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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Oct 19. 2024

이 또한 지나가리라 (3)

학교와 선생님 - 여명

6.


마침내 악몽 같았던 3학년 1학기가 끝났다.


나는 비로소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방학을 맞았다. 그러나 여름방학은 매우 짧았고, 다시 2학기 되었을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학교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탈출구는 없었지만 한 가지 소망은 있었다.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1학기만 가르치고 사라졌던 것처럼 3학년 때도 그런 일이 벌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물론 그런 행운은 발생하지 않았다. 2학년 때처럼 선생님이 출산한 것도 아니었고, 우연히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다. 선생님은 1학기 때와 마찬가지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났으며, 나는 다시 냉정한 선생님을 보면서 앉아 있어야 했다. 또다시 지루하고 가련한 한 학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다만, 아주 소소하지만 다행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2학기 때 나는 더 이상 반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1학기 때는 모든 임원을 자기 뜻대로 임명했던 선생님이 이번에는 학생들의 투표로 임원 선거를 하도록 했다. 나는 다행히 반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맞았고, 결국 선거 결과 부회장이 되었다. 그때 우리 반에서는 반장과 부반장, 그리고 회장과 부회장을 아이들의 투표로 뽑았다. 회장과 부회장은 단지 한 주에 한 번 하는 학급회의를 주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는 반장이 되기는 싫었지만, 그래도 은근히 아이들의 자유로운 투표를 통해 임원이 되기를 속으로 바랐던 모양이다. 회장 후보가 되었을 때도 사퇴하겠다고 우기지 않았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 결과, 나는 반장이 아니라 부회장이 되었고, 그 결과에 안도할 수 있었다. 그때도 신아는 부반장이 되었으며 여전히 임원회에서 만났다.


아무튼, 나는 담임 선생님이 요구하는 ‘반장의 책임과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로써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더 이상 “반장이 눈치가 없어서” 또는 “반장이 멍청해서”라는 식의 경멸적이고 모욕적인 언사를 듣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가 선생님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기뻤다. 그의 눈길과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1학기 때 그랬던 것처럼, 2학기에 반장이 된 아이에게도 방과 후에 남으라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에게 했던 것처럼 아이들 앞에서 반장을 공개적으로 욕하지는 않았다. 선생님 입에서는 더 이상 “반장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2학기에 반장이 된 아이에게 굳이 묻지 않았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 반장이 된 녀석은 선생님이 원하는 것을 잘도 사다 바치는구나’,라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 문제는 이미 나의 관심 밖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선생님과 멀리 있고 싶었고, 시간이 빨리 가서 3학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7.


훗날, 내가 어른이 되어서 그때의 일을 두고두고 돌이켜 생각해 볼 때, 그때 선생님이 나로부터 정작 원했던 것은 학용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학교에 육성회비를 내는 것처럼 나의 부모님도 자신에게 사적으로 ‘돈’을 주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그것을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나에게 학용품을 사 오라고 했고, 결국 엄마에게 그렇게 전하라고 하면서 엄마가 돈을 갖다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나는 그것 외에는 그가 어린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갈취하고자 했던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촌지’가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사회 어디에서나 ‘뇌물’도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학기마다 실시했던 담임 선생님의 ‘가정방문’은 특히 교사들이 ‘촌지’를 집중적으로 받을 기회를 제공했다. 지금도 교사들의 가정방문 제도가 있는지 모르지만, 가정방문이란, 담임교사가 학생들의 집을 찾아가서 가정 형편을 살피고, 아이의 성적이나 친구 관계 등에 관해 학부모와 상담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였다. 선생님들은 학기마다 일정 기간 내에 아이들의 집을 방문하도록 되어 있었다.


교사가 각 학생의 가정을 방문하면 평소에는 학교에 가지 않던 학부모들도 어쩔 수 없이 교사를 직접 사적으로 은밀하게 대면할 수밖에 없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할 때면, 나의 엄마도 그랬지만, 많은 학부모들이 자기 집으로 찾아오는 선생님에게 ‘촌지’를 주었다. 그것은 학부모들과 교사들 사이에 잘 알려진 일종의 관행이었다.


뇌물이 온 나라에서 횡행하던 그 시절에 학교 교사들에게 ‘촌지’를 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박봉인 교사들은 쥐꼬리 만한 월급 외에 추가로 돈을 벌기 위해서 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과외공부를 시키곤 했다. 우리는 소위 ‘뺑뺑이’로, 즉 추첨을 통해서 중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예전에 우리의 형과 누나들은 중학교 진학부터 입학시험을 치렀던 때가 있었다. 1차 입학시험에서 떨어지면 2차 그룹에 있는 학교로 지원해야 했으며 그 모든 것에서 낙방했을 때는 한 해 동안 재수를 해야 했다. 그러므로 많은 아이들이 사적으로 과외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학교 교사들은 그런 사교육 시장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직 학교 밖에서 학원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전이라 학교는 사립 학원처럼 과외공부의 장소가 되었으며, 선생님은 방과 후에 학생들에 의해 교실 청소까지 끝난 후 과외비를 낸 아이들을 교실에 모아놓고 과외공부 선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땐 그랬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해 볼 때, 학교 교사들이 보너스처럼 학부모들로부터 촌지를 받는 것, 또는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은밀하지만 잘 알려진 일이 아니었다. 감히 단언컨대, 탐욕스러운 악질 교사나 공무원들은 아마 본봉보다 뇌물 수입이 더 큰 경제적 비중을 차지했음이 틀림없다.


그해 봄, 실제로 담임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위해 우리 집에 왔을 때 엄마는 정성껏 과일과 차를 대접했다. 엄마는 어색하지만 매우 공손한 자세로 선생님 맞은편에 앉았고 나도 그 옆에 꿇어앉았다. 그는 내가 공부도 잘하고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했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겨우 두 주 남짓한 가정방문 기간에 육십 명도 넘는 아이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녀야 했으므로 그는 매우 바빴다. 한 집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 안 되었다. 매일 네댓 집을 찾아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와 마주 앉았을 때 선생님은 나에게 학용품을 사 오라고 한 것에 관해 말하지 않았고, 엄마도 거기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서로 대치하는 암묵적인 전선이었지만, 감히 입에 올릴 내용은 아니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성의로…”라는 말을 하면서,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선생님 무릎 앞에 하얀 봉투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짙은 갈색 나무 마루 위에서 하얀 봉투는 더욱 하얗게 보였다. 나는 그 봉투를 아주 잠시 보고 나서 일부러 눈을 거실 밖 마당으로 돌렸다. 나는 그것이 우리 집을 방문하는 선생님에게 주는 매우 당연한 성의 표시이자 선생님의 수고비이며 선물이라고 간주했다. 그런 것은 사회적 관습이자 교사에 대한 예의이며, 그것을 통해 선생님이 나를 더욱 귀엽게 여기게 될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다.


“아이고 뭐 이런 걸… 걱정 마세요. 얘는 똑똑해서 지가 알아서 잘하는걸요.”라고 말하면서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회색 양복을 입은 손을 뻗어 하얀 봉투를 집었다. 그리고 들고 왔던 학생부 서류 속으로 봉투를 잽싸게 밀어 넣으면서 갑자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선생님은 일어나서 손을 길게 내밀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알았지?”

“네”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선생님의 손길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서 밝고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마루에 앉은 지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선생님은 일어났으며, 엄마와 나는 대문 밖까지 그의 뒤를 따라 나가서 공손히 배웅했다.


똑같은 가정방문이 가을학기에도 있었다. 그때도 엄마는 선생님에게 과일과 차를 대접하고, 별 말도 없이 금세 일어서려는 선생님 앞에,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성의로…”라고 말하면서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또다시 “뭐 이런 걸” 하면서 그 봉투를 받아서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환하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 또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들어야 한다.”


그때는 가을이 한창 무르익은 10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8.


3학년 때 나의 담임 선생님이었던 그는 내가 6학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은퇴한다고 했다. 아마도 월요일 아침 조회였을 때 벌어진 일이지만, 전교생을 운동장에 세워놓은 채 학교는 은퇴식을 거행했다. 내가 대방초등학교에 다니는 6년 동안 딱 한 번 보았던 교사 은퇴식이었다. 단상에 오른 교장 선생님은 운동장 가득 울리는 스피커를 통해 그를 먼저 소개하면서 그의 노고를 치하한 후 전교생에게 그의 고별 훈시를 듣게 했다.


교사 연 00은 느린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단상으로 올라갔으며, 익숙하지 않은 마이크를 입 가까이 당겨서 목을 가다듬은 후 발언하기 시작했다. 4천 명도 넘는 학생들과 백 명 정도 되는 교사들 앞에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겨운 고별사를 전했다.


"교사로서 대방초등학교에서 근무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어린 학생들을 성심성의껏 가르쳤고 그것은 큰 보람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나라의 기둥이 되도록 하기 위해 교육 현장에서 일생을 보냈음을 진심으로 고맙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깊이 사랑했던 만큼 학교를 떠나는 이 자리는 몹시 아쉬운 자리입니다. 때로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나는 진실된 사랑과 인내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사실에 언제나 자부심을 느껴왔습니다. 착하고 장한 학생들을 성심껏 교육할 수 있어서 진정으로 행복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는 드디어 목이 메인 듯 울먹이는 소리로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학생 여러분, 부디 열심히 공부하고 올바로 자라서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면서 장한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간 여러분과 함께 해서 행복했습니다. 교장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에게 매우 감사드리고 이하 여러 선생님들도 부디 건강하시고..."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는 이야기를 그는 지극히 성스럽고 결연한 모습으로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전했다. 그렇잖아도 더듬거리는 그의 말버릇으로 인해 그의 말소리는 더욱 애잔하게 떨렸고 여러 단어들이 반복되었으며 나중에는 흐느끼는 듯했다. 고별사의 끝에 이르러 그는 드디어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기도 했다. 그것은 정말이었다. 눈물을 닦아냈다는 것 말이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왜 아니겠는가. 그는 교사로서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자신이 지극히 고귀한 직업에 투신하여 성심껏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다고 믿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런 고결한 작업을 마침내 마무리 짓는 순간이므로 그 자신은 더할 수 없이 벅찬 감동에 휩싸여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평생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신이 가진 지식과 지혜를 최대한 전하고자 눈물겨운 한평생을 보냈음에 그는 스스로 격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그가 단상에 오르기 전부터 그가 은퇴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이따금 징징거리는 스피커를 통해 그의 고별사가 넓은 운동장에 쩌렁쩌렁 울릴 때 나는 가슴속으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면서 치를 떨고 있었다. 그에 대한 오래된 저주와 함께 나는 경멸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숙이고 운동장 바닥에 침을 뱉었다. 어떻게 저 사람이 아무 벌도 받지 않고 은퇴한단 말인가.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증오했던 사람이 아무 사고도 당하지 않고 멀쩡하게 은퇴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못마땅했고, 그의 자연스러운 태도가 매우 가증스러웠다.


결국 나는 평생 그의 이름, 연 00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이름과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나아가, 안타깝고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가 비참한 여생을 살기를 바랐다. 비록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가 교사로서 아무 사고 없이 살다가 은퇴하고 여생까지 잘 살게 된다면 세상이 지극히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않은 곳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그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아홉 살의 나에게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파괴했던 사람.

나의 초등학교 추억을 짓뭉개버린 사람.

나로 하여금 무한한 불안과 공포심을 느끼게 했던 사람.

친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나를 무시하고 모욕했던 사람.

교사에 대해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사랑과 존경심을 무참하게 짓밟은 사람.

어린아이를 갈취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자 했던 사람.

아마도 나뿐 아니라 수많은 어린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괴롭혔던 사람.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어린 학생들을 학대하고, 그들의 부모로부터 촌지를 챙기고자 했던 사람.


그에 대한 저주와 증오는 나에게도 오랫동안 깊은 상처로 남았다. 나는 3학년이었을 때 명백하게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에 의해 깊은 고통을 받고 굴욕적이고 비참한 시간을 견디어내야 했다. 나는 그 비애와 고통을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했음을 너무나도 가련하게 생각했다. 나는 그에 의해 허물어진 자존감을 감내하고 살았다. 나의 초라함과 나의 무능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오로지 그를 통해서.


그런 트라우마로 인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사에 대한 나의 공포와 두려움은 지속되었으며, 학교 성적은 계속 떨어졌다. 불행하게도, 나는 6학년이 될 때까지도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 세상에 좋은 교사가 있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4학년부터 6학년까지 3년간 나는 3학년 때처럼 교사로부터 개인적인 갈취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때의 담임들은 모두 학교 교실에서 방과 후에 별도로 학생들에게 과외공부를 시키면서 돈을 벌었고, 그렇게 과외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성적을 고의적으로 높여주는 부당한 특혜를 주었다. 그것은 모든 학생들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가정 형편상 나는 그들이 가르치는 과외공부 그룹에 한 번도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가정방문 때마다 나의 어머니로부터 촌지를 받았으며, 언제나 내가 학교에서 별 말썽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아무 성의도 없이 말했다. 촌지를 거부한 선생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6학년 봄까지 매 학기마다 지속적으로 나의 성적이 떨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현실에 관새 성의를 가지고  엄마와 상의한 교사도 한 사람도 없었다. 학교는 나에게 그렇게 불편하고 부당한 곳으로 인식되도록 그들은 가르쳤다.




아주 긴 시간이 흘러서 내가 그때 그 선생이 나를 가르쳤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그가 나에게 했던, 또 나 이외의 다른 아이들에게 했을 사악한 행적을 조금 더 차분하고 무심한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에 대해서.


나는 수많은 학생들이 학창 시절에 관해 또 존경할 만하고 착한 선배 같았던 선생님들에 관해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각자의 사정과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저마다 아름답고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수 있다. 가장 가슴 떨리고 꿈 많던 시절에 순수한 사랑과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들, 존경하고 흠모하기도 했던 선생님들, 열정과 사랑으로 온갖 지식과 지혜를 전해 주었던 선생님들, 다정한 교실과 교정...


나도 그중 한 명이다. 나 역시 좋은 선생님을 아예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 중1 때나 중3 때는, 적어도 나에게는 좋은 선생님을 만났고 그들과 매우 친하게 지낸 편이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때 깊은 상처로 남았던 학교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중학생이었을 때 상당히 치유된 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3학년 때 나를 짓밟았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훗날, 나는 그와 한 번도 화해와 용서의 기회를 얻지도 못한 채 그가 이미 나이 들어 사망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알지도 못하고 뉘우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격동의 세월에 모두 그렇게 힘들게 살아냈고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겨우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삶인데, 그토록 돈과 권력에 탐을 내고 어린아이들을 괴롭히면서 괴롭히면서 이익을 얻으려고 했단 말인가.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었다.


나는 이제라도 내 가슴 깊이 새겨진 그 처참한 흔적을 완전히 지워내고 싶다.

그래서 한때 치가 떨리도록 간직했던 그에 대한 증오를 철저히 털어내고 싶다.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됐던 고통의 흔적을 지우고 올바른 치유를 위해서라도.

또 선의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그가 이미 사라졌는데 나는 누구로부터 사과를 받고 누구와 화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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