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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좌절

2024년 가을 여행 이야기

by memory 최호인

1.


2024년 가을, 내가 한국 여행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내 의지보다 친구들의 공이 크다.

사실을 말하면, 어쩌면 서울에 가지 못할 뻔했다. 그 사정을 설명하자면 좀 길다. 그런 복잡한 얘기를 그냥 간단히 밝힐 수 있는 것만 말하자면 이렇다.


원래 나는 9월 중순에 서울에 가기로 계획하고, 8월 초에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었다. 10월 말까지 6주간의 여정 계획이었다. 작년 가을에도 9월 초부터 11월 초까지 두 달간 여행했던 것처럼 나는 천천히 서울로 날아갈 준비를 했다.


장기간 서울에 가 있으려면 뉴욕에서 아무 문제가 없도록 준비해야 할 것은 많다. 그런 일은 매우 신경 쓰이고 귀찮은 일이지만 여행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 놓고 가야 할 문제들이다. 다행히 이미 수차례 경험을 통해 그런 일은 점차 수월해진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출국할 날이 다가올수록 나는 서울에 가려는 이유에 관해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과 근심에 사로잡혔다.


나는 왜 서울에 가려고 하는가.

나는 내딛는 발걸음에 확신이 없었다.

어디로 왜 가려고 하는지…


한국 여행을 앞두고 이런 불안과 고민에 잠기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묘한 막막함에 사로잡힌 채 고민했다. 시간이 갈수록 서울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루하루 지나고 결국 인천행 비행기를 예약한 날이 될 때까지도.

그렇게 된 데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이 여행기에 이런 내용을 수록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러나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한국에 갔는지 간단하게라도 설명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길고 먼 여행에 임했던 나의 마음가짐을 이렇게 뒤늦게나마 밝힘이 나에게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아마 위로라기보다는 책임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또는 이렇게라도 친구 Y의 우정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것에 가깝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여, 이 기록은 어쩌면 그와 함께 하고 싶은 여행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내 나름의 보상이자 그에게 주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함께 했던 혁국과 재관과 상국에게는 이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을 심하게 두드리는 이 감정은 나만의 감정이지, 타인의 감정은 아니니까. 친구 Y에 대한 감정과 추억은 가슴에 묻은 채 스스로 삭여야 할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아가, 그러한 사실을 너무 주관적으로 내세우지 말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2.


Y는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했던 친구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친구가 되었고, 이민 후에도 이따금 연락하다가, 서로 뉴욕과 서울 방문 여행을 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내가 미국으로 온 후에 꽤 오랫동안 우리는 각자 먹고사는 일로 바쁘다가 나이가 조금 든 후부터 서로 여행을 통해 우정을 다시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켰다.


내가 한국에 갈 때마다 그는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내가 한국에 가면 그는 매번 열정과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그는 과거에 나를 데리고 통영과 제주도를 여행했다. 서울과 경기도 인근 지역은 당일치기로 더욱 자주 다녔다. 나는 그가 데리고 가는 어디든지 믿고 갈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갔던 곳을 나에게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은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이던가.


함께 다니면서 우리는 수많은 주제를 꺼내어 대화할 수 있었다. 문학과 정치, 경제와 철학, 역사와 신학 등 우리의 대화 주제는 무궁무진했다. 여행과 걷기에 관한 이야기도 많았다. 우리는 무엇을 말하든, 남의 것을 앵무새처럼 베껴서 말하지 않는다. 남의 것을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그런 것들을 자신의 사상과 경험을 섞어서 말할 수 있게 됐다.


나이가 들면서도 그나 나나 끊임없이 공부를 하는 것은 비슷하다. 항상 모자란 점이 많다고 느끼면서도 새로운 앎과 알아가는 과정을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들이다. 여러 한계가 있음도 서로 이해한다. 그것은 각자 스스로 참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자존감을 다치지 않을 수 있다. 자기 그릇이 작은데도 큰 줄 알거나 그렇게 포장한다면 그것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무지 또는 기만일 것이다.


Y는 극복하기 힘든 고통을 오랫동안 견디었다. 치료 또한 더 힘들었으면 힘들었지 절대로 편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의 치료 과정을 들으면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멀리서 안타까워하기만 했다. 그는 항암치료를 위해 보름간 아팠던 경험을 겨우 한두 줄의 글로 설명했다. 항암치료는 퇴원한 후에도 기력을 찾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나는 때때로 한두 줄에 불과한 그의 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마음이 애처롭고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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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그가 2024년 2월 말 사망했다.


6년도 넘게 간암으로 고생한 그가 돌연히 사망했다는 소식을 나는 지난 3월 초에 들었다. 부고 소식이 거의 무감각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후 봄과 여름 내내 나는 깊은 상실감과 우울감에 젖어 지냈다. 무감정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딱히 할 일이나 할 말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거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거의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지난봄과 여름에, 나는 놀랍게도 아주, 정말 아주 조용히 평화롭게 지냈다.

마음에 아무 동요도 없이.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천천히 마음 깊이 스며드는 슬픔과 상실과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사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빨리 서울로 가서 정말로 그 친구가 사라졌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묻힌 무덤에라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돌연히 허무한 마음에 주저앉았다.

이미 없는데… 없어졌는데…

이제 가서 무엇을 어떻게…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구차하고 지루한 삶을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희망을 가지고 버티면서 살까.


그런 무심함 가운데서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렇게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었다.

뜨거운 햇빛이 투명한 창으로 내비치는 8월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나는 마음의 동요를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곧 서울로 가야 한다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년 가을에 두 달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뉴욕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 나흘간 나는 Y와 함께 있었다. 부산에서 한 달간 지낸 후 11월 초에 서울로 올라온 후였다. 그는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나흘간이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하남에서 내가 머물기를 바랐다. 내가 부산에서 한 달간 머무는 동안 그는 여전히 불편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기꺼이 나를 찾아와서 사흘간 함께 부산 일대를 여행했다. 그는 이미 부산도 잘 알고 있었다.


부산 여행을 마치고 수서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마중 나온 그를 만났고, 우리는 하남으로 가서 근사한 저녁 식사를 했으며 그가 예약해 둔 호텔로 갔다. 그렇게 남은 나흘 가운데 중간 이틀간 오후마다 나는 교회 친구들과 대학 친구들을 만났지만, 그 외에 자는 시간을 빼고는 모든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다.


하남에 있는 동안 그는 아침 8시면 뜨거운 커피를 사 들고 호텔로 찾아왔다. 내가 한국을 떠나던 날은 아주 맑은 날이었다. 나는 그날 밤 9시 반 비행기를 타야 했으므로 하남에서 늦어도 오후 5시 정도에 떠나야 했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예쁘게 꾸며진 북한강 둑길에서 두 시간 넘게 함께 걸었다.


그는 자신이 거의 매일 운동 삼아 걷는 그 길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강둑길을 걸으면서 탁 트인 시원한 풍경을 바라보고 우리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함께 걷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혹시 알고 있었을까.

그때가 그가 나와 함께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시간이었음을.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3.


Y가 돌연히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서울에 간다 해도 누구를 만날 수 있을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했고 희망에 찬 뭔가를 계획하기도 어려웠다. 생각나는 것이라곤, 수목장을 했다는 그의 무덤으로 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그의 무덤에서 잠시 아픈 마음을 나눈 후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가 없는 서울에서 나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

그가 없는 곳에서 나는 누구와 함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깊은 망설임이 이어진 끝에 한국으로 가야 했던 날, 나는 차마 집을 나서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몸과 마음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출국을 위해 여행 가방을 이미 싸 둔 상태였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예약해 둔 셔틀버스를 타러 가기 직전이었다. 심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가기 바로 전까지 기다리는 사람처럼, 방 안에서 말없이 기다리면서 고심하고 표류하던 나는, 표현하기 힘든 슬픔 속에서 낮아진 목소리로 항공사에 전화를 했다.


“비행기 예약을 취소하겠습니다. 예약 날짜 변경이 아니라 취소입니다.”

그렇게 나는 서울행 비행기 탑승을 포기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미 6주 여정으로 한국에 간다고 공언해 둔 뒤였는데 나는 차마 공항으로 가지 못했다. 어둠이 내려앉는 방 안에서 나는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vtETOqST3ag (8:32)

Chopin Piano Sonata Movement 3 - Khatia Buniatishvi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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