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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Oct 17. 2024

이 또한 지나가리라 (2)

학교와 선생님 - 여명

3.


공포스럽고 처참한 불행 가운데 다행은, 교실에서 선생님이 나를 무시하는 말을 자주 해도 아이들은 별로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만 선생님의 말을 관심있게 들었을 뿐, 같은 말이 반복되자 곧바로 관심을 잃기 시작했고 점차 귀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마도 내가 그저 선생님에게 밉보였거나 뭔가 한 번 잘못해서 선생님이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으로 흘려들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지만 선생님의 반복되는 말에 앞뒤 맥락이나 이해할 만한 근거가 없음을 알아채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수업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관심이 없었고 기억하지 못하는 듯도 했다. 겨우 10분간의 쉬는 시간에도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뛰어다니거나 친구들과 떠들기 바빴다.


나 역시 선생님의 공연한 비난을 자주 듣다 보니 그런 순간에만 잠시 머리를 숙였을 뿐이었다. 그때마다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 이런 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작은 의지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 잘못한 게 없다는 자존심, 나아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항심 같은 것도 스멀스멀 피어났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 해서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가 나에 관해 말할 때마다 나는 그저 속으로 그를 격렬하게 욕했을 뿐이다.


‘아, 오늘도 또 저러는구나. 나쁜 X. 부디 저 자가 마음을 고쳐 먹든지 아니면 학교에 못 나오게 해 주세요.’

‘제발 그가 어디 높은 곳에서 떨어지든지 아니면 교통사고가 나든지 해서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게 해 주세요.’

선생님이 나를 무시하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그렇게 속으로 기도했다.


교실에서 그렇게 고통스러운 날들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내가 완전히 어둠 가운데 묻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실에는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에서 등대와 같은 신아가 앉아 있었고 나는 매일 그 등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허우적허우적 어둠을 헤치면서 빛을 향해 전진하는 듯했다. 선생님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들어가고 싶지 않지만 신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교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고독한 내 마음은 선생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신아에게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투명한 유리 저편으로 신아를 바라보는 것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녀의 이미지가 맞닿은 그 유리에라도 의지하고 기대고 싶었다.


선생님이 그렇게 나에게 공개적으로 핀잔을 줄 때 신아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생각했다. ‘신아는 선생님 말대로 내가 정말로 멍청하고 눈치도 없는 아이라고 생각할까. 내가 선생님의 말을 듣는 나쁜 아이라고 생각할까.’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선생님의 말을 그대로 믿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신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마저 부끄럽고 어색했다.


신아는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다. 고개를 똑바로 들어 본다 해도 나는 겨우 신아의 뒷머리나 한쪽 귀가 드러나는 옆얼굴만 볼 수 있었다. 신아는 아무 생각도 없는 듯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고 일부러 나를 바라보는 일도 없었다. 나는 신아에게 내가 잘못한 것은 없고 선생님이 공연히 나를 꾸짖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신아야,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선생님이 공연히 나를 괴롭히는 거야. 부디 네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저 속으로만 외쳤다. 그것은 처량한 혼잣말에 불과했고, 우물 안에서 허전하게 울리는 메아리와 같았다. 나는 때때로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것처럼 독심술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신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애타게 부르면 텔레파시가 통해서 신아가 나를 돌아볼지 모른다고 상상하면서 나는 신아의 뒷머리와 어깨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 독심술 능력은 없었고, 신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수업 중에 또 “반장이 멍청해서…”라고 갑자기 말했을 때, 나는 또다시 금세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잠시 후 고개를 들었는데, 놀랍게도 신아가 몸을 왼쪽으로 반쯤 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아의 얼굴은 그저 투명하게 보였을 뿐 아무 표정도 없는 했다. 또는 그저 내가 불쌍하다는 듯한 눈빛만 보내는 듯했다. 그때 나는 아주 잠시 용기를 내어 신아의 맑고 하얀 얼굴을 의식적으로 바라보았다. 내 눈은 신아의 맑은 눈망울에만 초점을 맞춘 듯 신아의 얼굴만 또렷하게 보였고 그 사이에 있는 다른 아이들은 흐릿해 보이는 듯했다. 내가 그녀의 얼굴을 그렇게 의식적으로 바라보고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던 아주 짧은 순간, 신아는 이내 무심한 눈빛을 거두고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나는 신아가 나를 불쌍하고 처량하게 보는 것만 같아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도대체 쟤는 왜 저럴까? 무엇을 잘못해서 선생님에게 저렇게 자주 꾸중을 들을까’’라고 신아가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신아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싶다는 욕망이 가슴 깊은 곳에서 일렁거렸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까웠다. 그 후 한동안 나는 신아의 얼굴을 마주 보지도 못했고 신아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아팠지만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고, 아무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다. 독 안에 갇힌 쥐처럼 나는 선생님의 관용이나 무신경만 바랄 뿐이었다. 마치 우리 교실에서 내가 없는 것처럼 선생님이 행동하기를 나는 바랐다. 제발 나를 소멸한 점처럼 여기고 나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를…



4.


아이들은 선생님이 다른 학생을 꾸짖는 것에 관해,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관심이 없는 법이다. 학교에서 매일 누군가는 으레 장난을 치거나 혼날 짓을 해서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법이고, 시간적 여유가 없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심히 넘어갈 수도 있는 학생의 행동을 두고 선생님은 굳이 그 학생을 붙잡아 혼내는 법이니까.


그러니 엄밀히 따져보면, 그것은 차별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선생님은 그 순간의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서, 또한 혼날 짓을 한 학생이 누구냐에 따라서, 굳이 애써서 그를 혼을 내야 하는지, 혼을 낸다면 얼마나 소리쳐야 하는지, 또  과연 자신의 손으로 때려야 하는지, 아니면 매를 들어 때려야 하는지 매우 재빨리 판단한다. 그것은 때때로 학생의 얼굴 표정과 반응에 따라서 매우 상대적이고 가변적이기도 하다.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학생의 이러한 행동에는 이러한 내용의 엄한 말로, 또는 매 한 대로 또는 매 다섯 대로 다스려야 한다는 규칙은 없다. 그저 선생님이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학생을 혼내고 때린다. 따라서 학생이 같은 잘못을 했다 해도 선생님의 처벌은 저마다 다르다. 게다가 주변에 다른 아이들이 있을 때 또는 없을 때 군중을 의식한 선생님의 행동은 또 달라지는데, 그것 역시 오로지 선생님이 결정하는 일이다.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의 감정이나 기분 상태를 미리 알지 못한다. 아이들은 그저 무척 운이 없다고 판단할 뿐이다. 같은 짓을 어제도 하고 그제도 했는데, 또는 바로 조금 전에 다른 아이도 했는데, 하필 오늘 이 순간에 나만 운 나쁘게 걸렸을 뿐이라고 여길 때가 많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스스로를 구제할 방법은 거의 없다. 변명은 더 큰 벌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까, 정말 사람 봐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속으로는 억울하다 해도 선생님에게 걸리면 그저 내가 잘못했소, 하고 가만히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괜히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거나 남을 탓하는 섣부른 짓은 선생님의 화를 더욱 돋울 뿐이다. 더욱이 어제도 그제도  같은 짓을 했습니다만 그때는 혼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가중처벌 항목으로 더 큰 화를 불러오기 쉽다.


학생들은 학교와 교실에서 그런 일을 하루에도 여러 번 보거나 당해서 점점 무감각해진다. 자신도 그렇게 혼난 경험이 있거나 앞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므로,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다른 학생이 혼나는 것에 관해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다. 공연히 옆에 있다가 자신에게도 불똥이 튀는 것을 경계할 뿐이다. 다만, 혹시라도 자신이 싫어하는 친구가 선생님에게 혼난다면, 잘못 여부와 관계없이 그것은 신나는 일이라고 여길 뿐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소나기가 큰 비로 번지지 않고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선생님이 아이를 혼내면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무지막지하게 때리지 않는 바에야,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학생이 혼나는 것은 오줌을 누거나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하물며 교실에서 수업 중에 선생님이 두서도 없이 적당히 떠드는 꾸지람에는 거의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입만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그만이았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언제나 학생이 잘 되라는 의미에서 혼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학교에서 늘 선생님들을 경계하고 눈치를 살펴야 하는 학생들은 그런 선생님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 잘못 걸리면 나만 손해라는 것을. 아이들은 아마도 그날 선생님이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그 아이를 원래 싫어하거나, 또는 하필 선생님의 눈길이 간 순간에 그 아이가 한눈을 팔거나 장난을 치다가 우연히 걸렸는가 보다,라고 여기면서, 지나가는 자동차 운전사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성급하게 경적을 올리는 것 정도로 간주할 뿐이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나를 욕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나에게 아무 근거도 없는 비난만 퍼부었다. 그럼으로써 친구들로부터 나는 더욱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가까운 친구들과는 여전히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에 잘 어울렸다. 어린 우리는 선생님과 상관없이 서로 사이좋게 재미있게 뛰어놀 수 있었다. 나는 그들과 더욱 의식적으로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선생님에게 자주 혼나는 나를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거나 무시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아이들이 나를 정말로 눈치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멍청한 아이로 볼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바보 같은 일이었지만, 나는 너무나 주눅이 들어서 선생님과 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었는지, 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사정을 아무에게도 알릴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이 나에게 자신과 있었던 모든 것을 반드시 비밀로 해야 한다고 협박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밝혀서는 안 되는 비밀과 같다고 여겼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고, 그런 일을 당한 내가 정말로 멍청하고 우둔하고 눈치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도 나에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묻는 아이는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선생님의 일상적이고 공연한 꾸지람을 진실로 귀 기울여 듣고 관심을 갖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저 선생님은 그냥 저런 사람이야',라고 생각할 뿐이다. 선생님의 말처럼, 아이들이 나를 눈치가 없고 멍청한 아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덩치가 크고 공부도 잘하는 반장이었고, 내가 교실에서 특별히 눈에 띌 만큼 잘못된 짓을 하거나 장난을 치거나 괴상한 행동을 하지 않고 있음을 아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의 꾸중은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었다. 마치 식사할 때 김치를 먹는 것처럼, 그는 수업 시간에 툭하면 나에게 망신을 주는 날이 많았지만, 그것도 자꾸 듣다 보니 그러려니 하게 됐다. 그가 나를 공연히 비난할 때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됐다. 나는 한 번도 "왜 그러세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가만히 있는 나를 굳이 더 혼내거나 때리지는 않았으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선생님의 그런 비난은 내 마음을 후벼 파는 것이 아니라 점차 밋밋하게 들리기 시작했고 나에게도 선생님을 무시하는 마음이 커졌다. 그가 뭐라고 하든, 어차피 나는 아무 대답도 할 필요가 없었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두 달여의 시간이 지난 후 선생님은 스스로도 지친 것인지, 나에게 관심을 잃은 듯했다. 그는 여전히 나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무시했지만 그 기세는 확연히 누그러졌다. 그는 나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음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이렇든 저렇든 국방부 시계는 흘러간다면서 퇴역을 고대하는 군인들의 말처럼 그의 헛된 비난과 냉대 속에서도 시간은 꾸준히 흘러갔다.


저 유명한 문구의 의미를 나는 이미 그때 나름대로 해석하여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좋은 나날이 어느덧 흘러가듯이 좋지 않은 나날도 절로 흘러가기 마련이고,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이 온다고 해도 시간이 약이 되는 법이며, 지나고 보면 좋든 좋지 않든 흘러간 추억으로 남게 된다.


내 생애에 처음으로 가장 깊은 고난을 주었던 물결은 어느덧 나를 거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 거친 물결 속에서도 나는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나는 비록 몹시 지쳤지만 쓰러지지 않았고 무너지지도 않은 채 3학년 봄학기를 가까스로 마칠 수 있었다.



5.


그 처량하고 끔찍했던 3학년 1학기에 친구들과 노는 것과 신아를 보는 것은 나에게 유일한 약이었고 즐거움이었다. 그것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생텍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불모의 사막에 내려앉은 어린 왕자가 저 어딘가에 자신의 별이 있어서 무수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저 삭막하고 냉엄한 학교 교실 안에서 나 역시 비록 혼자만의 감정일지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무수한 무관심과 냉대와 꾸지람을 극복하는 가운데 새 희망을 찾아 흥미롭게 교실을 찾아갈 수 있었다.


나는 교실로 들어가면서 맨 먼저 신아가 있는 자리를 보았고, 내 자리에 앉아서 신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으며, 화장실을 다녀올 때도 또 교실에서 나갈 때도 신아를 바라보았다. 무수한 내 눈길은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그것은 도달할 수 없고 성취될 수 없는 아쉬움과 그리움과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있음으로써 삶의 고난과 역경은 견디어낼 만한 것이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신아가 없을 때 아이들이 떠드는 교실은 쓸쓸해 보였고, 신아가 없을 때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학교는 텅 빈 듯했다.


나는 학교와 선생님이 너무나 싫었지만 아이들과 뛰어노는 것은 여전히 재미있었다. 나는 매일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았고, 멀리서나마 신아를 자주 훔쳐보았다. 신아는 거의 언제나 여자애들 속에 파묻혀 그들과만 어울려 놀았다. 신아와 나는 임원회 때 함께 떠들거나 토의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기회는 전혀 없었다.


그 나이에 학교에서는 이미 남녀 구별이 심해지고 있어서 남자애들은 남자애들끼리, 여자애들은 여자애들끼리만 어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괜히 여자애들과 대화하고 어울리려고 했다가는 다른 아이들로부터, “재네 사귄다”라고 놀림을 당하거나 “재는 ‘이상하고 질 나쁜’ 아이”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었다.


그것은 유교문화적 전통이 심했던 당시 한국사회의 현실이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일곱 살만 되어도 남녀를 구별하고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는 유교적 관념이었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말이었다. 일상적으로 여성의 몸과 정신을 통제하려는 이데올로기였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사내아이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진다” 라든가,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 번씩 패야 한다” 라든가, “여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안 된다” 등의 여성을 비하하는 말을 자연스럽게 들으면서 자랐다. 아들을 통해서 대를 이어야 하고, 여자는 족보에도 올라가지 못하며, 시집간 여성은 남이라는 식의 남존여비 사상이 끈질기게 남아서 여성은 제2의 성이라는 인식과 행동이 사회문화적으로 또 관습적으로 묵인되고 이행되었던 시대였다. 여자가 많이 배워서 뭐 하냐, 시집이나 잘 가면 되지,라는 식으로 여성의 교육 의지를 폄하하고, 여성이 대학에 가려는 것을 막기도 했다. 여성은 종종 성욕의 대상일 뿐이고 남성의 부속품이나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나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식탁에서는 누나들에게 물 심부름을 시켰다. 밥을 먹다가도 목이 메면 나는 말했다. "누나 물 좀." 그러면 누나는 군말도 없이 일어나서 물을 가져다주었다. "네가 갖다 먹어."라고 작은 누나가 말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도 엄마는 누나에게 "좀 갖다 줘라."라고 말했다. 그래도 누나가 말을 안 들으면 엄마가 "물 좀 갖다 주면 어디가 덧나니?"라고 말하면서 직접 일어나셨다.


부모님도 그런 심부름은 아들이 아니라 딸이 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불만이 없지 않았겠지만, 누나들은 대체로 그런 문화를 불평 없이 받아들였다. 특히 둘째 누나는 “너는 가만히 있어. 누나가 갖다 줄게.”라고 말했다. 그것은 누나들이 어릴 때부터 주입받은 가정 내적이고도 사회적인 훈육이었고 강압이었다. 그런 시대적 사상과 문화는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머리와 가슴에 깊게 주입되었고, 사회적으로도 끊임없이 재학습되었다.


어쨌든, 그때 우리는 개인적으로 여자애와 가깝게 사귈 수 있다는 의식이 없었으며, 따로 어울리거나 만날 장소도 없었다. 거리에서도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이 둘이서만 가까운 사이처럼 붙어 다니면 이상하게 쳐다보고 욕하던 시절이었다. “어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붙어 다녀.”


따라서 학생들에게 남녀교제라는 것은 불량한 아이들이나 하는 짓으로 여겨졌다. 학교에서도 ‘탈선한’ 학생들의 그런 ‘불량한’ 행위를 막고자, 방과 후에 남자 선생님들이 단체로 순번을 정하여 동네 극장이나 골목 등을 돌아다니면서 거리를 배회하는 학생들을 감시했다.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남녀 학생이 데이트라도 하는 것이 발각되면 정기적으로 거리를 순시하던 선생님들은 그 학생들의 이름과 학교를 적어서 보고하겠다고 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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