑스러운 것도 있고 부끄러운 것도 있는 법이다. 거기에는 거의 언제나 창조와 성장과 분열과 대립과 투쟁과 몰락과 적응과 부활의 사건들이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대방교회는 그러한 기독교 역사를 이해하고 스스로에게 조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무튼 대방교회 웹사이트에서 찾지 못한 내용을 나는 디지털동작문화대전에서 발견했는데, 그 자료에 따르면, 대방교회는 1946년 9월 4일에 김은석 목사와 교인 6명이 창립했다. 이후 대방교회는 한국전쟁 기간에 해산됐다가 1954년에 현 위치에 부지를 확보하고 미군의 자재 원조를 받아서 예배당을 건축했다.


김은석 목사에 이어 채태원, 안영준을 거쳐 김시원 목사가 취임했는데, 아마 그때 이 교회가 분열되었던 듯하다.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지만, 결국 김시원 목사는 장로들과의 갈등 후에 대방교회를 떠났다. 1959년에 그는 대방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영동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된다. 그것은 영동교회의 연혁에 등장한다. 그때부터 그는 (교회 운영에서 장로들의 권한을 최대한 축소하기 위해) 교회 내에 장로 숫자를 겨우 한 명 정도로 유지하게 된다. 그는 교회로 들어오는 헌금 대부분을 지방 선교에 사용했다고 한다.


김시원 목사가 대방교회에 있을 때 나의 큰외삼촌이 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큰외삼촌은 김시원 목사가 대방교회를 떠나 영동교회를 설립하자, 그를 따라 영동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중에 대방동으로 이사 온 우리 집에서도 나의 어머니는 큰오빠를 따라서 영동교회로 가게 됐다. 그것이 우리 집과 영동교회의 관계의 시작이었다.


김시원 목사 시절 대방교회의 분열에 관해 나는 나에 비해 대방교회를 더 잘 알고 있는 나의 형으로부터도 들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형은 고1 때 우연히 친구를 따라 대방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금세 교회와 기독교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웬만하면 어머니가 다니는 영동교회로 갈 만도 하건만 형은 친구를 따라 굳이 대방교회에 정착했다.


그럼으로써 1960년대 말부터 우리 가족은 대방동에서 두 개의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어머니와 둘째 누나는 영동교회로, 형과 이어서 셋째 누나는 대방교회로 갔다. 어머니는 형이 기독교 신앙을 갖는 한 어느 교회로 다니든 괜찮다고 생각하셨다. 그리하여 나의 셋째 누나도 초등학생 시절에는 형을 따라 대방교회로 갔으며, 결국 나까지 대방교회로 가게 되었다.



5.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대방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신 00 목사는 은퇴했다. 그에 이어 새로 교회를 맡게 된 사람은 임 00 강도사라는 분이었다. 그는 원래 나의 형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대방교회 고등부 담당 전도사였다. 그런 분이 당시로서는 꽤 큰 중형교회였던 대방교회를 맡게 된 데는 뒷사연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담임목사가 공석이 될 때 교회는, 내부적으로 담임목사로 내세울 만한 적당한 사람이나 부목사가 없으면 외부에서 담임목사를 청빙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아직 전도사에 불과했던 사람에게 교회를 맡기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단어의 어감이 그리 좋지 않을지 모르지만, ‘강도사’는 장로교회에서 목사가 되기 전 수련 단계에 있는 일종의 목사 후보자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임 전도사가 곧 임 강도사가 되었고 그가 대방교회를 맡게 된 것이다.


어디서 듣고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지만, 나의 친구들은 그의 전력에 관한 소문이 좋지 않다고 전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는 약간 고집이 세고 독선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이 전한 소문이므로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에 따르면, 그의 친형은 중앙정보부의 간부였으며, 그 권력을 배경으로 임 전도사가 대방교회의 실권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임 강도사의 형은 전두환이 집권했을 때는 신군부의 전위기구인 사회정화위원회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사회정화위원회는 농촌의 새마을운동기구에 상응하는 도시 내 관제조직이었으며, 사회개혁을 한다는 명목으로 거의 초법적 활동을 했던 신군부 보위기구였다. 이 기구를 통해 거의 6만 명에 이르는 시민이 검거되었고, 그 가운데 무려 3만여 명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교회는 개념상으로는 이런 세속 권력과 무관해야 마땅하지만, 당시에 대방교회는 임 전도사 가족의 세속 권력적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임 강도사의 앞길은, 그때 우리가 소문을 들으면서 예감했던 것이 적중한 듯, 그는 꽤 고집스럽고 독단적으로 교회를 운영했으며, 훗날 정말로 거세고 독선적인 목사가 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2000년대 초에 이르러 그는 교회 내분의 주인공이 되어서 ‘뉴스 앤 조이’라는 기독교계 신문을 통해 2003년 9월 10일 한 기사에 보도됐다.


그 기사에 따르면 임 목사와 신도들 사이에 1년 이상 내분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내분이 벌어지면, 내분을 일으킨 원인이나 진실과 관계없이, 교인들은 일반적으로 목사를 옹호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나누어지기 마련이다. 수많은 교회에서 이런 일은 반복적으로 자행됐다. 이미 오래전 일이고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이 신문의 기사는 “임 00 목사의 전횡”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대방교회의 내분이 임 목사의 잘못에서 비롯됐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국의 많은 개신교회들에서 목사와 신도들 사이의 분란은 끊임이 없어서, 전혀 새롭거나 놀랄 일이 아니며, 웬만해서는 뉴스거리도 안 된다. 목사의 전횡과 축재와 독재와 폭력은 한국 개신교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주로 목사의 권력 독점, 과도한 돈 욕심, 물욕과 교회세습 욕망, 여성 신도에 대한 성폭력 등을 통해 나타난다.


갈등과 분열이 벌어진 교회에서, 목사는 선하고 경건한 사람인데 교인들이 이권 다툼으로 싸우고 성폭력이 자행되어 교회가 둘로 갈라졌다는 식의 뉴스를 들어본 적은 없다. 교회가 분열되고 교인들이 서로 두 패로 나뉘어 싸우는 거의 모든 원인은 기업의 막돼먹은 사장이나 독재자처럼 독선적이고 고집 세고 폭력적인 목사로부터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개신교회를 기업에 비유해서 말하면, 개신교에서 목사는 기업의 대표이사나 설립자나 소유자와 비슷한 지위에 해당된다. 목사는 기업의 사장과 달리, 교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함으로써 기업 사장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반목하고 분열된 교회를 보면, 그러한 목사 밑에 그와 야합하거나 아첨하는 장로들과 집사들이 한 패거리가 되어서 반대파와 미친 듯이 싸우곤 한다.


대부분의 범죄가 그렇듯이 돈과 섹스는 교회에서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비리와 부정의 근본이다.


개신교회에서 흔히 벌어지는 목사와 교인들과의 갈등과 대립 문제가 하필 내가 다녔던 대방교회에서도 있었다고 하니 괜히 나까지 부끄럽다. 그러나 이 교회는 임 목사 이후 현재까지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적당하게 몸집도 불었다. 경제 발전이 더딘 작은 동네에 있는 교회라 성장은 제한되기는 했지만, 과거에 내가 다니던 때에 비해서는 무척 커진 편이다.


대방교회의 외모는 내가 다닐 때와는 완전히 변했지만, 여전히 내가 자라던 동네 골목에 그대로 남아 있다. 나에게는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 아직도 애정을 가지고 기억한다. 툭하면 옛 동네를 모두 뒤집어엎고 대형 고층건물들과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선 서울의 역사를 생각할 때 대방동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지 않았고 거리와 대방교회는 아직도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서 불행 중 다행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시간문제일지 모른다. 최근에 내가 대방동을 직접 걸어다니며 본 바에 따르면 대방초등학교 뒤와 공군본부 부근에는 새로운 아파트 단지들이 이미 들어섰다. 대방교회 또한 연속적으로 교회를 리모델링하면서 좁은 땅에서도 몸집을 최대한 키우고 있었다.)



6.


대체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신실한 신앙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누구든 교회에 출석하면 교인이 된다. 종교적 측면에서 교회에 적을 두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긴 하지만, 참된 신앙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인정될 만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전도와 선교를 중요시하지만, 온 나라 사람들이 교인이 되고 온 세계가 기독교로 뒤덮인다 해도 인간의 갈등과 싸움은 끝날 일이 없을 것이다. 천 년 이상 동안 기독교가 유일한 종교였던 중세 유럽은 이러한 역사의 한 예에 불과하지만, 종교가 한 사회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해서 평등과 평화가 찾아오고 사람들이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탁월한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 사후 발전하기 시작한 기독교는 유대인으로부터 로마인으로, 그럼으로써 결국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로마를 멸망시켰던 게르만인들이 기독교에 포섭됨으로써 기독교는 비로소 유럽을 장악한 유일한 종교가 되었다. 유일신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는 다른 종족의 신과 종교를 부정하고 그 종교와 관련된 문화마저 무참히 파괴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인류 역사에서 매우 독특하고 배타적인 이 유일신 종교는 "땅 끝까지" 포교한다는 모호한 규정을 정하고, 매우 공격적으로 다른 사회와 문화를 침략하여 자신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처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 때는 지구의 크기를 알지도 못했을 텐데,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단순하게 이해한 유럽인들은 훗날 영토 정복에서 그랬던 것처럼, 종교에서도 기독교 정복과 제패의 기초로 삼게 되었다. 그것이 모두 ‘신이 원하고 신을 위한’ 일이라는 상상이나 주장과 함께 말이다.


이교도에 대한 포교활동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유럽인들이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에도 그들은 서로 자신의 신앙만 옳고 자신의 해석과 판단과 행동만 올바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신을 위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유럽의 외부 지역으로 진출하기 전, 거의 천 년간 유럽인들은 자신들끼리 치고받고 싸웠는데, 그것은 그들의 전쟁과 과학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점차 기술이 발달하고 힘이 넘치게 되면서 그들은 배를 타고 유럽 밖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모험심에 가득 차서 드디어 대서양을 건넜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적 가르침과 사상으로 상상했던 것과 달리 세계가 둥글면서 매우 넓고, 아직 기술과학 문명이 자신들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많으며, 그들로부터 해 먹을 것은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리적 혁명의 전개과정에서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은 신이 선택한 ‘인간’이고, 다른 대륙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제를 받아야 할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믿음의 근거와 정당성을 성경에서 찾아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매우 방대하고 모호하기도 하며 종종 모순적이기까지 한 성경의 수많은 문구들은 그만큼 다양한 해석의 통로가 될 수 있었다. 19세기 미국의 기독교인들도 흑인들을 노예로 인정하고 억압하고 착취할 수 있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내지 않았던가.


그 놀라운 발견과 자신들의 생각을 정당화할 수 있는 독특한 성경 해석 후에 근대 역사의 수세기 동안 그들이 다른 대륙으로 가서 저지른 악행은 세계 도처에 차고도 넘친다. 그것은 원래 예수는 누구이고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기독교는 충분히 자기중심적이고 몰염치하고 파괴적이어서, 온 세계의 다양한 문화적 유산을 짓밟고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멸살하고 약탈하면서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기독교를 통해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했으며, 스스로 자신의 악행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었다. 또는 그것이 신의 섭리라고 이해했다.


이슬람이 한 손에는 코란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나섰던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용감하게 전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도와 선교가 문명이라는 횃불로 이교도 세계에 어둠을 밝히는 발걸음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곧 역사의 진보이고 신의 왕국의 확장이라고도 생각했다. 그것이 유럽이 아프리카와 남북아메리카와 아시아를 향해 저질렀던 선교와 전도의 진정한 발자취이기도 하다.


그러한 침략과 파괴의 혼란 뒤에 그 대부분의 지역에 기독교 신앙과 교회들이 평화롭게 유지되는 기적이 발생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넘어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사도들과 바울의 가르침이 마침내 지상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을 넘어서 모든 현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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