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 중부지방 여행 이야기
1.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을 재빨리 훑어본 우리는 곧바로 역시 충주에 있는 ‘탑평리칠층석탑’을 보러 갔다. 조국을 떠나서 산 지 오래된 나로서는 충주고구려비도 그렇지만 ‘탑평리칠층석탑’이라는 이름도 낯설게 들렸다. 혹시 어릴 때 이런 걸 배웠었나. 예전에 배웠을 수도 있지만 생각도 나지 않는다. 탑평리라는 고을 이름도 새롭다.
역시 기억은 시간 속으로 자꾸 묻혀진다.
다만,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은 충주 지역, 또는 충청북도 지역이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모두 겹쳐서 영토 전쟁을 했던 곳이라는 사실이다. 충주 고구려비석으로 말미암아 알게 된 사실은 충주 지역이 그들이 주로 부딪혔던 주된 ‘중원’이라는 장소이다.
그 전에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시절에 이 지역을 점령한 후 ‘국원성’을 건설한다. 나중에 신라가 국원성을 ‘중원경’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미 밝혔다.,또 훗날 그곳의 행정구역은 ‘중원군’으로 불리게 된다.
고구려가 멸망하게 된 것은 주변에 있었던 수많은 소국들 때문이 아니라,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581~618)와 당나라(618~907)와 벌였던 대규모 전쟁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주로 신라의 입장에서 기록된 역사를 배웠기 때문에 ‘라당연합’이라든가 ‘통일신라’라는 식으로 표현하지만, 중국이나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를 다르게 생각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당나라가 철천지 원수인 고구려를 공략하기 위해 신라를 끌어들였지만, 그것을 ‘연합’이라고 꽤 동등한 지위처럼 말하는 것은 신라에게 과분한 처사다.
고구려에게 주된 전장은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한반도 남쪽이 아니라, 중국 대륙과 북방 국가들이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명운에 영향을 줄 만한 나라라고 한다면 신라나 백제가 아니라, 중국과 몽골 지역의 국가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충주 지역을 ‘중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신라의 표현일 뿐일지 모른다.
고구려는, 아마도 광개토대왕 시절에 사방팔방으로 영토를 확장하다가, 남쪽에서는 충주까지 점령한 후에 그곳에 비석을 세우고, 그곳을 ‘국원성’’이라고 이름 붙였다. 국가의 기원이 될 만한 지역이라는 이름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고구려가 한반도 안에서 겨우 하나의 비석을 세울 때, 충주에다 세웠다는 것이 고구려를 우리 민족으로서 매우 친근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역사적 사실 중 하나다.
고구려는 비록 만주를 중심으로 발전했지만, 그래서 한반도 남쪽에서 태어나 자란 우리가 같은 민족으로 느끼기에 다소 거리감이 있지만, 자국의 뿌리가 한반도에서 비롯됐음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2.
하여간 삼국 사람들이 느꼈다고 믿기 어려운 ‘민족의식’에 관해 생각한다.
충주 부근에서 서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빼앗기 위해서 싸워야 했던 우리 민족, 우리 선조들!
우리는 그들이 모두 우리의 선조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서로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들은 과연 서로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자신은 형제들인데 어쩌다 보니 영토 정복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그래서 혈육을 죽고 죽이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에게 그렇게 혈연으로 얽힌 ‘민족 개념’이 있었을까.
아무래도 생김새가 비슷하고 언어와 문화 풍습도 비슷할 때 서로 핏줄이 섞여 있나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서로의 유대감을 높이거나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의 현실을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럴 때 민족의식이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피보다 진한 물’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하는가.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혈연이나 민족의식은 매우 실제적이고 효율적인 요소 또는 영향력인 듯하지만, 현실적 이익관계와 반드시 합치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갈등관계를 넘어서 때때로 적대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다른 한 쪽을 멸살시키기 위한 살육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혈연 의식이나 민족감정은 혹시 우리를 기만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그러한 이데올로기로 인해 누구나 당연히 추구하는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한 집단 내부에서 상층부 지배계급과 하층부 피지배계급 사이에서도 이데올로기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 집단을 현실적 공동이익 집단으로 간주하고 나면, 즉 타 ‘국가’에 대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간주한다면, 적대적인 다른 집단이 설사 혈연적으로 얽혀 있고 언어와 문화에서도 동질적이라고 해도 공생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민족의식이라는 것은 종종 허위의식과 별다른 차이가 없지 않은가.
고대 삼국 사이에 공동의 민족의식 또는 공동의 민족감정, 또는 ‘동포’라는 개념이나 의식이 존재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설사 그런 감정과 의식이 존재했다 해도 현실적 이익관계에서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떤 까닭에서 비롯됐는가. 그것을 오로지 당대 지배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피지배계급을 허위의식으로 통제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백제와 신라를 각각 내부적으로 결속하는 것은 어떤 의식이었는가. 민족 의식이나 감정보다 더욱 강력한 국경 내부 집단의 공동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을 허위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삼국의 관계를 생각하거나, 이후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친 남북국시대를 생각할 때, 우리의 혈연 관계나 민족의식 또는 민족감정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아할 때가 있다. 선명할 것만 같았던 우리의 민족의식과 단일민족 감정은 때때로 흐려진다.
한국은 현재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사회에서 우리가 오랜 세월 가지고 있었던 민족의식이나 민족감정은 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사회에서 민족의식이나 민족감정은 그 국경 내부에 속한 전체 집단의 공동이익 실현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가령 미얀마를 보면서, 압도적 다수인 한 민족과 다른 소수민족들이 합쳐진 다민족국가의 현실은 복잡다단하기만 하다.
하나의 민족이 가질 수 있는 공동의 역사적 경험과 혈연적 친분 관계를 넘어서는 다민족 다문화 사회에서 집단적 사회적 결속력과 유대감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3.
아주 밋밋하고 단순하게 생긴 칠층석탑은 충주시 탑평리에 있어서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 그래도 이 석탑은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에서 가장 크고 높다.
삼국이 맞서는 요충지에 있다고 해서 ‘중앙탑’이라고도 불리는 이 석탑은 통일신라 원성왕(재위 785~798)에 건립되었으며, 높이 14.5m에 이른다.
이 탑은 땅이 약간 솟아오른 평지에 있어서 아래로부터 보면 매우 웅장해 보인다. 그 앞에 가서 서 보면 탑이 얼마나 높은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높이에 비해서 너비, 특히 밑단들의 폭이 좁아서 안정감은 덜해 보인다.
신라인들의 눈으로 봐도 탑 아랫부분이 좁아서 조금 불안해 보였을 텐데, 왜 저렇게 지었을까 의아하다. 내가 찍은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가만히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나처럼 건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안정감을 위해 밑단을 더 크게 했을 것 같은데 그들은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
개천절이라 그런지, 칠층석탑을 보기 위해 꽤 많은 사람들이 왔다. 석탑 주변에도 사람이 많았지만, 석탑 아래쪽에도 천막들이 설치되어 있어서 아마 이 지역 페스티벌이라도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우리가 갔던 날이 수요일이니까 어쩌면 주말에 축제를 크게 열지도 모른다..
우리는 탑 앞에서 사진만 찍고 나서 곧바로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탑 앞에서도, 자동차로 돌아온 후에도, 우리가 이 탑에 관해서 나눈 대화는 하나도 없었다. 탑에 관한 한 딱히 나눌 말이 없었다. 그저 거기에 저런 탑이 있었구나, 하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뭐가 급한지 모르지만, 혁국과 재관은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하늘에 옅은 회색 구름이 몰려들고 날이 점차 흐려져서 금세 비라도 내릴 모습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RCeA1NbK00
G Minor, Bach by Johann Sebastian Bach
https://www.youtube.com/watch?v=MC44L5T0FVA
"G Minor"- (arranged by Luo Ni, Piano Tiles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