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교회의 추억
1.
좋든 싫든, 누구나 어린 날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 추억으로 일생을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 평생 꿈과 낭만과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인간은 추억과 더불어 살고 추억에 지쳐 죽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신앙 문제와 관계없이 대방교회에 다니던 시절이 가장 그립다. 그때가 인생에서 무지개 같은 꿈을 꾸었던 청소년 시기였기 때문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시기에, 또 하얀 도화지 같은 내 머릿속에, 사람과 사회의 새로운 이미지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직 전혀 무르익지 않은 사색과 사상이었지만, 교회에 다니다 보니 기독교 신앙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와 더불어 교회 친구들과 다시없는 우정을 쌓아 올렸다.
종교나 신앙이 아무래도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나는 교회가 나에게 심어 주려고 했던 기독교 신앙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의 믿음은 신실하지 않았다. 약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회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고, 교회가 가르치는 방식으로 신앙심을 표현하거나 신앙의 고민을 극복할 수 없었다. 중학생이 되어서 자아와 세계에 대한 사색이 조금 더 깊어지면서부터 나는 비로소 심각하게 종교와 신앙 문제로 고심했고, 한때는 나도 모르게 밑도 끝도 없는 전통적 신앙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러한 신앙은 몇 해도 지나지 않아 천천히 형해화하다가 대학에 들어가서는 급격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때 대학은 우리에게 신세계였으니까.
따지고 보면, 기독교 신앙에 앞서 어릴 때부터 접했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토속적 종교나 신앙 같은 것도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현대적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는 매우 빠르게 그러한 전통 종교나 신앙을 ‘저급한’ 것으로 배우면서 자람으로써 매우 쉽게 그러한 전통과 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과거의 미신이나 근거 없는 신앙을 단호하게 부정하고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이미 서구화를 동경하고 따르면서 과학적 지식을 쌓아 올렸고, 나아가 드디어 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무조건적 신앙심을 극복하기에 충분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를 가르쳤던 교회 목사와 선생님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는 이미 그들의 신앙적 전통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전후 자본주의적 경제부흥의 시대에 이르러, 또 수세기 동안 축적된 과학기술의 풍부한 혜택을 받고 자라는 시대에 이르러, 예수 사후 기독교 지도자들이 수천 년 동안 발전시키고 굳건히 수호하면서 민중을 세뇌시키고자 했던 전통적인 신앙 이론과 체계를 우리는 더 이상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과거에는 아무 비판의식도 없이 받아들였던 목사와 교회 선배들의 말을 우리는 스스로 되묻고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아브라함 이후 기독교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자기 분열을 통한 비판과 살육과 전쟁과 성장과 발전의 역사였다. 영광의 로마 시대 이래 기독교의 유일한 적자이자 상속자가 된 유럽인들은 동일한 성경과 유사한 전통을 놓고 각자 독단적 해석에 입각하여 엄청난 내분과 갈등과 피의 전쟁을 치렀다. 모두 신이 원해서 했던 일이었고 자신이 옳게 믿었다고 생각한 신의 대리전이기도 했다.
신앙을 둘러싼 피의 내분과 전쟁 후에 유럽인들은 엉뚱하게도 대서양을 건너는 대항해와 혁명적인 지리적 발견을 통해 신세계로 나아가면서 점차 종교적 갈등과 결사적 투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럽인들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발전시킨 전통과 문화가 유럽 외부의 사람들의 그것들과는 매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마침내 외부 세계에서의 이익관계를 두고 전쟁과 타협을 거듭하면서도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와 종교를 이유로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그들은 과학의 발전과 세계의 확대와 함께 포교 확장의 기회를 얻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자신의 근간을 스스로 도끼질하면서 무너뜨리는 위기로 몰리기도 했다. 계몽의 시대와 과학혁명에서 비롯된 대전환의 시대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칫하면 수천 년간 유럽인들이 믿고 의지했던 기독교 체제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을 만큼 충분히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위기는 16세기 종교개혁부터 20세기 양차대전에 이르는 꽤 긴 시간이었다. 갈등과 내분과 피의 전쟁 가운데 기독교는 대위기의 시대를 맞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의 태동과 발전에 따른 교회의 대분열은 11세기에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분리된 위기를 맞은 것과 같은 창조적 파괴의 연속 과정일지도 모른다. 교회는 결국 첨단 과학이 득세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몰락하지 않았다. 그토록 찬란하게 칭송되었던 이성과 합리성은 20세기에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전쟁을 치르고 수천만 명의 유럽인을 학살한 후 야만과 비이성에 의해 전복되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나는 그러한 종교와 신앙의 변천의 역사에 관해 아래와 같은 잠정적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잠정적이긴 하지만, 그 결론이 매우 탁월하고 내 마음에 쏙 들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방기 또는 방임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신앙과 사색에서 어떤 막다른 벽에 부딪힌 채 갈 길을 잃은 듯했으므로 뭔가 확신에 이를 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세상은 넓고 갈 길은 많고, 때로는 시간이 약이 되어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도 하니까.
2.
중세가 마감되고 근대가 태동하고 발전되는 수세기 동안 성장한 부르주아 계급의 욕망과 이익과 타협하기 위해, 유럽의 교회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이 점차 붕괴된다는 위기감을 안고 불가피하게 오랫동안 자신들이 독점해 왔던 특권을 일부 양보하면서 살아남기로 했다.
18세기말에 이르러 루이 16세와 왕비가 참수되고 부르봉 왕가가 파멸된 마당에 프랑스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앙시앙레짐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발톱 빠진 사자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불가피하게 부르주아계급과 타협하면서 자신들이 구축했던 사회제도와 세계 인식의 틀을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대응 전략을 수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과거에 그들은 유일하고 배타적인 종교 권력과 비타협적인 권위적 신앙을 국가 권력 위에 덧씌워 과학과 지식을 억압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민족들과의 전쟁과 과학혁명과 사회정치적 내분을 거치면서 그들은 이제 국가와 세속적 지식에 대한 간섭과 통제 권한을 박탈당했다. 그러자 그들은 국가와 세속적 지식이 종교와 신앙에서 분리된 세계에 걸맞은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게 됐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과학과 종교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고 그들과의 양립과 병존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로써 국가와 과학은 교회와 신학의 시녀로서의 지위와 역할에서 빠른 속도로 벗어나게 되었다.
교회는 과거에는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증거들을 들이대면서도 민중들이 그것을 믿도록 강요하고 그러한 믿음이 진실하고 신이 원하는 신앙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현대에는 거꾸로 그런 증거들을 부정하는 과학지식울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신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언뜻 보면 자기모순적인 그런 전략은 놀랍게도 새로운 과학의 시대에도, 과거만큼은 아니라 해도,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초월적 존재와 종교에 의존적인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인간은 자연과 우주의 신비가, 여전히 부족하지만, 적나라하게 과학적으로 드러나고 이해되는 것을 한 눈으로 보면서, 다른 눈으로는 신비와 초월과 무한에 대한 동경심을 버리지 않고 바라보았다. 바로 그러한 이중적 시선과 비대칭적인 잣대에 근거하여 오늘날까지 과학과는 아예 담을 쌓고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종교는 여전히 생존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더욱 번창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십여 년에 걸쳐 현대 과학과 합리적 지식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 종종 매우 비이성적이고 심지어 비인간적이고 착취적인 괴상한 종교에 몰입하는 것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고 신비로운 일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인간이 가진 한 속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현세에서는 어차피 알 수 없는 내세에 관한 상상은 어쩌면 가장 절대적인 공포일 것이다. 상상적 존재로서의 내세에서 얻게 될 궁극의 구원과 영원한 징벌은 현세에서의 권선징악이나 구복 같은 개념들과 인식을 불러일으켰고, 그러한 개념들은 종교들이 내세우는 가장 대표적인 문구들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진정한 내세구원의 여정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찌 보면 공포 마케팅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그에 따른 매우 값비싸지만 실속 없는 보험 판매와도 같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종교문화로 인해 처음에는 절멸의 위기를 느꼈던 교회는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염려했던 것보다 위태로운 상황을 맞지 않았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절대적 신과 초월적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려는 공산주의 사상까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가면서 교회는 더욱 위기를 맞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거꾸로 과격한 공산주의가 몰락하는 극적인 전환을 겪기도 했다. 그만큼 인간은 스스로 존립하지 못하고 끈질기게 초월적 존재와 절대자에 의존하려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교회들과 그들이 가르친 신앙인들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신의 역사이자 신의 승리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의 이러한 굴복과 타협과 대위기 극복 후, 여전히 신에 의지하고 교회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비로소 과학과 신앙 사이의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과학 따로, 신앙 따로’라는, 언뜻 보기에는 양립불가능한 심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를 들면, 과거에는 지구가 태양 주위로 돈다고 하면 신과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그렇게 주장하거나 동조하는 사람을 화형대에 올려놓았던 사람들 또는 그러한 전통을 가진 교회들이, 이제는 그러한 과학이론이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아무 문제 없이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판단의 전환에는 도대체 어떠한 합리적 설명이 따라야 하는가.
개중에는 아직도 신앙에 기초한 과학 또는 과학에 기초한 신앙을 부르짖는, 시대역행적 사상을 지키고 확산시키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과학과 지식의 진보로 인해 그런 말을 믿는 사람들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건강하게 유지하면서 신앙심을 확립하는 방법은 신앙과 과학에 대해 완전히 ‘따로따로 의식’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 이미 과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종교와 신앙 문제에 있어서, 굳이 과학에 기초하여 타인에게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긍정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 없게 된다.
그때부터는 사회와 국가와 제도의 간섭 없이 오로지 개인의 신앙과 사상의 자유가 중요시되면서 서로 아무것도 증명하거나 논증할 필요 없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탄생한 개인주의 문화만 확산되면 우리 인류 모두는 상대적이고도 개별적으로 각자 자유를 추구하면서 존재할 수 있다. 그런 시점에서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강요는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3.
아직 과거의 신앙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등학생이 된 후에도 나는 과학과 신앙의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사이의 바다에서 오랫동안 표류한 끝에 나는 결국 교회가 새롭게 수립한, '따로따로' 전략에 기초한 ‘두 개의 세계’를 양립가능하게 하려는 전략에 점차 적응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더 이상 신의 존재와 역사를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으며, 과거의 무조건적이고 뜨거웠던 믿음으로부터는, 조금 찜찜하기는 하지만 점차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신을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사회 집단이나 지도자의 판단이나 결정이 아니라, 오로지 각 개인의 양심의 자유처럼 인식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교회의 과거의 역사처럼, 타인과 논의하거나, 타인에 의해 판단되거나, 서로 합의된 결론을 통해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오래된 것을 중요시하고 오래된 습관을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 때까지 교회 생활에 열심이었으나, 그렇게 신앙과 이성이 불안전하게 공존했던 생활은 딱 그때까지였다. 그때쯤에 이르러, 신앙에 대한 고민은 이미 일단락되었고 이어서 다소 격렬했던 나의 사춘기도 끝나고 있었다.
그 무렵 나의 가장 친한 교회 친구들 중 다수는 이미 대학 입시에 한 시간도 허투루 쓸 수 없다면서 먼저 교회를 떠났다. 그때는 거의 다 그랬다. 유명 대학에 가려는 절실한 욕망과 압박감에 사로잡혀 우리는 일요일에 단 한 시간도 교회에 바치기를 아까워했다.
그럼으로써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함께 공들여 다져서,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처럼 여겨졌던 우리의 우정은 한 명씩 한 명씩 교회를 떠나면서 성장이 느려지다가 마침내 정지되는 듯했고, 우리는 각자 예전에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