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지역 - 2024년 가을 중부지방 여행 이야기
1.
여행의 첫 날인 10월 3일 목요일.
아침 9시에 동천역에서 나는 상국, 혁국, 재관을 만났다. 맑은 날이었다. 나는 혁국이 몰고 온 차를 바로 탔으며, 거기서 바로 고속도로를 타고 단양으로 향했다. 혁국은 작년과 달리 새로 더 크고 좋은 SUV를 끌고 왔다. 상국과 나는 뒤에 앉았는데, 작년에 비해 뒷자리가 넓어져서 한결 만족스러웠다. 차에서는 새 차다운 냄새가 났고 깨끗했으며 대시보드에 넓게 펼쳐진 커다란 디지털 화면이 시원해 보였다.
인공지능(AI)이 작동한다는 그 화면에 대고 혁국은 여행지로 가는 길도 물어보고 이런저런 질문도 했다. 그러면 대시보드에서 어떤 여성이 예쁜 목소리로 친절하게 대답했다. 주인이 말하면 알아듣고 대답하는 비서와 같다. 그런 기능이 있어서 혼자 다니면서도 누군가가 동승한 것처럼 대화할 수도 있다.
세상 참 좋아졌다. 모양이 잘났든 못났든, 가격이 비싸든 싸든, 목적지까지 잘 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던 자동차의 존재 목적은 점점 달라지고 있다. 조금 더 있으면, 주인이 잠을 자도 자동차가 혼자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줄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운전자에게 필요한 여러 시각적 촉각적 장비가 자동차 안에서 줄어든다면 굳이 차를 더 크게 만들지 않는다 해도 지금보다 자동차 내부 공간은 넓어지고 안락해질 것이다.
우리 살아생전에 그럴 날이 올 것인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 생각에는 십 년 정도만 지나면 그런 시대가 올 것 같다. 우리가 늙어서 운전하기 싫어지고 점점 벅차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 때마침 거의 완전한 자율주행 시대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운전에 신경 안 쓰고, 차 안에 삥 둘러앉아서 잡담을 하거나 식사를 하거나 아예 자면서 먼 거리도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가 집보다 좋다고 생각하면서 ‘차박’하면서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국토가 너무 좁아서 문제라고 불평하고, 그런 이유로라도 한반도는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 같다.
꿈에도 그리던 그런 시대가 온다면, 밤에 부산에서 전기차에게 자율주행시킨 후 날이 밝아 일어나 보니 원산에 도착해 있더라,라고 말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한국에서 10월 첫 주는 연휴의 연속이다. 올해는 정부에서 화요일인 1일 국군의 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은 아예 한 주 내내 놀기도 했다.
혁국은 요즘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한 주에 나흘만 일하게 되어서 10월 3일부터 사흘간 여행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서울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고, 재관과 상국은 은퇴한 사람들이라서 여행 일정을 짜는 데 비교적 제약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는 말을 듣고 나중에 재관이 말했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말아라. 은퇴한 사람이 더 바빠. 매일 일정이 꽉 차 있어. 아무 때나 시간 나지 않아."
하긴 요즘은 백수 백조가 더 바쁘다고 하더라.
부러우면 지는 건데, 부럽다.
2.
우리는 만나자마자 충주로 향했다.
혁국은 거기에 ‘고구려 비석’이 있다고 했다.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가 다투던 과거 한때 남하정책을 폈던 고구려가 승전하면서 충주까지 내려온 후 큰 비석을 세웠다는 말이다. 그 비석은 충주에 세워진 까닭에, ‘충주 고구려비’라고 부르기도 하고, ‘중원 고구려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중원이라는 말은 필경 ‘가운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전형적으로 신라나 백제 중심적 사고로 나온 말인 듯하다.
당시에 고구려는 만주까지 확장된 넓은 나라였고 서쪽과 북쪽에 지역에서도 여러 민족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충주 지역을 중원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충주는 가운데라는 개념보다는, 그저 삼국이 만나는 접경 지점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중원’이라는 단어는 나중에 이 지역에 붙여진 행정구역 이름이라, 그곳에 있는 비석도 그렇게 불리게 됐다.
하여간 이 비석은 한반도 내에서는 유일한 고구려비이며, 5세기 무렵에 제작되었다. 높이 2.03m, 폭 55cm, 두께 33cm의 크기이며, 대한민국 국보 제205호이다.
이 비석은 처음에는 장수왕 시기에 건립되었다고 알려졌지만, 2019년 재조사 결과 광개토태왕 시기에 건립되었다는 주장이 나와서 주목받고 있다. 비석을 새로 판독한 결과,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영락(永樂)은 광개토태왕이 즉위하고 붕어하기까지의 연호이다. 이 비석은 1979년에 발굴됐는데, 비석 표면이 심하게 마모되어서 글자 판독이 어려웠었다.
고구려가 한반도로 왕성하게 진출했던 시기에 충주 지역에는 고구려의 남부 거점인 ‘국원성’이 있었는데, 신라가 점령한 후에 ‘중원경’으로 개칭했다. 그런 이름에서 비석 이름에 중원을 따왔다면 그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고구려가 세운 비석에 신라의 점령지 이름을 붙이는 것도 어색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주 빠르게 충주고구려비전시관을 돌아보고 나왔다. 전시관이라고 해야 중요하게 볼 만한 것은 비석 하나뿐이고, 나머지 전시물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교육적으로 꾸민 것들이다. 우리가 비석에 있는 글자를 읽지도 못하고 판독하는 것도 아닌데 전시관에서 오래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이 전시관 내부와 외부에서 삼족오 모양을 보게 되는데, 믿거나 말거나 그것이 고구려의 상징이라고 한다. 세 개의 발을 가진 까마귀라는 뜻을 가진, 전설적 동물인 삼족오는 예전에 TV 드라마 ‘주몽’이 크게 유행했을 때 그것이 고구려의 상징이라는 것을 전 국민이 알게 되었다.
그런데 고구려는, 왜 고조선의 상징과 같은 곰을 상징으로 내세우지 않고, 삼족오라는 상상의 동물을 상징으로 내세웠을까.
고구려는 부여족의 한 갈래이고, 부여족은 ‘해모수’, ‘해부루’ 등 해를 상징하는 단어를 부족장 이름에 넣었다. 즉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태양의 아들과 삼족오는 또 무슨 관계인지 알기 어렵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삼족오가 자주 발견된다고 한다. 삼족오는 동아시아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이며, 거슬러 올라가면 가루다나 금시조에서 내려온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가루다는 인도 신화에 나오는 신비로운 새로서 새들의 왕(독수리)이며, 천상에 사는 새이다. 힌두교의 삼주신 중 하나인 비슈누가 타고 다니는 동물이며 힘과 용기의 신으로 여겨진다. 가루다는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의 국가 상징에 들어갈 정도로 신성시된다. 힌두교의 가루다가 불교로 편입되어 금시조가 되었다.
하늘 높이 떠 있는 해가 삼족오라거나, 해 안에 삼족오가 살고 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삼족오가 까마귀가 아니라 단지 새의 이름이 오(烏)이며, 다리가 3개 달린 오이므로 삼족오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까마귀 오'자의 다른 뜻이 바로 저 새의 이름을 뜻하는 고유명사라는 뜻이 된다.
3.
아무튼, 고구려가 이곳까지 내려왔다고 하니, 만주에 있던 고구려는 매우 큰 나라였고, 중국으로부터 한반도를 수호했던 나라였다. 그에 비해 신라와 백제는 나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작은 곳이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다시 스쳤다.
잘 모르긴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역사를 세부적으로 밝혀 말해서, 또 하필 신라가 한반도를 당나라와 반으로 갈라 남부를 차지하게 되어서 그렇지, 어쩌면 다른 나라라면 이렇게 작은 곳들을 나라 취급이나 할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혹시라도 백제와 신라를 폄하해서 하는 말로 들릴까 두렵지만, 워낙에 나라의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내 말을 듣고 다른 친구들이 말했다. 중국에도 유럽에도 크기가 매우 작은 나라들이 있었다고. 그런 지적은 맞는 말이다. 그런 나라들에 비해 백제와 신라는 나름대로 독특하게 발전한 세련된 문화까지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랄까.
훗날 거대한 고구려가 먼저 망하고, 당과 연합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다소 아쉬운 일이다. 고구려의 옛 땅을 거의 다 당에게 빼앗긴 것을 두고, 신라를 기준으로 말하니까 ‘통일’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하는 것일 뿐, 그게 어디 삼국통일이라고 말할 수준이 되기나 할까.
무너진 고구려 땅에서 발해가 부흥했을 때, 통일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은 발해를 ‘북국’이라고 표현했다는 예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그러나 발해가 신라를 ‘남국’이라고 표현한 예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발해의 주류 하층민이라는 말갈족을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국가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너무 오랫동안 한반도 남쪽을 중심으로 지나치게 ‘단일민족’에 기초한 역사로 해석했다는 비판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반도와 만주와 그 주변에서 존재하다가 사라진 민족들을 생각해 본다면, 또 작은 의미의 ‘민족들’’이 아니라 ‘영토와 나라’를 중심으로 그 내부에 존재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민족과 영토와 국가는 확대되고 ‘한국’의 의미도 더욱 커질지 모른다.
이런 것은 결국 ‘사관’의 문제일 것이다.
사관이란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을 말한다.
사관에 따라서 역사는 얼마든지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된다. 저명한 역사가인 E.H. 카의 말에 따르면,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바람에 우리 민족의 영토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고구려에 비해 신라의 역사와 전통은 후세들에게 과도하게 부풀려 교육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역사이려니, 그것을 지금 와서 어찌한단 말인가.
https://www.youtube.com/watch?v=hiYajw79C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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