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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강원도 영월 - 김삿갓 시의 위상과 생가 논란

2024년 가을 중부지방 여행 이야기

by memory 최호인

1.


먼 훗날 연인이 열어 볼 것을 기대하면서 남길 메시지가 없었던 우리는 밋밋한 기분으로 타임캡슐공원에서 나와 시인 김삿갓 생가가 있다는 영월로 갔다.


김삿갓 유적지에는 돌탑도 있고, 시비도 있고, 김삿갓의 무덤도 있다.


김삿갓이라는 시인의 이름은 예전에는 유명했으나 아직까지도, 그러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도 유명한지는 잘 모르겠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수많은 시를 썼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의 시 한 수도 외우지 못할 뿐 아니라, 그의 시 가운데 유명한 시가 어떤 것이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의 시가 초중고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은 내가 시문학을 잘 모르고 시를 잘 읽지도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김삿갓의 시를 자세히 분석해서 평가한 글을 쓴 문학 평론가의 글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내 말은, 김삿갓의 시가 얼마나 탁월한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근대문학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어서 그런지, 김삿갓은 우리 근현대문학사에서 열외에 속한다.


그런데도 어릴 때부터 김삿갓이 유명한 것은 약간 기이한 일이다.


영미 문학이나 유럽 문학에서는 옛 시인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자주 보는데, 우리나라에서 김삿갓이라는 시인은 어떤 반열에 있을까. 도대체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방랑시인이자 풍자시인으로서의 유명세에 비해 나는 그가 문학적으로 탁월한 시인이라거나, 민족을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등의 찬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민중적 시를 썼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시인으로서의 그를 생각하면 조금 안 됐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그의 시가 문학적으로 탁월한데 푸대접받고 있다면 더욱 안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시의 가치가 별로 없는데 유명하기만 했다면 그 또한 그의 유명세를 찬탄했던 우리를 불쌍하게 하는 일이다.


나는 그의 문학적 가치와 문학사에서의 위상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19세기에 김삿갓만큼 널리 알려졌거나 탁월한 시인 또는 문학가가 별로 없는 만큼 그의 공적을 더욱 높이 평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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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이라 한다. 안동 김 씨 출신인 그는 1807년 경기도 양주목에서 태어났고 1863년 전라도 동복현(현 화순군 동복면)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김삿갓이란 이름은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자신을 "김립(金笠)", 즉 김삿갓이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되었다.


그의 젊은 시절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에 대한 불명확한 사실 가운데, 그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1811년) 시기에 투항하여 역적으로 연루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로 인해 김병연의 부친은 서른 살에 화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후 김병연은 폐인이 되어 집에 머물렀다는 설도 있고 공부를 하여 과거를 보았다는 설도 있다.


이어진 설에는, 그런데 그 과거에서 시제가 김익순의 죄상을 논박하라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며, 그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원색적인 비난의 시를 썼다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내용도 포함된다. 그가 안동 김 씨 세도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출세를 모색했으나 실패했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그런 설들은 차치하고, 그가 삿갓을 쓰고 다닌 데에는 그가 더 이상 하늘을 볼 낯짝이 없다는 이유도 거론된다. 큰 삿갓을 쓰고 다니면서 본명 대신 김립으로 불린 그는 당시 대중적으로 유행하던 삿갓을 썼다는 의미에서 민중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민중적’이라는 표현은 그가 주로 풍자 시를 많이 썼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가렴주구를 노래한 아래 시는 그가 타락한 고위 관료를 욕하는 풍자 시로 이해되고 있는데, 기발한 언어의 유희로도 보인다.


宣化堂上宣火黨 선화당상선화당.

樂民樓下落民淚 낙민루하낙민루

咸鏡道民咸驚逃 함경도민함경도.

趙冀永家兆豈永 조기영가조기영.

선화당 위 베풀어지는 화적의 무리

낙민루 아래 떨어지는 백성의 눈물

함경도 백성 모두 놀라 달아나는데

조기영 놈의 집안 어찌 오래가리오?


회갑축시라고 이렇게 쓴 시도 있다. 시골 노인의 회갑연에서 지었다고 하는데, 말장난 같기도 하다.


披坐老人非人間(피좌노인비인간)

疑是天上降神仙(의시천상강신선)

膝下七子皆盜賊(슬하칠자개도적)

偸得天桃獻壽宴(투득천도헌수연)

저기 앉은 늙은이 사람 아니니

천상에서 내려온 신선 같구나

슬하 일곱 아들들 다 도둑이니

천도복숭아 훔쳐와 잔치 빛낸다.


김삿갓은 죽을 때까지 백두산을 제외하고 전국을 누비고 다녔으며, 때로는 어느 고을에서 훈장 노릇을 하면서 숙식을 해결했다고도 한다. 그의 글 재능이 뛰어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는 평가는 일리가 있다. 그가 몰락한 양반집 자손이며, 스스로 안동 김 씨 태생임을 고통스럽게 생각했다는 주장은 그런 정황을 뒷받침해 준다. 즉, 문학이 문학만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시대에서 그는 진정한 문학적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일생을 유랑하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김삿갓에 관해 더 관심이 깊었다면 김삿갓 묘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난고 김삿갓 문학관’을 들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김삿갓의 생애나 철학이나 시에 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타임캡슐공원보다 더 빨리 훑어보고 나서 바로 떠났다. 그러나 나에게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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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삿갓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의 생가가 강원도 영월에 있는 것은 왜일까.

그 내역은 앞서 설명한 대로, 그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처형 당한 데서 시작된다.


바로 그때, “조모 전주 이 씨는 광주의 관비로 축출되었으며, 부친은 남해로 귀향을 갔다. 선생은 형 병하와 함께 노복 김성수의 등에 업혀 황해도 곡산으로, 모친은 아기 병호를 데리고 여주 이천으로 피신하였다. 후일에 조부의 죄가 멸족에서 폐족으로 감형되어 형제는 모친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부친은 화병으로 죽었고, 세인의 괄시와 천대가 심하자 모친은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난고 김삿갓문학관의 소개 중)


김삿갓은 1863년에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57세로 사망했는데, 후에 그의 아들 익균이 김삿갓의 묘를 영월로 이장하였다. 이로써 영월은 김삿갓의 방랑의 시작이자 종작지가 되었고, 그의 생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김삿갓은 경기도 양주 태생이다. 그래서 디지털양주문화대전에 따르면, 현재 양주시에 가면 김삿갓의 생가로 추정되는 터를 다져놓고 ‘유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곳에서 기와 조각과 자기 조각이 발견됐는데, 조선 후기에 사용된 기와집 터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이를 기초로 해서 김삿갓 생가 터로 추정된다고 하는 주장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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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디지털양주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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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X-qWSYpto_s

탕웨이 - 꿈속의 사랑(영화 그녀의 전설 삽입곡)


https://www.youtube.com/watch?v=yFyieM-IpJk

蔡琴 채금 - 夢中人 (현인 - 꿈속의 사랑 원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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