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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충주 - 탄금대와 팔천고혼위령탑

2024년 가을 중부지방 여행 이야기

by memory 최호인

1.


탑평리칠층석탑에 이어 우리는 탄금대로 향했다.


탄금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예전에 누군가 피리를 연주했던 경치 좋은 곳인가 보다,라고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잽싸게 주차장으로 돌아와서 차에 앉은 혁국은 자동차 AI에게 행선지를 '탄금대'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러 하위 선택사항이 나오길래, 혁국은 세부적으로 탄금대 주차장으로 정했다.


탄금대 주차장에 도착한 후 조금 바쁜 걸음으로 산 위로 올라가다 보니, 느닷없이 ‘팔천고혼위령탑(八千孤魂慰靈塔)’이라고 적힌 높은 탑이 보였다. 임진왜란 때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싸우다 산화한 신립 장군과 8천 군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08년에 탄금대로 올라가는 길에 세워둔 위령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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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는 탄금대 ‘충혼탑’도 서 있다. 그 탑도 꽤 높아 보이는 것은 비슷하지만, 임진왜란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느낌을 주는 탑이었다. 충혼탑은 한국전쟁 시기에 죽은 군인들을 위해 세워진 탑인 듯했다. 충주 참전전우회와 상이용사회 회원들에 의해 제작됐다고 한다.


나중에 이 글을 쓰면서 조사해 보니, 충혼탑은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순국한 충주 출신 전몰장병과 경찰관, 군속, 노무자 2838인의 넋을 추모하고자 1956년에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행사를 지낸다.”(다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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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이 탑은 원래 그곳에 있는 탄금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냥 탄금대로 가는 길목에 장소를 얻어서 설치한 듯하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싸웠던 신립장군과 조선군의 위령탑이 있는 곳이니까 ‘애국심’ 고취 차원에서 만들어진 모습이다. 그래서 이곳은 역사 유적지라고 하기에는 과거와 현대, 또 역사적 의미가 뒤섞여서 뭔가 약간 뒤죽박죽이 된 느낌이 든다.


하여간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 때 가야금의 창시자로 알려진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던 곳이라고 한다.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한 곳이 가야와 신라에서 어디 한두 곳이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탄금대가 유명해진 것은 하필 그가 악기를 연주한 이곳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 때의 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살게 하고는 신라 청년 중에서 법지, 계고, 만덕을 뽑아 보내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기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한다. 그가 이곳에 터를 잡아 풍치를 즐기며 커다란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곳을 탄금대라 불렀다고 한다.” (나무위키)


우륵이 가야금 연주만 잘하나 했는데, 이 기록은 그가 노래와 춤에도 능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독일 라인강가에 있는 로렐라이 언덕의 전설과 같았다면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매혹된 사람들이 다가오다가 강물에 빠져 죽었어야 할 것 같은데, 한국의 전설 아닌 삼국사기는 가야금 소리에 매혹된 사람들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었다 하니, 역시 독일과 한국은 소리에 관한 관심이 참 다르다.


탄금대는 가야금을 연주하던 정자를 말한다. 거기에서 내다보니 소나무 사이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 옛적에 정말로 우륵이라는 사람이 여기 앉아서 가야금을 연주했을까. 그 소리가 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흘러갔을까.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이 고을을 만들었을까.


조금 우스운 전설이다.

고을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다고 상상하는 것이.


그러나 아무튼 드넓은 충주 평야에 한강이 흐르고 있어서 평화로움과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곳이다. 탄금대 아래 강가로 가서 내려보니, 거대한 색유리 같은 강물에 구름 낀 하늘이 거울처럼 반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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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여간 가야금은 그렇다 치고, 16세기에 이르러 탄금대는 왜란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1592년에 부장 신립이 군사 8천을 거느리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과 싸웠던 전적지가 바로 이곳이다.


탄금대 북쪽에는 신립이 열두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활줄을 한강 물에 적시어 쏘면서 전투를 지휘했다고 해서 '열두대'라는 별명이 붙은 절벽이 있다. 물론 우리는 그곳에 가볼 꿈도 꾸지 않았다. 다만 탄금대에 가서 유유히 흐르는 한강만 바라보았다. 탄금대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무척 아름다웠다. 푸른 강물은 아주 잔잔히 흐르고 있어서 마치 움직임이 멈춘 정물화로 보였다.


그런데 열두대라는 이름을 듣고 생각해 보니,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활줄을 물에 적시는 이유까지 설명해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설명은 없었다. 그것은 왜 그럴까. 혹시 활을 계속 사용하면 시위가 말라서 줄이 마모되거나 늘어나는지 또는 시위가 미끄러져서 활 쏘는 것이 불안정해지는지, 나처럼 활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하긴 이런 것을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나중에 이에 관한 사료를 보니, 신립 장군이 너무 활을 쏘다 보니 손가락에 열이 나고 살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어떤 자료는 그가 쉬지 않고 활을 쏜 나머지 손가락의 뼈가 드러날 정도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신립은 아마도 훈련도 되지 않은 군사들에게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한다는 투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한강을 뒤에 두고 진을 구축했다. 배수진 작전으로 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적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패색이 짙어지면서 신립 장군은 강으로 투신자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그렇다 치고 8천 군사들은 어찌 됐단 말인가. 모두 왜군에 의해 죽었다는 것인지, 신립 장군을 따라 함께 강물에 투신한 사람이라도 있었는지… 향토 사학자들은 이런 점들을 더 연구해서 함께 알려주면 좋겠다. 8천 군사는 어찌 되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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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탄금대로 올라가면서 혁국은 신립 장군의 배수진 전략에 관해 이렇게 평가했다.

“신립에 대한 평가는 엇갈려. 아니, 바보같이 한강을 뒤에다 두고 싸우면 어떻게 하냐. 강을 적과 사이에 두고 싸우는 게 전술적으로 낫지, 괜히 8천 군사를 죽음으로 내몬 것 아닌가.”


무기도 허술하고 오합지졸과 같았을 8천 군사를 장렬하게 그러나 다소 허무하게 죽도록 진을 짠 장수에 관한 짜디짠 해석이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런 평가가 맞는지 안 맞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당시의 전쟁 상황이나 신립 장군의 군사 조건 상황이나 일본군의 상태를 비교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비교평가할 능력도 없지만!)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혁국의 말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의지만으로 전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또 현명하지도 않은 일이니까. 역시 운이 좋아야 현명한 지도자를 만날 수 있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1592년에 전투 훈련이 되지 않은 급히 징발하여 급조된 군사들을 보고 신립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10만이 넘는 적군이 물밀 듯 전진해 올 때 신립은 어떻게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한강을 왜적과 사이에 두고 싸우든, 한강 앞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든,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게릴라 전법으로 싸우든, 어차피 왜적을 막기는 불가능해 보일 때 신립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왜군과 지속적으로 또 효율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라면, 나라도 배수진 전술을 택하지 않을 것 같다. 전투 경험도 풍부하고 숫자도 압도적인 일본군을 생각할 때 게릴라 전법을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이니까.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해도, 시간을 끌면서 전투를 하다가 중앙 정예병들이나 주위의 다른 조선군들과 연합하거나 게릴라 전투를 수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이제 와서 하는 엉뚱한 발상일 뿐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어차피 그 당시를, 당시의 실전 상황을 올바로 상상하기 어렵다.


오히려 나는 죽음을 앞둔 병사들을 상상한다.

이 싸움은 왜 시작됐는가.

나는 누구를 위해 창이나 죽창을 들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

이길 수 있는 승산이라고는 거의 없는 전투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정이 치열한 당파 분열 상태에 있었고, 그 휘하 관료 대부분은 전투 훈련을 한 적도 없었을 테고, 상당수는 탐관오리와 같아서 백성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데 골몰했고, 심지어 매관매직하면서 사익을 챙기기 바빴고, 대부분의 군대는 농민을 동원하여 결성한 일종의 오합지졸과 같아서, 어차피 전국통일전쟁으로 단련된 일본군을 상대로 해서 싸우기에는 분명히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말은 전술이 문제가 아니라,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군과 싸우기에는 우리나라와 우리 군대가 지극히 허약했다는 말이다.


한강 사수 명령을 받은 신립도 결국 자살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나라와 무능한 조정은 불쌍한 백성과 농민과 관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선조는 한밤중에 한양을 버리고 탈주하여 의주까지 도망갔다. 신립과 충청도 백성이 배수진을 치고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운 뜻은 뜨겁지만 현실은 매우 냉정했다. 거기에 국가적 위기와 개인들의 인간적 고뇌 사이의 거대한 간극이 놓여 있다.


이처럼 무능하고 무책임한 국가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개처럼 내던져야 하는가.

물론 그런 우문에도 이순신처럼 현답을 내놓는 위인도 있다.

그런 위인과 그런 위인을 지도자로 둔 백성들의 힘이 모여서 조선은 결국 일본의 침략을 극복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순신은 위대하고 국가와 백성은 비참하다.


4.


나중에 신립 장군의 역할과 전술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조사해 보니, 당시 상황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신립 장군은 중앙정부에서 보낸 기병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넓은 들판에서 기병전을 준비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 기병이 진군하기에는 도로 사정이 매우 안 좋았다. 논밭의 도로가 좁고 봄에 비가 내려서 말이 달리기에는 땅이 질척거렸던 것이다. 거기에다 전투와 전법에 능한 일본군은 기습 우회작전까지 폈으며, 결과적으로 조선군은 참패했다.


임진왜란사에서 이 전투는 매우 유명하다. 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일본군은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 관한 여러 논란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지만 내 역사 지식의 한계로 인해 더 자세히 기술하기는 어려움을 독자들은 양해하시기 바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이 참패했다는 것 외에 전법의 공과에 관해 알지 못하는 내가 섣불리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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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야(Coreyah) - 내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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